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관광버스 기사 아드리아노
/ 오태진
6월 초순 여행사 단체관광으로 다녀온 서유럽 여행 첫날,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몸체에 큰 글씨로 '소렌티노(소렌토의)'라고 쓰인 이탈리아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까지 이레 동안 일행을 태우고 갈 45인승 관광버스다.
운전기사가 싱글벙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짐을 받아 싣는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들 맵시 좋은 멋쟁이라던데 이 기사는 용모도 차림도 소박하다.
이름은 아드리아노 코를라도, 마흔두 살 노총각이다.
호텔로 가기에 앞서 한국 식당에 들러 된장찌개로 저녁을 들었다.
아드리아노도 스스럼없이 한 자리 끼어 앉아 숟가락을 든다.
밥도 먹고 나물도 맛보더니 "부오노(맛있다)"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된장찌개를 몇 숟가락 떠먹고는 "핫(hot)"이라고 외치며 혀를 내두른다.
맵다는 '핫'이 아니라 뜨겁다는 '핫'이다. 식탁에서 펄펄 끓이는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 프랑크푸르트 호텔 앞에서 아드리아노가 버스 지붕에 올라가 뭔가를 열심히 손보고 있다.
환기구 문짝에서 덜커덕거리는 소음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함께 온 여행사 인솔자는 버스 기사가 뭔가 고쳐보겠다고 지붕까지 올라가 애를 쓰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대개는 여행 일정도 아랑곳없이 정비공장으로 가거나 아예 운행 못한다고 발을 뻗기 십상인데,
아드리아노가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버스로 하는 유럽 여행에서 인솔자가 여행객 못지않게 신경 쓰는 사람이 운전기사다.
'캡틴'이라고 부르며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장거리 버스 운행에 관한 유럽연합(EU) 규정이 워낙 까다로워서 기사가 규정을 따지기 시작하면 여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EU 규정은 버스 기사가 하루 9시간을 넘겨 운전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엔진을 끄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12시간이 상한이다.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일주일에 이틀은
10시간까지 운전할 수 있고, 서 있는 시간을 합쳐 15시간까지 운행할 수 있다.
휴식은 두 시간 운전한 뒤에 30분, 네 시간 반 운전한 뒤에 45분씩 가져야 한다.
기사가 이 규정을 1분이라도 어기면 벌금 3000~5000유로(470만~780만원)를 물고 운전 자격이 정지·취소된다.
버스 운전석 오디오패널엔 디지털 태코그래프(tachograph·운행기록계)가 내장돼 있다.
주행 시간·속도·거리와 정지시간을 정확히 자동으로 기록하는 장치다.
경찰이 이 장치를 판독하는 기계를 갖고 다니며 연결하면 과속부터 운행시간 초과까지 범칙 기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기사에게 "조금 빨리 가자"거나 "조금 더 가자"고 부탁하기가 쉽지 않다.
가뜩이나 일정이 빡빡한 한국 단체여행 인솔자들은 더욱 속이 탄다.
하지만 아드리아노는 승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앞선 기사였다. 성곽으로 둘러싸여 중세 모습을 잘 간직한
독일 로텐부르크는 성채 밖에 버스를 세워두게 했다.
서머타임 때문에 밤 9시까지 환한 곳이라 저녁을 먹고 나서도 볕이 뜨거웠다.
버스까지 뙤약볕을 20분 넘게 걸어가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버스가 식당 앞에 서 있었다.
아드리아노가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까지 걸어왔다가 식당 주인에게 "한 시간만 버스를 세우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다시 걸어나가 버스를 몰고 들어와 일행이 땀 흘리고 걸어갈 수고를 덜어줬다.
닷새째 되는 날 오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밀라노로 가는 고속도로가 밀렸다.
아드리아노가 연방 "맘마미아(맙소사 엄마야)"를 외친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밤 9시가 다 됐고, 불 밝힌
밀라노 대성당 구경을 끝내자 밤 11시가 넘었다. 그래도 아드리아노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인솔자는 "아드리아노가 이탈리아 기사치고는 말수가 적다"고 했다.
여느 기사는 운전 중에도 전화기를 붙들면 통화가 끝도 없어서 가이드가 관광 안내를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런 아드리아노도 이탈리아로 들어서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남쪽 나폴리 근처에서 모시고 사는 홀어머니에게 거는 전화다.
비싼 국제전화는 삼가다 국내로 들어와서야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한 달 내내 버스를 몰아 월급 1500유로(230만원가량)를 받는다고 했다.
하루에 받는 팁 15유로를 합쳐도 그리 좋은 벌이는 아닌 것 같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사는 연인과의 사이에
여섯 달 된 아기를 두고 있다고 했다. 연인과 아기가 이제 곧 이탈리아로 와 함께 살기로 했다고 한다.
정식 결혼을 할지는 아직 결정을 못한 듯했다.
바람기 많 다는 이탈리아 남자들도 결혼엔 매우 신중하다고 한다.
아드리아노는 이레째 되는 날 저녁 로마 호텔에 일행을 내려주고 작별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엔 좌석을 돌며 일일이 초콜릿을 건넸다.
인간미 넘치는 이탈리아 버스 기사와 함께할 수 있어서 여행이 더 즐거웠다.
무리한 버스 운행과 사고를 막으려고 엄격히 정한 EU 규정을 알게 된 건 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