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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은혜로 들어와 종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
(찬송 320장)
2023-12-21, 목
맥락과 의미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에서 일하셨습니다. 19-20장은 남쪽으로 내려와 유대지역에서 가르치십니다. 20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직전의 일을 보여줍니다.
20장은 19장에 이어서 천국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제자들에게 따라오라 하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1. 포도원 품꾼 비유: 은혜로 가는 나라(1-16절)
2. 예수님의 수난예고, 제자들에게 섬길 것을 가르치심(17-28절)
3. 두 소경을 고치심(29-34절)
1. 포도원 품꾼 비유 (1-16절)
20:1의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19:30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다”는 말씀에 대한 이유를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도 같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다.” 19:30-20:16은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이 땅의 것을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그리고 성도들)에게 하늘 나라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나라라는 것을 포도원 품꾼 비유가 가르칩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그렇게 뜻(의지)을 정하시고 집행하시기 때문입니다(14, 15절). 20장에는 뜻한다/의지한다가 6번이나 나옵니다(15,15,21, 26,27,32절).
사람들은 사람의 상식과 기준, 이성의 판단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혹은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시니 잘 배웁시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보상 기준과 다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삼시, 육시, 구시, 십일시(요즘 시간으로 오전 6시,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하루 동안 일할 품꾼을 고용했습니다.
그때 하루는 십이시(요즘 시간으로 오후 6시)에 끝나므로, 마지막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루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평등하게 보상하는 것은 바로, 천국에 들어오게 하심을 말합니다. 각 사람을 천국 백성으로 불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모태신앙으로 많은 시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을 이룬 사람이든,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든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천국이라는 동일한 축복을 주십니다.
가장 많이 수고하며 일한 자는 “원망하였습니다”(11절). “하나님의 평등”을 불공평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원망”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원망했던” 것과 같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안에 있던 원망의 영이 포도원에서 오랜 시간 일한 일꾼들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집 주인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고 합니다(14절).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 혹은 버리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끝까지 주인의 뜻을 두고 원망하는 자는 주님의 선한 행동을 악하게 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에 된 자(16절)입니다. 이렇게 크게 원망하는 사람 중에 사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부처럼 별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원망하는 바리새인을 버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뿐 아니라 늙은 사람도 복음으로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가 인생의 어느 때 부름 받았건 계속하여 응답합시다. 계속 죄 용서의 복음을 듣고 계속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시다. 주신 직분에 계속 충성합시다.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내가 받은 토지, 그 가정과 직장의 일에서 충성합시다.
“집주인”은 20장 뒤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 예루살렘에서의 가르침에 여러 번 나옵니다(20:1,11, 21:33, 24:43). 집주인은 바로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집주인께서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고 보상하고 심판하십니다.
2. 수난 예고,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심 (17-28절)
지금까지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19장에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왔습니다(19:1). 20:17부터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마지막 사역으로 바뀝니다.
17-28절은 군중을 떠나서 제자들에게 따로 하신 말씀입니다. 며칠 후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7-19절). 마태복음에서,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4 번째 예고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했는데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안드레)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21절) “너의 의지는 무엇을 지향하느냐?”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정치적 권력을 잡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아들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실 것을 부탁했습니다(21절).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즉 “고난을 받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귀한 자리를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예비하신 그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고 답하십니다(23절).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준비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미리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 가지기를 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이 세상 집권자들이 임의로 권력을 사용해서 군림하려 뜻하지만(의지하지만, 25절)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26절). 그들이 군림하려 뜻하는 것은, 포도원 주인이 ‘내 뜻대로(15절)’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행하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군림하는 자가 대접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드십니다. 교회 바깥에서 정치가들이 위세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치에는 강제적 권력수단이 있지만, 정치가도 섬김으로써 공무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목사와 직분자에게 그런 강제력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섬김과 교회에서의 섬김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처럼 고난으로 섬깁니다.
성도들과 목사가 교회에서 할 역할의 모범은 예수님 당신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고 대속물로 당신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섬기는 자(26절)가 되어야 합니다. 종(27절)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16:24-28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말씀하신 다음, 제자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서 예수님과 비슷해지는 영광을 누립니다.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섬김의 길을 갑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첫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불평하지 맙시다. 둘째,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 만물이 하늘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때도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십니다(고전 15:28).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으로서 만물의 경배를 받으시지만, 참되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의 완전한 경지에 이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완전함과 영광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서로를 섬기는 것도 마땅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며 사람인 예수님의 영광스런 길을 우리는 걸어 갑니다.
3. 맹인이 여리고에서 고침을 받음 (29-34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는 마지막입니다(21:14에서 성전에서 다른 사람을 고친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두 명의 맹인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 가신다는 말을 듣고 외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이들은 더 크게 같은 말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33절)에는 사람에게 쓰는 존칭이기도 하고, “여호와”라는 뜻도 있습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사람 이상의 특별한 분이심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사단의 목소리입니다. 소경들은 인내하며 그리스도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즉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셔서 고치셨습니다. 병 고치실 때도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는 그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눈”은 15절에 “악하게 본다”는 것에도 쓰였습니다. 경쟁심과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악한 눈이 있습니다.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소경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들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에게 육체적 치유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소경을 고친 이야기는 8:1-4에서 산상수훈 후에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첫째로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8:1-4)과 짝을 이루어 읽어야 합니다. 두 경우에 몇 가지가 비슷합니다. ① “주님”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② “원하느냐”하고 예수님께서 먼저 물어보십니다. ③ 예수님은 만지셨습니다.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차이도 있습니다. 치유된 문둥병자는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증거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고침 받은 두 소경은 예수님의 제자로 나섰습니다. 치유받은 문둥병자가 성전에 간 것은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또 오늘 본문은 9:27에 두 소경이 고침받은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① 거기에서도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따라와 보게 되었습니다. ②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가슴 찢어지는 불쌍히 여김으로 고쳐주셨다(9:39)고 기록합니다.
20:29-34는 치유 자체보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짧은 본문에 예수, 주가 각각 3 번, 다윗의 아들이 2번 반복됩니다. 기적 치유의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것을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는 “주(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거합니다.
두 맹인은 나음을 받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34절).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받은 자는 그분의 뒤를 따라 가며 삽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선한 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많은 수고를 하는 것을 더 큰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인정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직장과 가정을 주님께서 보내신 밭으로 알고 십자가 복음대로 살아가며 섬기는 종이 됩시다. 이것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모욕을 받고 고난을 받아 죽으신 예수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섬기고 복종하는 삶, 이것이 이상적인 가정이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맹인과 같은 장애가 있으면 주님께 부르짖고 치유 받으며 주님을 따라 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섬기는 자(26절), 종(27절)
섬기는 자(26절, 디아코노스)는 식탁에서 섬기는 종을 말합니다. 종(27절, 둘로스)는 들에서 일하는 종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어디에서나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 불쌍히 여기심(30, 34절)
맹인들은 “불쌍히 여기소서”(엘레오, 30절)라 외쳤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스플라그크니조, 34절)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에 쓰인 이 말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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