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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흐르듯이 잔잔한 삶들이 있는가 하면 파란만장한 삶 또한 있는 것이 세상살이다. 그것이 불자(佛子)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이 지어낸 업의 얼굴이며. 기독자(基督者)의 시각으로는 하느님이 준비한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공기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우면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삶은 먹먹하도록 거룩한 신비일 뿐이다.
김경일 신부를 뚜렷이 기억나게 하는 일이 있다. 2006년 빛고을 광주 어느 식당에서 펼쳐진 장면이다. 일고여덟 명의 사람이 식당에 앉자마자 김 신부는 사람들 앞에 수저를 놓기 시작했다. 흔히 릴리전 룩(religion look)이라 불리는 로만칼라를 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직자임을 아는 누군가 ‘황송해서’ 무어라 말을 하니, 김 신부 입에서 나온 말은 “제가 서비스업 종사자입니다.”였다. 대한성공회 소속 사제로서 당시 김제 나눔의 집 원장이었던 김 신부는 그렇게 자기 삶을 펼쳐 나갔다.
좌충우돌 인생, 우상파괴 성직자
스스로 쓴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쇠뜨기, 2019)의 프로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김경일. 1954년 부산 출생. 중앙대 법대. 신문학과 대학원. 성공회 신학원 졸업 후 10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광주에서 13년간 사목하고 2019년 10월 은퇴했다. 생명평화결사에서 펼치는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짧고 간결한 프로필이었지만 한 풀만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파란만장, 우여곡절 플러스 서스펜스까지 펼쳐진 인생을 만난다. 천주교인으로 불리었다가 성공회 사제가 된 것만 해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성공회 사제가 되기까지도 신학교 졸업 후 서품이 10년간 보류 혹은 거부된 끝에 사제서품을 받았으니 대단한 인생이다. 김 신부의 프로필에 담긴 삶은 스타카토 악센트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생태운동가이자 <야생초편지> 저자인 황대권 선생은 위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돈이 만능인 시대에 올곧은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김경일 신부는 기독교계의 ‘이단아’이다. 그가 가진 신앙관이나 성서의 지식이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가난과 복음의 삶을 살았던 예수의 길을 외면하는 기성교단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이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게 낯설다는 것은 은연 중 우리 모두가 기득권의 일탈을 묵인 또는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성공회에서 벌어진 신부님의 좌충우돌 체험담은 사실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상파괴 작업이고 참 종교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이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로 사경을 헤매다 이듬해 9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이 김 신부의 중앙대 직계선배다. 80년 민주화의 봄 시절 총학생회에 나타난 ‘중앙대 법대의 전설’ 백남기 선배는 긴급조치 복학생이었다. 치열했던 삶을 뒤로하고 농촌으로 돌아가 밭을 일구며 민중과 한 몸으로 사는 백남기 선배에게 김 신부는 “저는 비록 교회에 몸담고 살고 있지만 형님의 여전히 타협 없는 꼿꼿한 모습과 치열한 삶에 비하면 그저 진구렁에 뒹구는 건달에 불과하네요. 죄송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라고 고백했다.(<한겨레> 2015.11.15. 참조)
생명평화결사
김경일 신부는 “2016년 3월 28일 해군참모총장에게서 전자우편으로 법원을 통해 우리 교회로 소장이 날아왔다. 많은 평화운동가들과 시민운동단체들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생명평화결사’의 임원을 맡고 있던 나와 내가 속한 단체에 대해서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970년대 하반기에 해병대 졸병으로 제대한 나에게 해군참모총장이 소송의 원고로서 법적으로 말을 걸어온 셈이다. 생명평화조직이 ‘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선동하고 방조한 혐의로 피고가 되었다.”라고 위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했다.
김 신부가 말하는 ‘생명평화결사’는 2001년 2월 16일 좌우익희생자와 뭇 생명 해원상생을 위한 범종교계 기도가 첫 마중물이 되었다. 생명평화와 민족화해의 마음을 담아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며 100일 기도로 시작된 생명평화의 논의는 2003년 11월 15일 10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생명평화결사로 창립되었다.
이후 김 신부가 문화위원장을 맡은 생명평화결사는 종교와 이념을 떠나 생명평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서약운동을 위한 생명평화탁발순례와 학습의 장을 실시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실제로 생명평화탁발순례는 2004년 3월 지리산 노고단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 서울 보신각까지 5년간 3만리를 걸으며 7만5,000명의 연대체가 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순례의 등불은 촛불이 되어 번졌다.
김 신부가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을 하던 시절인 2011년 제주를 출발해 휴전선 DMZ까지 한반도 100일 순례 계획을 잡았지만 제주 순례 도중 강정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생명평화 100일 제주순례’로 급거 변경했다. 2007년 이후 정부는 제주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을 일방적으로 진행하였다. 강정마을 주민 사이의 분열조장으로 엉망이 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중재역할을 위하여 상당기간 강정에 상주했다. 그 결과로 2016년 해군참모총장이 보낸 손해배상청구을 받았다.
이런 외부에서 가해진 부당한 주문 혹은 해코지에 대하여 김 신부는 오히려 “내 몸 어딘가에서 활화산의 용암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른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는 타고난 싸움꾼이고 반골로서 영락없는 베드로의 모습이지만, 김 신부는 돌아온 탕자에 가까운 어거스틴(천주교의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의 세례명 또한 그냥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사진출처=한겨레
교회 밖에서 스승을 만나다
김 신부는 신학생 시절에 교회갱신운동을 하다 교회에서 쫓겨났다. 5년간 사회 여기저기 떠돌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회로 복귀했다. 교회 밖에서 지낸 5년은 김 신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세월이었다. 마치 예수의 광야나 석가의 보리수처럼 그에게 주어진 황금시기였다. 그 시절에 교회 밖에서 민중들을 만났고, 태백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과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 형처럼 돌봐주는 이현주 목사님처럼 묵직하고 향기 넘치는 스승들을 만났다.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현재의 김 신부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1985년 신혼여행으로 찾아간 원주의 장일순 선생은 김 신부에게 “아래로 기어라. 민중들을 끌어안고 함께 뒹굴며 살아라. 성직자의 생활은 중 이하라야 한다. 중 이상이면 가난한 이에게 갈 때 부끄러워진다.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함께 나누라는 뜻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깨어진 사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기를 쓰고 자기가 정한 원칙을 일생동안 끝까지 밀고 가라. 10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책 만 권만 읽어라. 세상 이치가 한 눈에 들어올 거다.”라는 말씀과 함께 정암(靜菴)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마음을 고요히 하라’는 뜻이다. 이처럼 김 신부는 스승을 만나도 제대로 만났다. 김 신부는 은퇴한 뒤에도 스스로 다잡듯이 이렇게 말한다.
“신학원에서는 제대로 가르쳐주었고, 교회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들도 시퍼렇게 날이 서서 모본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왜 이런 사회 통념에 반하는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사제들이 겉으로는 멀리 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돈과 권력, 명예를 집요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부패구조의 정착이 가장 두렵다. 노골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문제지만 범죄를 용인하는 조직 분위기가 되어서는 더 문제다.”
일선 사목현장에서 은퇴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내지르는 말이 아니다. 김 신부의 큰 아들인 김윤경 힐렐 역시 2018년 성공회에서 서품을 받은 사제로 직분을 수행하고 있기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김 신부는 성직자로, 신앙인으로 활동할 것이며, 치열한 삶에 담긴 은총 안에서 주어진 약속과 사명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김 신부는 2019년 9월 은퇴하면서 “오늘 미사는 은퇴식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나서는 창업식”이라 했다. 창업을 한다고 했으니 속된 표현으로 ‘대박나라’고 맞장구 칠 수는 없고, 시인은 그저 한 말씀을 전하고 싶다. “신부님이 평생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예수처럼 멋지게 망하시라. 부활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첫댓글 천윤경
10월 31일 오후 2:16 ·
< 이런 사제, 이런 사람 !>
어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위에 계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비천한 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수를 닮아가는 사제를 만났다.
함께 한 몇 시간 동안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과
사제로서의 삶을 들을 수 있었고,
성직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가 사석에서 후배사제에게
"사제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 민중을 받아들여야 하며
모욕을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자" 라고
이야기 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안간힘을 쓰고 살아 온 내 가슴을 치고
깨달음을 주었던 이 시가
신부님을 보며 불현듯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