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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강씨임계정 원문보기 글쓴이: 대산 강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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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재(禮山齋)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 34번지 강민첨 1세 祖
재실과 묘소.
↓↓강민첨 (은열공파 1세조 묘소)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 34 번지 강민첨 선조 묘소
매년 음 10월 5일 전국 진주강씨 종친들이 모여 시향을 올림.
2013년 음10월 5일 은열공묘소에서 시행 묘제를 드렸습니다.
(위 예산재 사진 용동댁 2째딸 강미애 제공)
↓↓ 은열공 1세조 두방영당(두방재)홍살문 중건
문화재등록(2011.12. 6 .제막)
(하동군 옥종면 소재)
진주강씨(晉州姜氏)시조 강이식 (始祖 姜以式)後예 휘 종일 子극술 子 보능
은열공파 1세조 강민첨(先祖 姜民瞻)
산앙사 (山仰祠)
은열공(殷烈公) 1세조 강민첨 (姜民瞻)
고려 광종 계해년 963넌 11월 29일 진주옥봉 개경향 에서 탄생 하시다.
현종 12년 신유년 1021년 11월 12일 하세.
산앙사(山仰祠) 는 원래 진주 대안동 장능에 있었으나 殷烈公 姜民瞻 將軍의 影幀을 모신
사당으로 임오년 1822년후손 한사공 대수 께서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영정이 낡고
훼손된것을 보고 화공을 불러 채색을 입히라하였다.
그 후 후손 필준 (은열공후 30세 판서공파) (청암소문중)이 다시 그릴것을 제창하여
1970년 정조14년 임계공후손 강필준이 서울까지 가서 표암 강세황 에게 부탁하여
존영2본을 그려 진주대안동의 사당과 하동 두방재에 각각 봉안하였으나 1868년
서원 철페령으로 대안동의 사당이 철거되어 70여년간 두방재에 존영2본을
함께 봉안하다가 존영2본을 함께 모시는것이 선조에 대한 모독이다 하여
경남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진주강씨 판서공파 임계공 문중에서 서기 1965년에
산앙사 사우를 새로창건하여 두방재 에 묘셔진 영정1본을 설매 산앙사로
모셔와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게 된것이다.
은열공 1세조 강민첨(姜民瞻)영정봉안
16세 휘 보충(輔忠) 23세 휘 심(深) 24세 휘 뎍용(德龍) 위패봉안
은열공1세조 강민첨 춘향일 매년 음 3월 23일(16세 휘 보충. 23세 휘 심. 24세 휘 덕용.)
시향일 매년 음 10월 15일 (산앙사. 임계정)
↓↓ 산앙사 2013년 음 10월 15일 시향 봉향
2013년 음 3월 23밀 춘향례
2013년 음 10월 15일 시향제 (산앙사)
부산시 종회 회장 강봉환님과 종회원 산앙사 방문 예를 드림(2013년 음 3월 10일)
은열공파 1세조 강민첨(先祖 姜民瞻)
2 세 단
3世 보 (輔) 禮賓랑
4世 정협 (貞叶) 商書都勝省左丞
5世 여익 (呂翼) 判三司事
6世 원감 (元鑑) 太子詹事
7世 청 (請) 府使
8世 순(珣) 牧使
9世 조 (祚) 配令人 淸州韓氏 父 代言
10世 유 (惟) 호조지랑참화정사
11世 대규 (大珪) 문과급제
12世 여위 (汝渭) 조의대부상서
13世 유노 (惟老) 上護軍 致仕
14世 신좌 (臣佐) 求仁齋生一本云 配金氏 判書弘源
15世 득시 (得時) 도관좌랑(都官佐郞)
16世 보충(輔忠) 판서공파(설매파) 파조(判書公派派祖)
고려 말엽 좌우위 보승랑장으로 왜구를 소탕한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고
송덕비가 섰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산앙사에 위패가 있다.
감사 金世鎬(김세호)가 지은 嶠南誌(교남지)에 사적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에 있는 고려시대 분묘가 있는데
진양강씨인 강보충(姜輔忠)의 묘이다.
강보충은 고려 말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와 장흥리의 경계가 되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큰 봉토를 가지는 고려시대 방형분묘이다. 묘 앞쪽은 대형의 석재로 단을 만들었으며,
분묘 주위에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 있다. 진양강씨 후손에 의해 보존·정비되고 있다.
산앙사에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 3월 23일 춘향 음10월 15일 시향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우리 16세조 보충할아버지는 역사적기록이 없는것이 특징이다.
어느문헌을 찾아 보아도 할아버지의 행적이나 기록이 전무하다.
김세호가 지은 교남지에 사적이 있다하나 찾아 볼수없고,
경상대 도서관에 교남지가 있다하여 찿아 보았으나 김세호가 지은 교남지는 없다.
경상북도 봉화군 문경군의 기록을 보면 경남 창녕군 남지읍의 한 교회에 교남지가 있다하나
찾아보지 못하였다. 구전에의하면 왜병을 물리친 공적으로 고려시대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왜구가 우리 나라를 처 들어와 輔자忠자 할아버지께서 왜구를 섬멸하신것을 왜구들이 알고
현재의 묘 주위의 모든 묘비 석물을 묘아래 집현면 광정교 아래 강물 소에 매몰하고,
묘의 위치조차 모르든차 후손들이 집현면 냉정리 장흥리 부근의 노인들의 증언으로
묘를 찿아 후손들이 서기1978년 묘비를 세우고 해마다 벌초하며 춘향과 시향을 드리고 있다.
16세 휘 보충(輔忠) (23세 휘 심(深) 24세 휘 뎍용(德龍) 위패봉안
은열공1세조 강민첨 춘향일 매년 음 3월 23일 (16세 휘 보충. 23세 휘 심.24세 휘 덕용.)
시향일 매년 음 10월 15일 산앙사 와. 임계정)
17세 용리 (用鯉) 문과급제 순천부사 견 진주연계안기록
18세 희여(希呂) 이조 태종조 (1381년)문과장원 광양현감 진주연게안운정통
신유년 문과 배위 파평윤씨
19세 취(就)
20세 지 (持)
21세 세호 (世豪)
22세 오수 (鰲壽)
23세 심 (深)
24세 덕용 (德龍)配
25세 錫胤(석윤)1子,得胤(득윤)2子,有胤(유윤)3子,
(석윤 祖님은17세에 하세하시니 子가 없으셔 第 得胤 祖의2子㙉(전)
祖를 양자로 입양하셨고
2子 得胤(청암파 익주祖의 子 여보祖의 子흥운祖)
得胤祖의 맏아들인 오(墺)祖 가 후손(後孫)이 없어 큰집 전㙉 祖의 둘째아들인
익주 祖를 양자로 삼았 다,
3子 有胤(유윤) 祖님 삼형제 분은 덕용 祖의 배위 밀양 박씨祖母의 子이며
4子 흥윤祖 5子광윤 祖님은 덕룡(德龍)祖님의 後配位의 子이다,
6 ,여(女) (壻 윤우벽 尹右벽) 합천인 (춘우정)
26世 㙉 (전) 2子 오(墺) 祖 백부 석윤 출게 (錫자胤자祖님이17에세 별세함
으로 석윤 조 의 동생인 득윤祖의 次子 오(墺) 祖가 錫胤 祖에게 양자오셨다)
27世 서주 2익주
28世 1子여관 (매계공파) 2子 여완
1(제운) 2(래운.지우당)3(재운.용산재)
매화낙지자성촌(梅花落地自成村) 설매 臨溪亭
임계공(臨溪公) 강심(姜深)
(生 중종 17년 임오 1522년 - 卒 선조 27년 갑오 1594년 7월 27일)
우리 선조 殷烈公 諱 민첨(民瞻)후 23세 임계공(臨溪公)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수양을 하시던 곳으로 임계정이 남향으로 서 있으며 임계정 옆에 山仰祠가 있고,
산앙사에는 은열공 휘 민첨 선조의 영정과 진주강씨 판서공파 파조 輔忠16세 위패.
臨溪公23세. 梅村公 德龍24세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앙사 앞쪽에는 공조참의(臨溪公)유허비가 있고,
유허비는 상산(商山) 김인섭(金麟燮)이 撰하고 璲桓이 글을 쓰고,
東榮이 세운 비를 크게 재입석 하여 세워저 있다.
그러나 원 비문에는 수환(璲桓)글 쓰시고
비를 세운 동영(東榮)祖의 諱 자도 빠지고 임계공 深 祖 의 사위 (婿)이대기의 기록도
빼는 등 정문장이 글쓰고 종중돈으로 비를 세우고 비문을 해역하여
병포 叔 자기 혼자 모든 일 다한것 처럼 새 비가 세워져 있어 안타깝다.
臨溪亭 바깥마당에는 서기 1999년에 세운 임계공 심 할아버지의
아들 梅村公 諱 德龍'절충장군 중추부사 선무원종일등공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의
매촌 강공 신도비'가 서 있다.
이 碑도 매촌공 실기를 발췌하여 비문을 지엇다고하나
(매촌공 실기는 창산 성여신공께서 지은 행장의 글 임)
매촌공실기와 비교하면 신도비문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연민 이가원 선생(단국대학교 석좌 교수)의 글 몇구절로 비에
글을 새겨 역시 종중 돈으로 비를 세우고
자기혼자 모든일 다한것처럼 남보기 부끄럽다.
입석당시 연월산 산지기 집터와 따른 전답 임야를 매매하고 종원 헌성금으로
비를 세우고 병포숙이 혼자 모든일 처리한것처럼 입석 당시에도 종원의
불평이 있었다.하나 종중돈으로 입석하고 자기혼자 모든일 다한것처럼
역사가 흘러가기전 올바르게 바로 재 입석요구하니 종원님들은 결정을
내리고 한종중의 역사가 후대에 바로전달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임계정 종중 종원들이 임계공 유허비와 매촌공 신도비를 재입석 할것을
요구하고 있어서 더 안타까운지경이다.(그리고 입석 당시 종중 소유 연월산
산 산지기 집터 종중소유 전 답 임야 를 팔고 매촌공 신도비 를 세우고 어디에
지불한 내역서 도 전무하다 당시 종회장 강병포 총무 강계동 단 헌성금 내역서
재실 앞 창문위 액자가 있음)
공조참의 臨溪公 姜深 祖 만년에 설매에 이거하여 시냇가에 초가 정자를 짖고
후학을 양성 하며 수양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다시
그 자리에 서기1923년 후손들이 기와집 5간을 중건한것이 현재의 臨溪亭이다.
산앙사 에는 매년 음 3월 23일에 제향을 올리며, 그리고
임계정과 산앙사에는 매년 음 10월 15일 시향을 올리고 있다.
[증 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 戶曹參議姜公遺墟碑)]
경남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설매실)는 입향조인
진주강씨 임계공 강심(晉州姜氏 臨溪公 姜深)의 유허비가 임계정에 있다.
증 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戶曹參議姜公遺墟碑)라고 새겨진 고색창연한 비석에는
한말 산청선비 단계 김인섭(1823~1903년)의 글이 적혀 있다.
비문에 “공의 휘는 심(深)이며 자는 태함(太涵)이다.
고려 현종조 태사(太師) 벼슬을 지낸 은열공 강 민첨 선조의 후손이시다.
아버지 오수(鰲壽)는 선무랑의 벼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진양정씨 생원 이량(以良)의 따님이시다.
1522년 출생 현재 진주시 집현면 산당리 (어풍정(御風亭)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셨으며 자라서는 기량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했다.
임계 심 할아버지는 어풍정에서 태어나 만년에
설매실로 이거 하시여 들어 오셨다.
임계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어풍정은 신당(新塘)마을 남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으셨으며 외조부인 정생원이 살았던 집이다.
임계정자에는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수업 하였으며, 진양지 편찬을 주도하신
부사 성여신도 와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임계 할아버지는 정자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사시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아들 덕용(德龍)조(祖) 님은 임란 때 창의해서 왜적을 무찌른 공이 높았다,
임계공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시 (詩)
臨溪公 原韻 (임계공 원운)
紺巖山下雪梅村 (감암산하 설매촌) 감암산 아래 설매마을이요
茅屋臨溪竹作門 (모옥임계죽작문)띠집가에 맑은시내 푸른대가 문일러라.
多病年來人跡絶 (다병년래인적절)병에 젖어 날보내니 인적마저 끊어지고
終朝獨坐到黃昏 (종조독좌도황혼) 홀로 앉아 보내는 하루 어느듯 황혼일세.
敬差官 金行 次韻 (경차관 김행 차운)
山圍谷抱自成村 (산위곡포자성촌) 산골이 다정히 감싸주는 이 마을은
不是人間禍福門 (불시인간화복문) 아마도 인간의 시비영욕 없을레라.
座對竹林淸意足 (좌대죽림청의족) 푸른대숲 마주앉아 청의 또한 족하니
一塲春睡任昏昏 (일장춘수임혼혼) 봄날 깊이 든 잠 곤히도 취하네.
표암 강세황은 숙종 39년 1713년 계사년에 출생 하시고
정조15년 1791년 78 세로 별세함.
이 글은 경술년 동 표암 강세황 별세 1년전 77세 에 쓰셨다.
임계정 재실에 부착된 원운 현판의 글자가 다른 글자도 있다.
임계공 심 (臨溪公 深)할아버지 묘소 (墓所)
묘소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관곡 연월산 번지
임계공 할아버지 의 묘지 (산소) 입니다 묘지주변 잡목 제거 작업을 하여야 될 것같네요.
묘비석 아래 비석 돌이 일어나 글자도 안보일 지경 입니다.
종중에서 더 관리를 서둘야 되겠지요. 2013년 벌초날 성묘를 하고 왔는데 묘소를
다녀온지 마산 이거하고 처음 입니다. 묘소 관리를 소흘히 한것같아 종원님 에게
이런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 생각하여 벌초 후 2013년 추석 무렵 마산에서
산소에 가 사진 촬영 했어요. 봉분에 잔디를 심으면 좋을 텐데 주변의 울창한
수목들의 그늘로 인하여 잔디가 못살겠더군요.
(아래 사진은 임계정 중건 추진위원회 종중 종회 회의 전 종원님의 모습 임계정 정사를
다시 새집을 짖는다고 건축 도면 건축 허가를 내기전 선 공사계약을 이억원에 하고,
허가 불가통보 받은 7일 후 계약금 5천만원을 지불하는 등 재실을 짖지 못하면서
대지 문제로 소송을 하여 후속대책으로 小지파별 대책위원회의 전의 모임사진 입니다.)
(강기정 촬영)
강덕룡(姜德龍) (은렬공파 24 세)
1560년 명종 15년 경신년 3월 15일생
1627년 이조 5 년 정묘년 10월 25일 별세 (향년68세)
1560~1627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武臣). 자(字)는 여중(汝中). 호(號)는
매촌(梅村).
18세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정기룡(鄭起龍), 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모두 재용(才勇)이 뛰어나 영남(領南) 삼룡(三龍)이라 불럿다.
1583년 (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선조 26) 왜병(倭兵)이 울산(蔚山)으로
후퇴하고, 명(明)나라 군사가 상주(尙州)와 대구(大邱)사이에 주둔했을 때
양료차관(糧料差官)이 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을 원활이 했고, 호남 체찰사(湖南 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麾下)에서 체부아문장(體府衙門將)과 본부영장(本部營將)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따라 성주(星州) 화원현(星州 花園縣)과
고령(高靈) 안림역(高靈 安林驛)에서 별장(別將) 우선(禹善)과 함께 삼가(三嘉)에서
왜적(倭賊)을 격파(擊破)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다시 진주영장(晉州營將)을 거쳐 장기현감 때 선정(善政)을 하였고,
경상도 우병영중군(右兵營中軍)을 제수(除授) 받았다.
진주(晋州) 촉석루 아래에 공(公)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는데 비문(碑文)은
참판(參判) 박명부 가 지었으며,
절충정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700년 (숙종 26) 효자(孝子)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1856년(철종 7)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문헌] 영남인물지, 진양지, 임진전란사. 龍蛇日記,
* 묘(墓) : 경남(慶南)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연월산
* 시향(時享) : 음(陰) 10월 15일
* 부(父) : 심(深)
* 자(子) : 석윤(錫胤), 득윤(得胤), 유윤(有胤), 광윤(光胤), 흥윤(興胤)
강덕룡(姜德龍): 자(字)는 여중(汝中)이요, 호(號)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올라 임진란(任辰亂) 때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막(幕)에 달려가서 왜(倭)로 더불어 연전(連戰)하여
열두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공성일(金公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다. 갑오년(甲午)에 상(喪) 을 만났다가 상(喪)이 끝나니
이공원익(李公元翼)이 불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으로 더불어 적(賊)을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대파하고 장기현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옮아갔더니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와서 봉양하매 효성의 감동으로
강물의 고기가 배에 들어오는 이변(異變)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하죽헌 성(河竹軒 惺)이 서문(序文)을 만들었고
선조조(宣祖朝)에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하였으며
숙종조(肅宗朝)에서 효행으로써 복호(復戶)를 명령하였으며
철종조(哲宗朝)에서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였다.
강덕룡 1560-1627 여중 매촌 진양 창의 영남삼룡 매촌실기 진양세고
姜德龍 1560-1627 汝中 梅村 晋陽 倡義 嶺南三龍 梅村實記 晋陽世稿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덕용(德龍) 祖 묘소 (墓所)
묘소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관곡 연월산 번지
덕용 할아버지와 배 밀양박씨 조모 묘 (산소)입니다 관리를 더잘 하여야 될겁니다.
묘 위로 소나무가지가 늘어저 있고요, 역시 묘 주변 관리를 잘하여야 되겟지요.
2013년 벌초 성묘 후 심 할아버지 산소와 동일 촬영
↓↓ 28세 용산재 여완(汝完)
生 : 현종 서기 1673년 계축 2 월 1 일 生
卒 : 숙종 서기1707년 4월 23일 (36세)
墓碑文(묘비문) 汝자完 祖의 내종제 辛性中 찬(撰)
先瑩 소재지 :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 후산 乾좌
배(配) 진양정씨 현종 서기1673년 계축生
卒 : 영조 서기1743년 계해 6월 13일(70세)
여완조 29세 후 (1子 제운공, 2자 래운공, 3子재운공. 집안 대표 재실
龍山齋 다)
9대 祖 汝完할아버버지의 묘소 여완조 별세후 건륭 년 서기1745년
할아버지별세 38년후 비를 입석 하였으나 입석한지 268년
후2013년 4월 5일 재입석 하였다.
(아래 용산재 사진은 모두 기정이가 제공)
비석을 세운지가 오래되고 풍파에 비문이 훼손되어 원문을 복원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癸巳년 2013년 4월 5일에 한글로 번역한 새碑를 세우고 묘소를
재 정비하였다 그리고 입석전 병원 叔 께서 묘비에 學生 을 處士로 하자고 하섰는데
댱시 병포 叔 이 용산재 현판 용산재기문 등 종원도 모르게 가짜 쎃부치는등
역겨워 본 원문 그대로 하자고 한것이 지나고 보니 종원님 과 그리고 가산 叔
에게 죄송한 마음 해량 하셔주세요,
마음 금할수 없으니다 종원 모두에게 죄송 합나댜,
재 입석하게된 동기는 기정이 내외가 10여년전에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드리려 가서
오랜세월 묘의 큰 봉분이 풍파에 의해 자연으로 낮게 가라앉았으며, 비석이
마멸되어 비석 돌이 갈라진것을 보고 그자리에서 비가묻인 부분 파내고 비석을
사진촬영하여 기정이가 비문해역에 들어간지 10여년 후 기정이가 비문을 복원하여
종중돈으로 재입석하였다.
그리고 내가 기정이의 비문복원에 성과열을 다하는것을 본즉 수정 수정 비문 다시
수십번 수정하고 비문복사한 복사인쇄 자재비 량이 한짐 돨것이며 기정이의 노력한
노력대가 외 자비가 수십만원 들어간줄안다. 기정이 아니 였으면 비가 마멸 소실되어
원비문 글도 없으니 비는 다시 복원 못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리고 현재
서울지역 한문학 교수와 한문학하는 분 그리고 창원 지방의 대학교수 창원부근 유림
타 문중 대표들이 자기들 문중사로 기정이를 찿아와 상호 교류하며 상담하고 오가는
것을 자주보는 현실이다,
↑↑입석 하든날 비문 복원을 위해 애쓴 김병헌 선생과 종원 基正
강기정 정말 수고했어. 사문원 김병현 선생님 감사드리고,
그리고 소임을 맡은 순기 그리고 종손 용기 일백만원 헌성하고 수고 하였다.
↓↓ 용산재호 현판 (성파 하동주 친필)
용↓용산재호 (성파 하동주 선생찬필)생
↓↓ 용산재 전경
용산재기
용산재 사실기
梅湖公 선항 祖의 용산재 원운
↓↓ 炳觀叔의 용산재 차운
↓↓珠杏祖의 용산재 차운
龍山齋 柱聯
忠信謙恭 處世之方 (충신겸공 처세지방)
承先裕後 戒之勿替 (승선유후 계지물체)
黍稷非馨 惟德是馨 (서직비형 유덕시형)
儉勤孝友 齊家之法 (검근효우 제가지법)
金玉非珍 惟善是珍 (금옥비진 유선시진)
1.진실을 다하고 믿음으로 공경하고 겸손함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길이다. (충신겸공 처세지방)
2.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소중히 보관하여 버리지
말고 지켜나가라. (승선유후 계지물체)
3.서직이 많다하여 향기가 아니라 오직 덕행의 향기가
널리 날리느니라. (서직비형 유덕시형)
4.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집을
다스리는 근본이니라. (검근효우 제가지법)
5.황금과 주옥이 보배가 아니라 오직 착함이
곧 보배이니라. (금옥비진 유선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