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롬 1:18-25)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또는 이는 그들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심이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에 대해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나 참 하나님을 무시하고서 하나님 대신에 우리 자신의 두뇌로 허황된 우상들을 만들어 의와 지혜와 선함과 능력을 그것들에게 찬미하여 돌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일상적인 행위들을 사악하게 판단하여 모른 체함으로써 그 행위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배제시킬 뿐 아니라 그것들을 행하신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미를 우리가 묵살하는 것이다.
이 글은 기독교강요 1권 1-5장의 중요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지은 것이다. 이로써 칼빈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그의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어서 구원에 이르는데 필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성경의 필요성을 논하게 된다.
1-5 장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첫 번째 주요 관심은 모든 인류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과 이 관계에 근거하여 우리 모두는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도 이 첫 다섯 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자신을 아는 명쾌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본 다음 이어서 그를 묵상하고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 자신을 살펴야 한다. (1.1.2) … 우리의 지식은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둘째로, 우리의 안내자와 선생으로서 그 지식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1.2.2) …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과 그분이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증거에 의하여 정죄 받는 것이다.(1.3.1) … 비참한 사람들은 마땅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세속적인 어리석음의 자로 하나님을 판단하여 건전한 탐구를 하지 아니했다. 이로써 어리석은 호기심에 이끌려 허망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다.(1.4.1) …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자연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게 되면 아무런 확실하고 명쾌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 이름 없는 신을 섬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1.5.1)
만일 우리가 로마서 1:18-25을 읽고 칼빈의 기독교강요 1-5장을 읽으면 순서와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의 상호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외하거나 영광 돌리지 않기 때문에 아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빚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다.(행17:28)
이런 까닭에 이 두지식이 뒤엉켜있다고 칼빈은 단언한다. 사람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두 지식은 뒤엉켜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독립적인 실재로 우리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허망한 환상을 갖게 되고 만다. “우리는 땅 너머를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는 한 스스로를 가장 멋있게 생각하고 반신(demigods)으로 여긴다”(1.1.2) “이런 까닭에 우리 자신의 무지와 허무함과 빈궁함과 연약함 그리고 부패와 오염을 마음으로 느낄 때 참된 지혜의 빛과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모든 선 그리고 순결한 의가 오직 주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1.1.1)
이 같은 깨달음은 성령으로 생각이 변화된 자들의 경우에만 가능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 아주 밀접하게 뒤엉켜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참으로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를 아는 지식의 상호관계를 논한 다음 칼빈은 3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먼저 논한다. 롬1:18의 바울의 논증 논리를 따랐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타고난 본능에 의한 신 의식은 칼빈의 말에 의하면 키케로에게서 빌려온 개념이 아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지역이나 도시나 가정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신 의식에 대한 무언의 고백이 새겨져 있었다”(1.3.1)
신 의식에 대한 보편적 증거 때문에 우리에게 신 의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의 고백으로서 보편적 증거가 분명한 것은 바울이 제시한 성경의 주장이 참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는 이 신 의식이 모든 사람들 안에 새겨져 있다는 증거라 한다.(1.3.1)
이 신 의식을 본성의 빛으로 언급한다. 부패한 본성에 아직도 남아 있는 빛은 주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종교의 씨를 가지고 있는 것과 둘째,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양심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통해 어떻게 해서 계시되어 있는가를 설명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우리의 생각 속에 심어진 종교의 씨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내면적 방식과 외형적 방식 둘 다를 통하여 심어진 것이다.
▲이종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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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말입니다 집 월세(임대료)를 내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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