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日. 미세먼지 걷힌 채 맑고 따뜻하고 추억하기 좋은 날
11월20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보살님과 거사님 모두 무릎을 털고 일어서는 바람에 서울 팀도 덩달이로 엉덩이를 털며 공양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점심공양 후에는 차실茶室에 모여앉아 한두 시간정도 차담茶啖을 한 뒤 주지스님과 함께 충청권 두어군데 사찰순례를 하면서 그 사찰 주지스님과 차담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차에 얽힌 이야기뿐만 아니라 불교와 절에 대한 애정 어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세상을 보는 안목과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지혜를 넓혀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례길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읽고 토론하기의 일요법회만큼이나 좋았습니다. 순례를 마치고나서는 드물게 절에서 저녁공양대접을 받는 일도 있었으나 보통은 절에 부담을 드리기 싫어하는 우리스님 취지를 따라 밖으로 나와서 입맛 돋우는 저녁식사를 맛나게 했습니다. 칼국수도 먹고, 게국지도 먹고, 산채비빔밥도 먹고, 어죽도 먹고, 시골집 묵밥도 먹고, 할머니밥상 한 그릇도 먹고, 어쩌다 탕수육에 짜장면이나 짬뽕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정한 일요법회 도반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보통 밤7,8시가 훌쩍 넘어서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 서울 팀이 막상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시간은 거의 밤9시 가까워질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느지막한 그 시간대가 서울을 가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일요일 오후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 지·정체의 혼란을 지난 3년간의 경험으로 모조리 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오후6시에 출발을 하건 밤9시에 출발을 하건 서울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비슷해서 주차장에 차를 넣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잠깐 씻고 나오면 보통 자정子正이 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요일 하루의 무게가 온몸에 부딪치듯 뿌듯해오면서 가슴 가득한 즐거움이랄까 성취감 닮은 활발한 기운이 발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솟아올라와 우리 부부는 항상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정오를 조금 넘어선 오후3시에 한 걸음 한 걸음 사찰순례 없이, 향훈 감도는 저녁식사도 없이, 밤안개 소슬한 찻집의 여운도 없이, 바로 서울로 향하자니 뭔가 20% 허전한 느낌이 들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언뜻 들으니 태평거사님과 김화백님은 팔봉 호당거사님에게 건너가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팀은 오늘은 일단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이런 애매한 과정을 거친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일요일 오후 일정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성화活性化될 것입니다. 정확하게 오후3시20분에 천장암 주차장에서 출발했는데 서울 집에 도착을 하고났더니 밤8시를 살짝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 기록으로는 6시간 40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좋았습니다. 우리 차안에는 대화가 있고, 토론이 있고,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보는 견해가 있고, 일요일 하루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공감하며 숨 쉬듯 관찰한 삶의 현상들을 정견正見을 통해 정사유正思惟와 정정正定으로 향하게 하는 맑은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맞긴 맞는 말인데 글을 성심껏 쓰다 보니 조금 과장되고 상당히 어려워져버렸습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아무튼 간에 좋았었다는 간단한 말을 다소 현학적衒學的이고도 잰체하는 표현을 통해 사실을 약간이나마 미화美化하려고 했다는 점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건 그렇다하더라도 사실 어떤 때는 그 맛에 글을 쓰기도 합니다만 실은 그렇습니다. 아무러나 평소에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데 근래에 뜬금없이 일요법회 앵커맨을 맡다보니까 왠지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면 독자들을 의식하면서 얼굴에 가벼운 분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등 쓸데없는 잡념이 일어나는 것도 같습니다. 인기人氣와 환호歡呼를 먹고사는 연예인들이나 정치가들의 긴 그림자가 슬그머니 내 발등을 덮어오려고 하면서 그들 나름의 어두운 고뇌를 주춤주춤 손 흔들며 전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글이 무겁거나 심각해지지 않도록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지라 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군대에 간다고 하면 청년이 바로 훈련소로 직행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예전에는, 그러니까 최소한 6,70년대에는 청년이 군인이 되는 절차와 단계가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든 직장을 다니든 병역을 위해 신체검사를 받으러가면서부터 학생이나 총각이라는 명칭이 장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징집 영장을 받아들고 소집장소로 가서도 여전히 훈련병이 아닌 장정으로 불립니다. 군대징집 소집장소에서 논산훈련소로 가는 군용열차는 언제나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해름녘에 목적지를 향해 서서히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밤새 어디론가 돌고 돌아 논산역에 도착을 합니다. 그래서 어둠을 태우고 출발한 입영열차는 대개 새벽에 도착을 해서 날이 밝아오기 전에 장정들은 아직 주변이 어두운 부대로 들어갑니다. 논산 훈련소 부근에 장정대기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장정들이 먼저 들어가는 곳은 논산 훈련소가 아니라 바로 이곳 장정 대기소입니다. 이 장정 대기소에서 짧으면 사흘, 길면 한 달 이상 대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정 대기소에서 하는 일이란 다시 신체검사를 받는 일이 전부인데 일반인도 아니고 훈련병도 아닌 장정이라는 어중쩡쩡한 명칭이 말해주듯이 장정들은 각자 소속된 부대가 있기는 하지만 훈련이나 일과라는 것이 따로 없어서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에만 숙소에 모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능력껏 사역을 피해 부대 안을 요리저리 숨어 다니는 것이 일과인 기묘한 부대입니다. 아, 장정 대기소의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습니다. 대개 신체검사 중 시력검사를 할 때 장정들의 서류를 전부 걷은 후에 공수부대원과 단기 하사관들을 차출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당해서 공수부대원이나 단기 하사관 차출에서 빠져나가는 비법이 또 전해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력과 학력을 속여 보고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력을 속이거나 학력을 속이려다 걸리게 되면 이번에는 얻어터지기도 하고 차출도 당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검사 결과에 따라 장정이 장정 대기소에서 귀향조치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귀향조치는 일반적으로 질병이나 신체상 결격사유에 의한 것인데 대부분 성병과 치질과 피부질환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체검사를 마치면 각자 자신이 논산 훈련소로 들어가는 날짜를 통지받고 그 날짜까지 잘 숨어 다니다가 논산 훈련소로 들어가면 장정 대기소는 영원히 작별입니다. 나는 보름동안을 장정 대기소에서 보냈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평균치가량의 장정 대기소의 훈련병 수습기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3년 동안 복무해야 할 군대생활의 기법 30%는 이 보름 동안에 다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던 장정이 판개라는 공수부대원이 되려다만 미래의 논산 훈련병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얼굴이 있고, 체격이 있고, 성품이 있고, 나이가 있고, 배경이 있고, 학력이 있고, 경력이 있고, 실력이 있고, 본향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의 체격이나 학력이나 본향보다는 얼굴과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함으로써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나 친밀도를 측정하게 됩니다. 그만큼 첫인상을 판가름할 얼굴이나 명함에 적혀있는 이름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건 그런데 나판개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 아,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지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읽으면 나판개, 거꾸로 읽으면 개판나, 어느 쪽으로든 뜻이 통하고 사통팔달四通八達 활발해 보이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판개 장정은 군을 제대하고 돈을 벌면 이름부터 확실하게 바꾸겠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은 나판개가 아닌 나 모모 씨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판개 장정은 장정 대기소에 대해 불평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장정 대기소를 탈출하여 하루빨리 정식훈련소에 진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낸 것이 신체검사 중에 공수부대원이나 단기하사관에 차출당하면 그 즉시 훈련소에 투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예상했던 대로 시력검사를 측정하는 막사 안에서 서류를 모두 걷어간 후에 공수하사관들이 들이닥쳐 공수부대원 차출을 시도했나봅니다. 그래서 우리 판개 장정도 지원자 거수擧手! 할 때 손을 번쩍 들어 씩씩하게 지원신청을 했고, 그 자리에서 서류전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합격 판정 거의 막바지에 가서 거짓말 한 일이 탄로가 나서 보통 일반적인 경우와는 정반대로 나수 얻어터지고 공수부대원 지원 자격은 박탈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시력이 아니라 학력을 속여 말했던 것이 들켰기 때문입니다. 판개 장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단기 하사관 차출을 또 노렸으나 그 동안에 신체검사가 끝나고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는 날짜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판개 장정도 보름가량의 장정 대기소 생활을 아쉽게 마치고 나와 이별의 악수를 굳게 한 후에 한날 동시에 논산 훈련소에 나란히 들어갔으나 그 뒤로는 이때껏 서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판개 장정을 장정 대기소 쓰레기 사역장에서 쓰레기를 모으면서 처음 만났을 때 먼 하늘을 쳐다보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맴거리고 있습니다. 1. “아 씨발, 친구들은 다마장에서 담배 묵으면서 히끼로 빨고 있을 텐디 나는 씨발 쓰레기장에서 좃뱅이 치고 있단 말이여.” 그리고 판개 장정이 나에게 몇 가지 가르쳐준 것 중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2. “일이란 말이여 첫 판에 조져야한다 이거지. 한 판에 못 끝내는 놈은 두 판 세 판에도 못 끝내는 법잉께.” 3. “글고 짜장면은 당구장에서 다마 치믄서 묵는 것이 질 맛있드랑께” 1.번은 잘 모르겠지만 2.번과 3.번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번과 3.번을 조금 세련된 제도권 용어로 바꾸면 이렇게 표현에 변화가 옵니다. 2. 쇠도 달궜을 때 쳐라. 3. 금강산 구경은 먹으면서 하면 더 좋더라.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한 세상을 시간이 흐르고, 문장이 흐르고, 별빛이 흐르고, 생각이 흘러갑니다. 아스라한 제3한강교 밑을. 이상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앵커맨 밸라거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