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문창과 재학시절 한 해 선배였던 학우가
서울디지털대학 문창과 시동아리 밴드에 올리는 시론입니다.
현재 전라도 여수에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방 신춘, 문예지 공모전 등 여러번의 상을 받고 디지털대학에서
특강도 하곤 했습니다
혹시 공부에 도움이 되실까 올립니다
최형만의 시론 1
안녕하세요. 시동 밴드 회원님들!! 앞으로 글을 한번씩 올릴 생각인데요. 우선 학우님들의 호응도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저와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올리는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시 창작에 관한 이론은 아닙니다. 역시나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주관적인 시 감상이나 해석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난날의 당선작을 살피면서 심사자들의 시선에 어떤 점이 눈에 띄어서 당선작이 됐을까, 그쯤을 살펴보려 합니다.
제가 이런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건 이론을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며, 이론의 특성상 실속 없는 미사여구나 가르치려 드는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은 일단 재미도 없고 지겹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하나 실제로 본인의 시 창작에 도움 될 확률은 극히 미미합니다. 시 감상이나 해석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요.
저는 문학에서만큼은 꽤나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문학의 깊이나 숭고한 가치를 좋아도 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걷는 문인을 존경도 하지만, 저는 그 정도의 깜냥은 되지 못합니다. 돈도 되지 않는 작품을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제 몸 버려가는 짓(?)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흔한 말로 저 사람, 글 좀 쓴다는 소리 듣는 걸 좋아하고, 제가 쓴 글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야만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에 전업으로 매진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는 이론을 몰라서 시를 못 쓰는 게 아닐 겁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창작 이론집은 차고도 넘치니까요. 그럼에도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런 이론을 너무 잘 알아섭니다. 이론에 치여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고 보니 작품성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을 끄는 감정(혹은 감동)은 없습니다. 심사자들도 사람일진대 작품성만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엇은 대개 표현의 형식(혹은 방식)에서 오고, 그것이 바탕이 됐을 때 작품성도 살아납니다.
한 가지 우려가 있다면 지금의 2~30대 젊은 시인들이나 혹은 현대시만(?) 쓰는 이들에겐 고리타분한 서정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 역시 현대시를 곧잘 쓰는 사람으로서, 앞서 언급한 마음을 잡아끄는 표현의 형식이 없다면 제아무리 현대시를 써봐야 본인만 만족하는 재미없는 시에 불과할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독자와의 소통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현대시의 매력은 내용의 이해(소통)가 아니죠. 표현의 형식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시를 씀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할 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걸 알고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참고로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댓글이 있더라도 질문이 아닌 이상, 답글을 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 점,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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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2014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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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입니다. 지난날 당선작을 공부할 때 가장 기억에 남기도 했고요. 대개의 당선작을 보면 최소 20행이거나 23~4행인데 반해 이 작품은 11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죠. 그런데 어떤가요? 짧은데도 할 말을 모두 다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는 다 말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말이죠.
이 작품에서 심사자들의 눈에 든 건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없어도 반짝이겠다’ 이런 형식이었을 겁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시를 길게 쓸 필요가 ‘없겠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겁니다. 비단 제목이 반가사유상이어서가 아닙니다. 불교적 소재여서 그 아득함이 더 배가 되어 느껴졌을 뿐, ‘~이겠다’는 표현을 다른 소재에서도 핵심적인 의미로 녹여낼 수 있다면 분명 심사자의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시를 쓸 때 ‘~이겠다’는 표현을 한번 써보세요. 솔직히 많은 걸 쓰려면 더 힘들잖아요. 이렇게 쓰면 심사자 입장에서 볼 땐, 쓸 말은 아주 많지만 그만 줄이겠으니 알아서 해석하시라는 도발로도 읽힐 겁니다. 그런 도발이 의외로 먹히는 거고요. 물론 이 작품은 다른 행에서도 최대한 말을 절제하려는 게 느껴집니다. 여백의 효과를 극대화한 셈이죠.
실제로 아래 링크 걸어둔 2020 불교신문 당선작을 보면 이를 응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오늘은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있다’, ‘없다’, ‘~이겠다’라는 형식을 자신의 습작시에 적용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따라 하진 마시고요. 본인이 쓴 시에 적합하게 활용해 보세요. ‘~이겠다’에서 ‘이’를 빼고 ‘~겠다’로 바꿔 주도적으로 밀고 갈 수 있다면 전체적인 느낌이 확 달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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