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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바울의 1차 교회개척: 갈라디아(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 전도,
파송 교회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옴
(찬송 446장)
2023-1-17, 화
맥락과 의미
14장에서도 13장에 이어서 바울의 1차 교회개척 활동(주후 46-48년)이 계속됩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13장에서 비시디아 지역의 안디옥(바울을 파송한 교회가 있는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과 다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14장에서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 후 파송 교회인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역(1-12장)이 바울을 통해서 이방 지역에서도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2장에서 오순절 설교를 합니다. 3장에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베드로가 고쳤고, 그로 인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3,4장). 놀라면서 호의를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핍박했습니다.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복음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계속 성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5장).
성령님은 바울을 통해서도 비슷하게 일하십니다. 바울은 13장에서 회당에서 긴 설교를 합니다. 14장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쳤습니다. 바울의 사역에 놀라면서 제사 지내려는 이방인들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결국은 돌로 쳐서 거의 죽였습니다. 이런 핍박을 이기면서 바울은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형식은 다르지만 계속 일하십니다. 복음 전파자와 성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십니다.
1. 이고니온에서 말씀을 전파, 표적과 기사로 증거함, 핍박당함(1-5절)
2.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복음 전파(8-18절)
3. 교회를 견고하게 하면서 안디옥으로 돌아옴(19-28절)
1. 이고니온에서 말씀을 전파, 표적과 기사로 증거함, 핍박당함(1-5절)
1절,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유대인의 핍박을 받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2절,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유대인 교회, 믿는 사람)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유대인 중에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오히려 많은 이방인이 믿었습니다.
3절, “두 사도”는 바나바와 사울을 말합니다. 12 사도와 바울 사도 외에도 초대교회 복음을 감당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빌 2:25).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습니다. 충분히 있었습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담대히 전했습니다. 말해야 할 복음을 전부 다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해야 할 모든 말을 다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핍박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이래야 합니다.
두 사도는 “주를 힘입어”(3절) 말했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3절). 하늘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를 통해 그분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들은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의 손으로 기적을 행하셔서 사도의 말이 ‘진짜’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초대교회가 전도할 때마다, 모일 때마다 주님이 표적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 필요할 때 기적을 주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그때와 같은 기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에 일어난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증거가 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필요할 때는 오늘 날에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특별한 기적만 구하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잘한 일에 대해 칭찬받고 사탕만을 받기 요구하는 유치한 것입니다. 성숙한 교회는 말씀을 구하고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서 과거와는 다른 기적을 지금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는 강한 확신, 사랑, 나눔 등이 우리 시대의 교회가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기쁨으로 참고 나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경제적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도 해결해 주시는 기적이 생활 가운데 계속 일어납니다.
4절, 이고니온 주민은 유대인과 사도를 따르는 두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말씀이 일으키는 좋은 분열입니다. 지금도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는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좋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향해 더 변화되어 갈수록 보통 사람과 달라집니다. 이 다름 가운데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갑시다. 변화된 삶 때문에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세상과 믿지 않는 사람을 변화시킵시다. 그러나 항상 겸손합시다. 성령님은 말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달려들다’는 전에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했을 때 돼지들이 호수로 “내리 달아”(막 5:13) 했는데 그때 쓰인 말입니다. 행 7:57 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19:29, 에베소의 우상숭배자들이 몇 시간 열광하면서 바울과 실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군중은 귀신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고 악한 일을 합니다. 사단과 귀신에 떠밀려 달려듭니다. 분노 속에 일어나는 집단 행동 가운데 귀신이 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강하게 압박할 때 기억합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마귀)을 상대함이라”(엡 6:12). 성령님의 “전신 갑주”(엡 6:13)를 입읍시다. 말씀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서 자신을 무장합시다(엡6:13-18). 그래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우리가 세상의 흐름에 끌려 다니지 맙시다. 정치적 활동, 기업 활동, 소비 생활(옷, 가전제품)등에서 유행을 그냥 따라가지 맙시다. 세상의 강한 흐름 가운데 사단의 강한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무장합시다. 기도 가운데 “깨어”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눅 21:36).
6절, 두 사람은 핍박할 때 “알고 도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예수님이 12 사도를 임명한 후에 주신 사역 지침대로 행동했습니다. “이 동네(폴리스, 도시, 성)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다른 곳으로) 피하라”(마 10:23). 바울은 12 사도와 같은 사도로서 행하고 있습니다.
전에 베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풀려났습니다. 그 기적을 “깨닫고” (행12:12) “떠나 다른 곳으로 가”(12:17) 피했습니다. 바울은 박해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14:6) 도망합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납니다.
2.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복음 전파(8-18절)
바울은 이고니온보다 남동쪽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도망가서, 다시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8절, 루스드라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바울의 복음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병이 낫는 것)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9절). 그리고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10절). 성령님은 바울에게 그를 고치라는 내적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적 치유를 일으키셨습니다. 사도들도 아무 때나 자기들 마음대로 병을 고치지는 않았습니다.
10절, 구원받은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사야 35:6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자가 사슴 같이 뛸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이 온 것에 대한 증거로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있습니다. 전에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주목하여”(3:4) 보고 그를 고쳤습니다. 그는 뛰면서 찬양하며(3:8)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동일한 교회로서 바울을 통해 이방 교회로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11절, “무리가”(이방 제사장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를 “제우스”, 바울을 “헤르메스”(제우스의 말을 전하는 신)로 생각했습니다(12절). 13절, 우상의 제사장이 제물로 바칠 “소와 화환(꽃다발)들을 가지고” 두 사람이 있는 집의 문 앞으로 왔습니다. 두 사도는 “옷을 찢고”(14절) 말렸습니다. 크게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신들이 아닙니다. 당신들과 “성정”(본성)이 같은 사람입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상숭배를 그만 두라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14-18절). 겨우 피했습니다.
전에 베드로도 기적을 행한 다음에 자신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를 고친 다음 항변했습니다.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기겁하며 거절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과 기적을 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과 복음을 밝히 드러내는 이 목적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의 신적인 능력의 도구가 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무지한 대중이 그를 신격화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헤롯 왕이 자신을 신으로 떠받든 사람들의 칭찬을 즐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몸에 벌레를 보내 그를 죽였습니다(12:23).
헤롯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 교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비참한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참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바깥에서, 사람에게 지나치게 존경받는 일을 경계합시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사도 바울 자신을 향한 이방인들의 신기한 감정을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방 사회에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방임하셨”(16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선한 일”도 하셨습니다(17절, 방임과 같은 말). 모든 불신자가 복음을 듣기 전에도 땅의 수확을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선한 것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왔습니다. 순종하고 나와야 합니다.
19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죽이려 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왔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을 “충동”했습니다.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둘러섰”습니다(20절). 실제로 숨을 쉬지 못하는 죽음의 상태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스데반의 순교 때처럼 장례를 준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때 놀랍게도 바울이 일어났습니다(20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바울에게 반복됩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무리는 사단에 사로잡혀서 공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를 사탄이 끌어갈 때에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원수의 눈 앞에서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십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유혹에 넘어가 편하게 사는 것보다 꿋꿋이 고난의 길을 갈 때, 주님은 계속 살려 주십니다. 계속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3. 교회를 견고하게 하면서 안디옥으로 돌아옴(19-28절)
21-28절, 회복된 바울은 더베로 도망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시 금방 개척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안디옥을 순회 방문했습니다. 교회를 권면하고 격려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했습니다 성도를 향한 격려는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삶 가운데 계속 붙들고 있도록 가르치는 지적인 일입니다. 의지적으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22절).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할” 때 주님이 힘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직분을 다하는 것을 기뻐합시다.
각 교회에서 장로를 택했습니다. 금식 기도하고 주님께 부탁하여 드렸습니다. 장로는 지금의 장로와 목사 둘 다를 말합니다. 목사와 집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은 배를 타고 파송 교회인 시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전도와 교회 설립의 열매에 대해 보고했습니다(바울의 파송 교회는 현재 시리아의 북쪽에 있습니다. 13장에서 전도한 안디옥은 터키 중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목사도 주님과 주님의 은혜에 넘겨진 사람입니다(“위탁” 부탁, 23,26절). 주님을 믿고 나아가 사역자로서 그들의 인생과 사역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직분자와 모든 성도는 교회의 직분자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맡깁시다. 기도로써 계속 맡겨 드립니다.
믿고 복종할 일
핍박 가운데서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은 능력을 발휘하도록 삼위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욕하고 생명을 위협하면서 우리를 핍박합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작은 어려움에 두려워 떨고 있지 맙시다. 박차고 일어나 사명을 감당합시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환난을 통하여’ 들어갑니다. 환난과 고통을 피하려 하면 천국을 향한 좁은 길에서 벗어나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또 사단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여 넘어뜨리려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게 합니다. 심지어 신격화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교만에서 벗어납시다. 겸손하게 주를 섬깁시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바라볼 때에만 교만에서 벗어납니다.
고통과 환란, 사단의 유혹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유쾌하게 고난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지 맙시다(벧전 4:12). 우리의 고난은 우리 또한 사도 시대 이후의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니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을 말합시다. 복음에 따라 꿋꿋이 살아가서 우리의 삶이 항상 복음 증거가 되게 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자기가 속한 곳에서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고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길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아니, 루터?’(‘안이루더’: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안이루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중 육지에서 전도한 곳의 순서를 이렇게 외우면 편합니다.
<참고> 3절, “담대히 말”함
“담대히”(‘파래시아죠마이’)는 ‘판’(전체)과 ‘레시아’(말함)을 합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해야 할 모든 말을 다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핍박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이래야 합니다.
<참고> 5절, “달려들”다(달려듬=‘호르메’)
‘달려들다’의 명사형 ‘달려듦’(‘호르메’)이 쓰였습니다. 신약에서 같은 단어가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했을 때입니다. 돼지들이 호수로 “내리 달아”(막 5:13). 호수에서 목 졸려 죽었습니다. 행 7:57 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19:29, 에베소의 시민들이 우상숭배를 통해 얻는 이익이 끊겼을 때, 몇 시간 열광하면서 바울과 실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군중은 귀신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고 악한 일을 합니다. 사단과 귀신에 떠밀려 달려듭니다.
<참고> 6절, “알고(‘순-호라오’) 도망”감
전에 베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유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천사를 통해 풀려났습니다. 그 기적을 “깨닫고”(‘순-호라오’, 12:12) “떠나 다른 곳으로 가”(12:17) 피했습니다. 이제 이방 지역에서 바울도 박해자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순-호라오’, 14:6) 도망합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납니다.
<참고> 9절, “주목하여 봄”(‘아테니조’), 뜀(‘알로마이’)
바울은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아테니조’, 9절). 그리고 고쳐주었습니다(10절). 구원받은 사람이 “일어나”(‘알로마이’) 걸었습니다. 이사야 35:6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번역은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함).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이 온 것에 대한 증거로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고(‘아테니조’, 행3:4) 그를 고쳤습니다. 그는 뛰면서(‘에크-알로마이’, ‘알로마이’, 3:8) 찬양하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동일한 교회로서 바울을 통해 이방 교회로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참고> 16, “방임”=17절, “하셨”음(허락ㅡ ‘아피에미’)
그리스도와 복음 전파가 오기 전의 이방 사회에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방임하셨”(16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선한 일”도 ‘허락’ 하였습니다(‘아피에미’, 17절).
<참고> 18절, “겨우”(‘몰리스’)
18절,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신으로 간주하여 제사 드리려는 지역민을 “겨우”(‘몰리스’) 말렸습니다. 나중에 27:7,8,11에 사도 바울이 배 여행 중에 죽을 뻔한 사건에 이 말이 쓰였습니다. 신격화되는 것은 죽음처럼 비참한 일입니다.
<참고> 19절, 핍박하는 자들이 바울을 “끌어 내쳤”습니다(‘쉬로’)= 행 8:3, 계시록 12:4
이 말은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행8:3에 사울이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 위해 “끌어”갔습니다. 전에 그리스도인을 끌어가며 핍박하던 바울이 이제는 거꾸로 그렇게 핍박 받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4에 사단이 “하늘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습니다. 사탄은 성도를 끌어내어 죽이려 합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무리는 사단에 사로잡혀서 공격합니다.
<참고> 23절, “위탁”=26절, “부탁”(‘파라-띠테미’)
이 말은 넘겨졌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목사도 주님과 주님의 은혜에 넘겨진 사람입니다(“위탁” 부탁, 23,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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