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독의 War History
곧 누군가가 가마니 위에 누워있던 박소위를 보고 한마디 했다.
"사단장 동무시오!"
가마니 위에 누워있던 박소위는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하지 못했다.
"사단장이 국군 포로들을 감금한 긴급 구호소에 들어 오다니!"
북 사단장은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이었다. 군인이 아니라 집안 삼촌같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사단장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박소위에게 말을 걸었다.
휴전 회담장에 나오는 북의 장군들. 남일, 김상조, 장평산등이다.
"군관 동무, 고생이 많소, 나이가 몇이요?"
적이지만 박소위는 그의 따뜻한 말이 긴장한 가슴에 전기처럼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열일곱 입니다."
"고향은?"
"충남 조치원입니다."
"학교는 나왔나?"
"충남 대전 고등학교 나왔읍니다."
"대전고라.. 좋은 학교 나왔구먼,"
그는 관심을 가진 듯 누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서 질문을 이어갔다.
"군관 동무, 그런데 국방군에는 열일곱 군관도 있소?"
박소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
6월 25일 아침, 육참총장 채병덕 장군의 잘못된 판단만 아니었으면 박소위는 지금은 안전한 후방에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었다.
소위로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해방 군관으로 북한군에 편입되고도 탈출하다가 다시 붙잡힌 조창호 소위는 긴 세월 옥고와 강제 노동을 하다가 1994년 탈출하였다. 북에서 얻은 지병으로 2006년 사망하였다.
"무자비 하구먼! 어린 소년에게 군관 계급장을 달아주고 전장으로 내몰았으니 말야!" 북 사단장은 혀끝을 차며 탄식을 했다.
박소위는 그 말에 대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생입니다. 우리나라 첫 4년제 정규 생도로 금년 6월 1일 입교했습니다. 사실은 4년 후에 소위 계급장을 달아야 되는데 25일 포천 전선에 투입이 되어 이렇게 급작스럽게 임관하고 소대장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북 사단장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4년제 육군 사관학교라.. 그랬다면 후방으로 철수해서 계속 교육을 받고 있어야지!"
박소위는 동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적 사단장에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궁지에 몰렸는데 후방에서 공부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원해서 단기 교육을 받고 소위가 되었습니다."
박소위의 결연한 대답에 북 사단장은 감탄한 듯 무릎을 탁치며 맞다는 표시의 미소를 지었다.
"동무, 안됐구먼! 이제 박소위도 해방 군관이 되었으니 인민군에 현지 임관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도록 하게."
박소위는 그가 말하는 것에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북 사단장의 말은 남조선 군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인민군에 군관으로 입대해서 남한 국군을 향해서 총구를 돌리라는 말이었다. 박소위에게는 말도 되지 않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침묵을 지켰다.
북 사단장은 박소위의 완강한 의지를 확인한듯했다. 그는 군의관에게 말했다.
"치료를 잘해 빨리 낫게 하시오!"
사단장은 일어서면서 박소위의 상처를 일일이 살핀 다음에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게! 박 소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만도 고마워해야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군."
그는 인자하게 말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뒤에다 대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박경석 장군은 그의 저서 '육사 생도 2기생'에서 북 사단장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는 정도의 간단한 기술을 하고 글을 맺었다.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 장병
그러나 박경석 장군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 첫 만남 뒤에 사단장과 얽힌 일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북 사단장은 박소위를 구금하지 않고 사단 사령부 내에 마음대로 돌아 다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불러서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며 북한군의 편입을 권유했었다는 것이다.
박소위는 대화를 할수록 북 사단장이 상당히 높은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부하들에게도 당시 국군 사단장처럼 권위적으로 군림하지 않고 친동생 대하듯 자상하게 대했었다. 포로들을 철창 안에 몰아넣고 학대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한 때 북에서 추진되어 오던 식량 공급이 끊긴 일이 있었다. 덕분에 포로들은 물론 북한군도 모두 이틀간이나 굶은 일이 있었다. 박소위가 보니 북 사단장도 같이 굶고 있었다. 다 굶어도 사단장쯤은 식사를 해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북 사단장은 식량이 도착해서 전 부대원에게 식량이 다 급식될 때까지 엄격하게 자기 통제를 하며 같이 굶었다.
달포나 그렇게 지난 어느 날 그간 자주 박소위의 불러 식사를 하며 인민군 편입을 권유하던 사단장은 의외의 말을 했다.
"집에 가고 싶으면 할 수 없네. 그냥 떠나게나!"
이때는 1951년 2월로서 북 사단장의 사단이 북으로 복귀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박소위는 믿기 힘든 이 명령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그는 정 많았던 북 사단장에게 마음 속으로 우러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북 사단 사령부를 떠났다.
그러나 북 사단장의 온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단장 부관이 따라 나오며 등짐을 질 수 있는 쌀 자루를 주었다. 국군 전선에 도착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데 굶지말라는 북 사단장의 배려였다.
초급 장교 시절 박경석 장군
박소위는 남으로 걸어오다가 동기생인 박준승 소위를 만나 남으로 걸었다. 도중에 북한군 내무서원을 만나 감금되었으나 이번에는
진짜로 탈출했다.
계속 남행하던 중 뜻 밖에도 미군 사병을 만났다. 미 해병대인 그는 낙오되어 지리가 서툰 산간 지역에서 헤매고 있었다. 박소위는 그를 합류시켜 계속 남행하다가 바로 박소위를 석방한 북한군 사단을 토벌하기 위해 북상하던 미 해병대와 조우했다. 미 해병대는 박소위를 잠시 포로 수용소에 감금했다가 국군에 인계하였다.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해서 화천까지 북진한 미 해병대.
국군에 돌아온 박소위는 그때 일본군의 영향으로 포로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군 행정에 불이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북한군 사단장의 배려로 풀려났다고 하면 김창룡의 CIC에 붙들려가서 가혹한 취조를 당하고 군을 떠나거나 최악의 경우 군 형무소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박소위는 북한군 사단장의 이야기는 숨기고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얼버무렸다. 탈출 도중 내무서 감금을 뚫고 탈출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무렵의 상황으로서 박경석 소위의 판단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박경석 장군은 원대에 복귀한 뒤에도 계속 전장을 달리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공을 쌓아갔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날 때 동기생중에서 제일 많은 무공 훈장을 받은 중대장급의 베테란 간부가 되어 있었다.
이런 무훈과 무공 훈장은 12년 뒤인 1965년 맹호 사단을 파월하면서 박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최고의 군 인재를 모아 최강의 사단을 만들 때 그가 재구 대대 대대장으로 선발되게 하는 밑천이 되었다. 파월된 재구 대대는 세계가 보도하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
1965년 파월된 재구 대대-대단한 전과를 거둔 대대였다.
박경석 장군은 이렇게 회고 했었다. 군생활의 초기 아직 십대였던 그의 주변에 인생의 스승이며 군 지휘관의 지표로 삼을만한 상관들이 거의 없었다. 부하들의 복지에 신경 쓰거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군 지휘관을 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권위적이어서 사병들을 경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부패했거나 또는 여자 문제가 난잡한 지휘관들이 많았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으로 한국군의 장교가 된 사람들이 이런 일본군의 하층 저질 문화를 도입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젊었던 박장군은 일선에서 부하들을 어떻게 통솔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큰 고비마다 밖에는 노출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만 감춰 두었던 북 사단장의 인간미있는 통솔을 떠올리며 귀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적군의 장교에게 까지 감동을 준 북한군 사단장은 누구일까?
그의 소개를 다음 편에서 해보겠다.
[출처]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2-|작성자 동고동락
국방부 블로그에 달린 독자 댓글
은빛 자작나무
국방부 공식 입장은 아니라면서...
굳이 국방부 공식 블로그에 이런 글을 왜 올렸어요?
국방부 공식 블로그에!!!
굳이 대한민국의 군인들의 위상을 깎고,
북한군을 칭송하는 이런 글을
굳이 국방부 공식 블로그에 왜 싣어야 하나요?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선전포고도 없이, 남한으로 침략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전쟁주범입니다.
북한인민군의 인격이 어떻든 저떻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대전고 나와 육사2기 들어가신 박장군님이 17세에 소위달고 전쟁에 나갈 일이 없었쟎아요???
저는 아들 둘이 지금 모두 군복무 중입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많은 부모들은 아들을 둘, 셋 모두 나라에 충성하라고 군에 보냅니다.
국방부 공식 블로그에서 다시는 이런식으로 교묘하게 북한을 높이고 대한민국을 깎아내리는 글을 읽고 싶지도 않고, 이런 글이 여기에 실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자분은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2018.9.4. 10:10
첫댓글 댓글을 단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의 지적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와 울프독의 더 깊은 의도를 헤아려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6.25 당시 우리 국군의 고급 지휘관 들 특히 일본군 출신 고급장교의 행태를 이글에서 밝히면 아마 세상이 뒤집힐 정도로 경악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은유로 숨기고 북한군 사단장의 대비되는 리더십을 밝히므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걱한 것이다.
나는 당사자로써 울프독의 깊은 혜안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한 예- 일본군 출신 어느 사단장. 지금도 추앙을 받으며 살고 있다.
매주 다른 젊은 여자와 함께 잔다. 물론 부하가 죽어가는 전투중.
사단 헌병참모는 '채홍사'가 되어 매주 새 젊은 여자 구하러 일과의 대부분을 보낸다.
젊은 장교의 눈에 비쳐진 그 현상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팩트는 중요하다.
사악한 사실을 숨기면 숨실수록 악은 더욱 확산된다.
사실을 밝혀 교훈으로 삼을 때, 발전은 눈부시다.
우리는 6.25전쟁 당시의 무섭고 사악한 팩트가 비밀의 베일이 너무 깊숙히 감춰져 있다.
백선엽 장군이 만든 '가짜 호국 영웅 심일 소령' 사건도 바로 울프독에 의해 세상에 퍼졌다.
백선엽 장군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만든 6.25당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평전'(김행복 집필) 의 진실도 곧 밝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