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103편 3-14절
설교제목 : 독수리처럼 새롭게
약지승강 유지승강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추워진 날씨 탓인가요!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듯 합니다. 정부와 화물연대 싸움이 해결의 국면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여전히 긴장의 상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강대강으로는 누구든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남성원리의 공격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태도로는 평화와 화해는 도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온 자들을 향하여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귀를 잘라버린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꽃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1-52)” 공격적인 비판적인 태도는 결국 모두를 망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과 세계에 필요한 것은 부드러운 여성적 원리입니다. 도덕경 78장에서 말합니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달리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모진 것을 이긴다는 이치를 천하에 모는 사람이 없건만, 이것을 능히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황병국 옮김, 《노자 도덕경》, 범우사, p137]
“약지승강弱之勝强 유지승강柔之勝剛”을 새김이 필요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물은 여성원리를 대변합니다. 여성원리는 소극적이고 유약하고, 단지 순응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약한 것에 처하고, 수용적으로 삶을 보듬어 안고, 주체적으로 유연하지만 굳세게 삶에 적응하는 것이 바로 여성원리가 가진 힘입니다. 이런 물과 같은 여성원리야말로 이기려 악착같이 싸우지 않으며 편가르기 하지 않고, 부드럽지만 모든 것을 보듬어 안아서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을 추동시켜 갑니다. 오늘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자신과 세상에 ‘약지승강 유지승강’이란 여성적 물의 원리가 일어나 평화가 강처럼 흘러가길 소망합니다.
독수리처럼 새롭게
시편 103편의 표제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로 시작하여 동일한 노래로 끝마무리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영혼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2)는 것입니다. 힘겨운 환경과 자신의 한계상황을 맞닥뜨리면 인간은 쉽게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실이 아닙니까! 저를 돌아보면 너무나 맞는 것 같습니다. 목회적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신학생이 스위스까지 가서 공부하여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자꾸 그 은혜를 망각하기 일쑤입니다. 불어닥치는 곤경으로 한숨짓고, 나의 작음으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때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그런데 103편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5)”
독수리를 새롭게 되는 재탄생과 부활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생리학사전으로 알려진 《생리학Physiolgus》에서 독수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독수리가 나이가 들면 시력이 흐려지고 날개가 무거워진다. 그때 독수리는 무엇을 할까? 우선 샘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는 태양의 대기 속을 날아 올라가서 자신의 날개를 태우고 눈의 침침함을 벗겨낸다. 그러고 나서 샘으로 날아 내려와 세 차례 목욕을 하면 독수리는 회복되고 다시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당신도, 당신이 낡은 옷을 입고 있고 마음의 눈이 흐려져 있다면 영적인 샘인 주님을 찾아라”
[tr. Curley. Michael J(1979) : Physiolgus, p.12, 에딘저 에드워드 F, 심상영옮김(2018) : 《융심리학과 시편》 p177-178 재인용]
독수리가 나이들면, 다시 젊어지는 회춘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시편주해에서 이와 유사하여 독수리의 재생을 묘사합니다.
“독수리는 나이가 들어 몸이 기능을 못하게 된 후에, 항상 늘어나고 있는 지나치게 길어진 부리로 먹이를 먹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리의 아래 부분 위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부리 윗부분이 나이들어 지나치게 길어진 뒤에 입을 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입을 벌리지 못하면 집계처럼 물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입 안에 있는 것을 절단할 수 없게 된다. 갈고리 모양의 부리 윗부분이 지나치게 늘어나고, 너무나 구부러져 있어서 입을 벌릴 수도 없고, 먹이를 먹을 수도 없다. ... 그러므로 약간 젊음을 회복하기 위한 생각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볼 때 한여름 냉수처럼 시원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그러진 길을 가게되면 근심하며 한숨 지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하나님을 경외하는(fear) 자라고 표현합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신약의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소유나 집착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아끼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분의 길을 좋아하고 그 길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십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양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 누군가 널 위하여 /
누군가 기도하네 /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된 그분의 자녀를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그분의 자녀를 돌보시고 인도하심을 마음의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나라의 통치
시인은 시의 결론으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이상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그의 보좌를 하늘에 든든히 세우시고, 그의 나라는 만유를 통치하신다(19)”
주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실현되기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임하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기도가 얼마나 개혁적인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자아의 왕국이 아닌 주님의 왕국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자기가 정신 가운데 활성화되어 지배해 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아의 패배와 죽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무겁고 힘겨운 주제입니다.
자아의 견고한 성을 세우기에 분주하며 몰두하는 세상입니다. 나를 지키는 안전한 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더 높고 넓고 더 강력한 요새를 만들려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하나님 행세를 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불안과 권태가 끊임없이 자아를 괴롭힐 뿐입니다.
거룩한 탄생의 절기에 자아의 낡은 부리를 주님 안에서 깨부수어 다시 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림절 동안 자아의 왕국에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활짝 개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실현되어가는 경험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