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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4월 7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제6장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bhāvanā)
1.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八正道)다
2.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다
3. 위빠사나 수행의 세 가지 방법
1) 좌선
(1) 좌선을 할 때의 자세
(2) 좌선을 시작할 때의 순서
(3) 좌선을 계속하면서 알아차림
(4) 좌선을 끝낼 때의 알아차림
2) 경행
(1) 일정한 장소에서 경행하는 방법
(2) 생활 속에서 경행하는 방법
3) 일상의 알아차림
(1) 아침에 잠자리에서 알아차리기
(2) 저녁에 잠자리에서 알아차리기
(3)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리기
1.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八正道)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일생을 사는 동안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이 있고 많은 즐거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이며 두려움입니다. 그나마도 인간이 사는 세상은 천상의 시간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인간세상의 1년이 천상의 1시간 30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이 때로는 길게 느껴지는 것은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현자들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구도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발견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직 최고의 바라밀 공덕을 쌓은 사람만이 이 길을 찾아내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바로 이 길이 죽음이 없는 길입니다. 죽음이 없는 길이란 바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시대에는 고따마 붓다가 위빠사나 수행으로 이 길을 찾았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입니다.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고따마 싯달타는 몸과 마음을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진 해탈에 이르러 붓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자신이 간 이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자신과 똑같은 깨달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이 수행은 특정한 종교인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붓다께서 우리들의 괴로움을 직접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나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도 인간이 가진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한 가르침을 펴서 이 방법으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도와는 다른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표는 오직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괴로움을 겪는 것과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괴로움이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이 되어 객관화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생각으로 알아서는 같은 괴로움을 되풀이해서 겪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났을 때만이 완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완전하게 알 때만이 괴로움을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머리에 붙은 불과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머리는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한 온갖 생각으로 항상 불이 붙어 있습니다. 가슴은 이런 생각들로 인해 입은 무수한 상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이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번뇌의 불을 끄고 번뇌의 화살을 뽑으려면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번뇌를 없애려고 하다 잘못하면 더욱 거센 불길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선입관도 없이 대상을 그냥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만약 나타난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매달려서 열중하면 일시적으로 번뇌를 억누르는 효과만 있습니다. 이것이 집중에 의한 고요함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은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수행 방법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타난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에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인간에게 나타난 모든 번뇌는 바로 이 지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행의 적절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고따마 싯달타가 6년 동안 극단적인 고행을 한 뒤에 얻은 결과는 죽음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죽음을 숙고한 결과 모든 것이 자신이 일으킨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인 연기법입니다. 열두 가지 연기의 요소는 모두 몸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고따마 싯달타는 감각적 욕망과 극단적 고행이 아닌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이 중도(中道)가 팔정도(八正道)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 요소는 괴로움이 지속되고 있는 세간에서 괴로움이 소멸하는 출세간을 향해서 가는 법입니다. 팔정도를 계정혜(戒定慧)라고 하는데 계율과 집중과 지혜가 포함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팔정도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도의 항목[道支]은 다섯 가지로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이와 같은 위빠사나 다섯 가지 도의 항목은 계정혜 중에서 계(戒)를 제외한 혜(慧)와 정(定)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다섯 가지 도의 항목 중에는 정념이라는 바른 알아차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계율에 속하는 정어, 정업, 정명이 자연스럽게 팔정도 안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정념으로 인해 계가 포함되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 합니다.
정념(正念)은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바르게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선한 마음으로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정념은 계율을 지키는 직접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계율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정념은 신, 수, 심, 법, 사념처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확립하도록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위빠사나 수행 다섯 가지 도지에 정념으로 인해 계의 항목인 정어, 정업, 정명이 포함되어 자연스럽게 팔정도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정념은 바른 알아차림으로 계(戒)를 대표하기도 하고 또 정념이 위빠사나 수행의 사념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정념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을 하나로 줄이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정도, 중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 알아차림이라는 요소들이 필요한데 이것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동의어입니다.
팔정도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의 정(正)이 빨리어로 삼마(sammā)인데 바르다, 철저하다,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정(正, sammā)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이 양극단의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의 기능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양극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로서 바르지 못한 것을 기억하지 않고 바른 것을 기억하여 항상 깨어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팔정도의 혜(慧) 중에서 정견과 정사유는 위빠사나 수행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입니다. 사마타 수행이 고요함에 머무는 선정수행이라면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에 정견과 정사유는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덕목입니다. 정견은 알아차림이 있는 바른 견해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연기의 지혜와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입니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바로 팔정도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정사유는 항상 깨어서 바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는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에 속합니다.
팔정도의 계(戒) 중에서 정어, 정업, 정명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계율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처음부터 수행자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하도록 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없이 보게 되므로 이것 자체가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처음부터 계율을 지키는 딱딱한 행위를 하지 않게 하여 수행을 부드럽게 접근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 이룰 수 있는 청정한 절제입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어, 정업, 정명은 위빠사나 수행의 계율에 속합니다.
팔정도의 정(定) 중에서 정정진, 정념, 정정은 그것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의 요소입니다. 정정진은 위빠사나 수행의 바른 노력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바른 노력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노력이 아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매우 중요한 노력입니다. 그리고 정념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인 신, 수, 신, 법을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정념이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법을 알아차리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리고 정정은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을 뜻합니다. 반드시 찰나집중을 통해서만이 지혜를 얻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계정혜가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뜻합니다. 그래서 정정진, 정념, 정정은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출세간의 깨달음을 얻는 팔정도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고따마 싯달타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른 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팔정도며 이것이 중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고 거기서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가 날 때만이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이 열반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일생 동안 설법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이토록 분명하고 엄숙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수행은 어느 특정한 종교인의 수행이 아니고 괴로움을 겪는 모든 사람들의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특정한 종교인에게만 허용된다면 이는 진리가 아니며 결코 바른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우리를 짓누르는 가장 심각한 일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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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선생님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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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