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행위자가 만든 ‘한글학회 노래’와 ‘외솔찬가’, 이제 바꾸자.
두 해 전 창립 100주년을 맞았던 한글 학회는 새해 들어 그간 추진해 온 ‘한글학회 100년사’를 간행했다.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고, 작업에 참여해 애쓴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단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한글학회 노래'가 실려 있다. 평소 듣거나 불러 본 기억이 없는 노래이다 보니, 한번 들어 봤으면 싶었는데, 이 날도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가시밭 조약돌길 비바람 오랜 세월, 겨레의 말과 글을 기워온 한글학회.”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민족시인이며 학회의 재단 이사를 역임한 이은상이 노래말을 지었고, 곡은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노래말로 우리 모두 익히 아는 ‘어머니 마음’을 비롯해 ‘섬집 아기’, ‘진짜 사나이(군가)’ 등 수많은 인기곡을 만든 이흥렬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곡자한테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음악가 이흥렬(일본식 이름 直木興烈, 1909년~1980년)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서양음악을 접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가 결성되었을 때 음악보국주간 음악대연주회에 참가하여 군국가요를 반주했고, 1944년에는 대화악단의 지휘자를 맡았으며 1945년 경성후생악단에서도 활동했다. 해방 뒤엔 1957년 한국작곡가협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을 맡았고, 1963년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도 재직했다. 대표작으로 ‘어머니의 마음’, ‘섬집 아기’, 군가인 ‘진짜 사나이’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다수 만들었고 담백한 가곡을 많이 작곡하여 ‘한국의 슈베르트’라고도 불리나, 친일 전력을 비롯한 친체제적 성향 때문에 행적에 대한 논란도 그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 세울 계획이었던 '섬집 아기 노래비'가 여론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이흥렬은 음악인들 가운데서도 현제명과 홍난파와 함께 이처럼 친일 행적이 아주 뚜렷하다. 그래서 2009년 11월에 간행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행적이 수록돼 있다.
나는 한글 학회 100년사 출판기념식 날 이 노래가 불리지 않은 걸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왜냐 하면 우리 한글 학회는 이런 사람이 만든 노래를 더는 학회 노래로 삼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다같이 한글 학회는 과연 어떤 단체인지 생각해 보자. 우선 학회는 우리 얼과 말, 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학술·운동 단체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나라말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계셨던 조선어학회의 맥을 이어온 단체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립기념관에는 조선어학회를 애국 단체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독립운동이라 하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한글 학회 두 번째 이사장을 지내신 허 웅 선생님께선 돌아가시기 석 달 전인 2003년 10월 9일 한글회관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마지막 강연(26분)을 하셨는데, 그때 말씀의 요지가 "한글세대의 친일잔재 청산 운동"이었다. 나는 그 말씀이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 학회 첫 번째 이사장을 지내셨던 외솔 최현배 선생님을 기리는 ‘외솔찬가’ 역시 불행히도 사정은 똑같다. “인생의 한평생을 의로 살기 어려왜라.”로 시작하는 외솔찬가는 시인 모기윤이 작사를 했고, 곡은 ‘산유화’, ‘동심초’ 같은 유명 가곡을 작곡한 김성태가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곡자 또한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다.
음악가 김성태(일본식 이름 金城聖泰 / 1910년~ )는 경성부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경신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때까지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며, 연희전문에서 만난 현제명의 영향으로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고등음악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음악가였다. 귀국한 뒤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을 시작으로 고려교향악단 지휘자를 지내며 홍난파, 현제명 등과 더불어 한국의 서양음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현제명이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을 설립했을 때 함께 참여하여 후에 서울대학교 음대학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어용 음악인 단체 조선음악협회에 참여했고, 김생려 등이 조직하여 '국민음악'을 보급한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도 활동했다. 만주국에서 국책 악단으로 조직된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사랑과 원수’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해방 뒤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1971)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1973)를 지냈고, 예음문화재단 회장(1984), 대한민국예술원 원장(1993)을 지냈다. 문화훈장 모란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서훈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5·16민족상도 수상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행위자로 수록됐고, 한 해 전인 2008년엔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외솔찬가는 한글 학회 노래와 달리 외솔회가 주최하는 주요 행사장에서 매번 불리운다. 성악을 전공하는 젊은이가 앞장서 부르면 참석한 회원들이 따라 부른다. 나는 외솔 생전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외솔이 알았더라면 선생께선 결코 이 노래를 받지 않으셨으리라 믿는다. 왜냐 하면 외솔 역시 한말글을 통한 독립운동가셨고, 그런 선생의 업적을 기려 지난 정부는 선생님께 독립장(1962년)을 드렸고, 현 정부 또한 올해 10월의 독립운동 인물로 선생을 선정해 달력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 높혀 제안한다. 한글학회 노래와 외솔의 노래를 다시 만들자고! 한글학회 100년사가 간행된 뜻 깊은 올해 그리고 외솔 서거 40주년이 되는 올해, 국치 100년이 되는 이 2010년에, 작곡자가 친일파가 아닌 요새 사람이 새로 만든 두 노래를 나는 듣고 싶고 부르고 싶다.
첫댓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