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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인 교체 |
3년 전 민흥기 이사로 교체함. |
지주회사로 재편 |
2010년 5월, SJM홀딩스 설립, SJM은 하청계열사 전락. |
바이백 발각 |
2012년 3월, 중국제품 역수입 발견. |
노사평화 파기 |
51개 단협개악안. 비정규직을 일방적 투입, 노조활동 무급 |
아웃소싱 발각 |
6월 26일 금화산업으로 몰래 아웃소싱 확인. |
이익빼돌리기 |
7월 경영분석 통해, 비상장회사와 해외공장 납품가 조작 확인 |
분명한 입장요구 |
개악안 철회, 회장의 구조조정 중단 확인 요청 |
교섭교착 |
7월 16일~ 모든 교섭 중단상태 |
폭력과 직장폐쇄 |
7월 27일 야만의 폭력과 직장폐쇄 |
○ 2세 경영세습의 안정화와 기업구조재편을 통한 이익구조의 극대화가 맞물려 진행됨.
○ 회사의 노조파괴 공작은 작게는 2~3년, 길게는 4~5년 전부터 진행되었다고 봐야 함.
○ 노무이사 교체 후 단협 무력화 공세와 현장 통제 강화 전략의 꾸준한 시도
- 타임오프를 통한 공세(2010~2011)
- 일상적 협의 무시, 합의사항 어김( 현장계약직 5명 입사, 식당 비정규직화 요구 등)
- 바이벡, 외주화 시도와 강행
○ 지회 대응력 계속 약화, 축소
- 지회 조직력 약화
- 지역 연대사업장 구심력 약화(안산지부 의장, 경기지부 임원 배출 사업장임, 간부 수준에서의 연대투쟁으로 활동력 축소)
- 현장투쟁 약화 등 사측의 준비에 비해 지회 결속력은 약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음.
○ 금속노조에 대한 불신 심화
○ 주간 연속 2교대 시행에 있어서도 사측의 이해관계 반영됨
【평가】
○ 도표와 같이 사측의 노조무력화 전략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노무관리 이사 영입 후 본격화되었고 2011년 타임오프 대립을 통해 구체적인 현장통제와 장악력을 확보해 왔다. 2012년 들어 단협 전면 개악안 51개 제출, 노조활동 보장문제 등으로 쟁점이 발생, 바이백과 아웃소싱이 발견되면서 사측의 노조무력화 전략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 이에 비해 지회는 현장조직력이 지속적으로 느슨해지고 2011년 임단협 마무리 후유증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한동안 내부 진통과 지도부 구성의 어려움을 겪었음.
2. 지회의 반격 ; 사전 대비와 숱한 간담회, 조합원 교육
○ 2개월여 간 현장 토론을 통해 90%의 찬성으로 지도부 세움(지회장 김영호)
○ 2011.11.7. 정기총회
- 전임자 임금 보전 안건 조합원 90% 찬성으로 압도적 결의
- 현장 탄압 공세에 대한 현장투쟁 강화 결의
- 2012년 임.단협 투쟁 준비와 직장폐쇄 공세를 포함한 사측 탄압에 대한 준비태세 강화
○ 중층적 간담회(라인별ㆍ부서별ㆍ공장별ㆍ세대별) 지속적 전개
- 현장 문제에 대한 토론과 의견수렴
- 지원부서(공무, 전기)에 대한 사전 관리
- 취약부서에 대한 중점 관리
- 직,반장 간담회
- 고참 사원 간담회
○ 직장폐쇄 대비한 사전 훈련 및 조직 재편
- 임단투 돌입 전 분임조 편성
- 실천단을 선봉대로 확대, 재편함(50여 명으로 확대)
- 채증조 훈련
- 조합원 교육 강화 - 기업 구조 개편에 대한 인식의 통일성, 탄압에 대비한 대응 태세 등
- 조기 조정절차 밟음(6.15-지부 집단교섭 사업장 공동)
- 전면파업 자제하고 현장 투쟁 강화 ; 공격적 직장폐쇄 사전 차단 및 역공 대비
- 라인별 현장투쟁 강화, 부서별 부분파업, 파업시 연대투쟁 프로그램 강화
【평가】
○ 경기지부는 홀딩스라는 지주회사제도를 도입한 사측이 필연적으로 노조에 대한 공격이 노골화될 것으로 판단했고, 2011년 노사관계의 갈등 증폭과 2012년 51개 개악안을 제출한 사측의 의도가 「노조무력화->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것에 대비하여 집단교섭의 조기조정절차를 밟고 사용자단체를 압박하였다.
○ 지회는 6월 10일부터 공장 내 농성장을 설치하면서 부서별, 라인별 현장투쟁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사측의 직장폐쇄 공격에 대비해 투쟁전술에 있어서도 전면파업을 자제하면서 조직력을 강화해 나갔다.
○ 사업구조 변화에 따른 6,7월 별도의 분석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특히 전국에서 노조파괴시나리오가 작동해온 과정들에 대해 조합원과 공유해나가고 있었다. 직장폐쇄와 용역깡패의 투입이 여름휴가와 함께 진행될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휴가 시작되는 7월 28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나 이보다 하루 빨리 상황이 발생하였다.
3. 야만의 새벽(7/27)에 당당히 맞서다!
○ 시간대별 사태 전개 과정
- 7/26일 오후 5시경 노조로부터 용역깡패 2천여 명 서울 상암 집결 첩보 입수
- 21시~22시 지회 간부 집결 및 비상회의 ; 현장 사수하기로 결정
- 22시~23시50분 야간조 현장토론 ; 현장 사수 결의하고 주간조 비상연락망 가동
- 7/27 04시까지 150여 명 1공장 현장 집결
- 04시 30분경 용역버스 5대 정문 하차
- 04시 43분~05시15분 용역깡패 정.후문 공격, 2공장 접수
- 05시30분 전경 3개 중대 도착, 단원경찰서장 지휘
- 05시30분~06시경 까지 소강상태(민이사, 깡패 현장 진압 작전 준비)
- 06시10분~06시43분 용역깡패들 공장 장악, 조합원 전원 정문 밖으로 쫓겨 나옴
【평가】
○ 7/26일 저녁부터 27일 아침 공장에서 쫓겨나기 까지 약 24시간동안의 긴박한 상황에서 지부와 지회는 두 가지 판단을 했다. 그리고 그 판단 결과는 이후 지회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며 투쟁 전반에 걸쳐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 현장을 사수하면서 단호히 맞설 것인가? 조직적 퇴각과 거점농성(시청 앞)을 할 것인가?
- 7월 26일 저녁 용역투입 정황 포착 -> 긴급회의 -> 공장 사수 결정 및 주간조 비상연락망 가동(150여 명 현장 복귀) -> 야간조 조합원 공장을 지키자고 결의함.
- 비무장으로 조합원들은 용역깡패의 야만적 폭력을 2시간 이상 맨 몸으로 막아내며 단호하고 절제된 대응을 했다. 새벽까지 전 조합원이 공장으로 달려와 폭력현장을 목격하면서 ‘야만의 새벽’은 사측이 기대한 ‘공포의 새벽’이 아니라 ‘분노의 새벽’이 되었음.
- 사측은 폭력만행을 통해 지회지도부와 조합원들의 사기를 꺾고 패배감을 심어주어 확실한 주도권을 잡을 계산이었지만 역으로 사측의 본질이 낱낱이 드러나 버렸고, 이것은 투쟁과정에서 사측의 이데올로기 공세(이른 바 “우리는 한가족 논리”, “폭력에 대한 화해 제스처를 통한 회유”, “고용에 대한 협박” 등)가 먹히지 않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조합원들은 ‘7.27을 잊지 말자!’ ‘끝까지 단결해서 민주노조 사수하자!’라는 구호를 투쟁발언이나 단합대회, 간담회 자리에서 가장 많이 강조했다.
- 돌이켜 판단해 보면, 현장사수 투쟁의 단호한 결의가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끝까지 혼연일체로 투쟁과 조직을 이어가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 근거를 들어보면, SJM 조합원 분포를 보면 여느 금속 중견 사업장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평균연령은 40대 중,후반으로 계속 노령화되고 있고, 직·반장들의 상태 또한 튼튼한 것은 아니다. 취약부서(식당, 전기, 공무과, 계약직 신규 조합원 등)도 있었다. 사측은 초기 무력진압과 휴가기간에 일정정도의 조합원을 이탈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1996년 한 달여간의 파업 투쟁 때 조합원 50%이상이 현장 복귀한 경험이 있음) 그러나, 7.27 야만의 새벽을 목도한 조합원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데로 나아갔다. 직ㆍ반장 조합원들, 정년퇴직을 앞둔 고참 사원들, 아주머니 조합원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그 폭력의 현장에 없었다면 끝까지 이탈하지 않고 같이 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측의 포섭 전략의 파탄을 의미함)
○ 비무장․ 비타협 저항을 할 것인가? 무장을 할 것인가?
- 기존의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보면, “직장폐쇄와 용역깡패 투입 -> 조합원 생계 불안과 고용불안의 공포 극대화 조장 -> 조합원 전망 상실(패배감 조장)과 개별복귀 -> 회사 정상화로 이어지며 패배해 왔다. 현장투쟁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공포를 이겨내고 흔들림 없이 가는 것이다. (공포를 이기는 것은 적개심이 아니라 자부심! 이것을 끊임없이 증폭시키는 것이 승리의 열쇠)
- 특히 기존의 대응이 지엽적인 공장탈환을 중심에 둔 방식을 넘어서 ‘역포위 전략’으로 대응해야 함을 공유함.(쌍용차의 경우는 노조의 공장점거와 사수, 사측과 정부의 고립포위전략의 형태)
- 직장폐쇄와 용역폭력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우리의 무기는 정당방위적․ 방어적 물리력이 아니라 철저한 채증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로 목격하는 야만을 사회가 동일한 눈과 귀와 감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음. 실제 채증조도 배치했고 이에 따라 우리는 저들의 폭력에 대한 풍부한 영상과 사진을 확보했고, 이를 언론사에 최대한 알리면서 초기 대응에서 명분과 여론에서 성공적으로 대응했음. (쌍방폭력의 시비가 없음, 탄압의 빌미를 사전에 철저히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됨)
- 용역깡패 집단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기습적 폭력만행을 대하게 되면 여러 가지 걱정과 현실적인 고민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싸운다고 지킬 수도 없는 공장인데 괜히 사상자만 나오게 되어 사기가 떨어진다.” “같이 싸우려면 무기를 들게 되고 폭력이 동반되는데 그럼 고소고발로 이어지고 ‘짜고 치는 고스톱’인 관작업에 의해 우리 지도부만 구속되는게 현실 아닌가.” “이런 걸 고려해서 저항하지 말고 거점을 옮기고 장외투쟁을 하자.” 등등 여러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지회와 조합원들은 현장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고 비무장의 완강한 투쟁을 선택했고 그에 따른 제반 대응태세를 갖췄다. 실제로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목장갑과 마스크만 착용하고 온 몸으로 용역깡패와 맞섰다. 채증조 강화, 전직 임원들과 선봉대의 헌신적인 투쟁이 두 시간이상 진행됐고 현장을 지켰다. 실제로 조합원들은 스스로도 “할 수 있겠나 생각했다. 그런데 전체 조합원이 모이고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고 평가하고 이것은 조합원과 간부 모두가 일치하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4. 화려한 휴가 투쟁(7/27~8/5)
○ 금속노조 대부분의 사업장은 사실상 9일간의 휴가기간에 들어갔다. 게다가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 있는 형국이었다. 사측의 전략은 이러한 정세조건을 미리 고려하면서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사측은 조합원들에게 “금속노조 별거 없다. 너희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연대도 못할 것이다. 사측의 품에 안겨라 그러면 살려주겠다.”는 논리로 극도의 공포를 조장하면서 포섭할 대상을 미리 정해 놓고 휴가기간 중 개별복귀자를 늘이면서 초기 기선을 제압하고 이후 내부 조직력을 고립 ․ 붕괴시키는 작전에 대해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휴가기간 중 지부-지회의 초기대응은 향후 투쟁의 향방에 있어서 중요한 국면이라고 판단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①지부-지회로 이어지는 조직체계의 정비 ②조합원 조직력의 그물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것 ③야만의 새벽을 사회․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①지부-지회로 이어지는 조직체계의 정비
- 경기지부는 집행위원들을 직접 현장에 파견하여 선전과 언론, 조직, 투쟁, 정치권 대응에서 지회와 단일한 체계로 움직여 나갔다. 이는 소통구조와 투쟁 전술의 판단에 있어서 일체감을 높여나가는 단초를 마련했다.
- 집행위 차원에서의 SJM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투쟁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있어서 ‘민주노조운동의 명운을 걸고 승리하자’는 결의를 도출했고 휴가 이후 빠르게 운영위 차원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전조직적 연대투쟁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②조합원 조직력의 그물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것
- 2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사측의 공작과 회유책에 대응한다는 것, 조합원 개별적 성향, 사측과의 인맥관계의 취약점, 생계압박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는데 핵심적 조직체계는 분임조 활동의 극대화다. 이는 인지콘트롤스 직장폐쇄 철회투쟁 때도 확인된 바 있다. SJM지회도 이에 대해 사전 조직화를 거쳤고, 휴가기간 중 분임조 조직체계를 재정비하였다.(10명 당 1인의 조장 24개 조, 8개조를 ‘희망․ 연대․ 투쟁’의 3개 팀으로 묶어 팀장체계로 보고체계를 정착시켜 나갔다)
- 또한, 선봉대를 중심으로 규찰대를 확대하여 1,2,3공장 규찰을 강화하였고 이후 아산 창고 바이벡 제품에 대한 감시체계로 까지 사측의 동향과 정보를 파악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3공장 기계반출 저지, 사측의 불법활동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주는 효과도 있었다)
-카톡 등 SNS망을 구축하여 소통체계와 비상연락, 사측의 동향 등을 공유하면서 적극적인 여론전까지 조합원 스스로 하게 되었다.
- 촘촘한 그물망의 분임조 활동은 매일매일 상황을 공유하게 되고 분임조별 조합원들의 상태와 문제점을 지도부가 상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조합원을 여행을 보내주면서 배려하기도 하였다. 조합원들은 서로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서로를 조직적으로 배려하였다. 사측에 포섭된 간첩이 조합원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조직적 이탈을 위한 목적으로 암약하기도 했으나 단결력이 높아짐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는 조합원까지도 지도부가 파악하고 해당 조에서 대처하면서 포기하고 혼자 복귀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③야만의 새벽을 사회․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다.
- 우리는 회사가 7월 27일 새벽에 한 짓을 알고 있다!
- 경기지부는 휴가기간 중 여론전을 극대화하여 SJM사태를 사회․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어 가고자 사활적으로 대응했다. 실제로 사측의 ‘야만의 새벽 작전’이 있은 다음 날부터 여론이 들끓었다. 조합원들의 영웅적 투쟁이 바탕이 되어 야만의 새벽 당일 벌어진 ‘용역폭력 장면’과 ‘경찰의 수수방관’의 구체적 사실과 동향, ‘112 사건 신고’ 상황 등 ‘회사-컨텍터스 용역깡패-경찰’로 이어진 모든 폭력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객관화(일반화․ 보편화)시켜 여론전을 극대화 하면서 투쟁 초기에 정당성과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고, 휴가기간 중 방송 3사의 동영상 상영으로 이어졌다.
- 지부-지회로 이어지는 언론대응팀이 곧바로 꾸려졌고 대단한 활약이 펼쳐졌다. 이는 여느 투쟁과 다른 점이다. 이 점은, 노조가 목적의식적이고 주도적으로 언론과 정치권을 향해 발빠르게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만의 새벽’에 당당히 맞선 조합원들의 피 값이 철저한 채증으로 쌍방폭력논쟁과 같은 시비도 없었고, 용역업체와 경찰의 직무유기, 회사의 사전지휘 등 모든 상황을 드러내는 근거들이 노동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상황에 따른 보도자료를 작성, 배포하면서 초기 여론전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증폭되는 쟁점화가 이루어졌다. 여론작업이 얼마나 오래 갈까?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휴가기간과 올림픽 기간이라는 사회적 악재는 기우에 불과했다.
- 주체의 정보력이 사측의 모든 상황을 압도했고, 지역연대의 움직임도 빠르게 구축되어 나갔다. 7월 29일에는 국회에서 폭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민주노총, 금속노조, 야당이 함께 열었다. 7월 30일, 수원지방검찰청 안산지청 앞에서 컨택터스, 회사, 경찰을 고소하는 기자회견에는 20명이 넘는 기자들이 취재열기를 보여 주었다. 야당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노동부 안산지청에 불법폭력과 불법대체인력 사용 등에 대한 항의 방문을 했지만 이채필 노동부 장관은 30일 국회환노위 의정질의에서 회사의 직장폐쇄가 불법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주장을 했다. 직장폐쇄가 불법이라면 당장 현장에 돌아갈 수 있지만 노동부는 이후에도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일, 야당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환노위와 행안위 의원들은 현장진상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진상조사과정에 기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조직했고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들은 언론에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 과거의 산업현장의 폭력에 비해 언론들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언론대응팀은 집단폭력에 초점을 맞춘 단순한 사건보도에 대한 한계를 뛰어 넘을 기획보도를 고민했고, 그 바램은 현실이 되어 공중파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한겨레신문의 기획보도와 그것이 알고 싶다, 2580, 취재파일, 추적60분 등 방송사들의 기획보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 언론보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적극적으로 노동부의 직무유기와 비호, 회사의 폭력지휘 등 노조가 판단한 타겟으로 방향을 맞추도록 적극적인 주문도 아끼지 않았다. 상황은 여름휴가가 지나자 청문회와 국정조사 요구와 같은 더 확장된 방향으로 내달리고 되었다. 이윽고 “힘 있는 자들의 문제를 사유화(私有化)해서 감추는 수법은 힘없는 사람의 문제를 사회화해서 드러내는 정당방위 앞에 낱낱이 폭로”되기 시작했고 SJM 노동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 최초의 언론 보도인 스페셜경제라는 인터넷 언론은 “용역깡패 수백 명, SJM지회 조합원들 집단테러”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는 등 용역깡패의 폭력과 노동자의 희생 장면이 적나라하게 보도되게 되었다. 실제로 SJM 조합원들이 현장복귀 시까지 1110개의 관련 기사가 생산되었다.
- 초기 발 빠른 여론전의 승리는 정치권과의 소통까지 확대되어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가 직접현장에 달려 왔으며 SJM 문제는 언론을 통한 사회화, 정치권과 공조를 통한 정치쟁점화에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쌍차, KEC, 유성문제 등을 청문회로 끌고가는 동력으로 확대, 작용하게 되었다.
5. 살아나는 ‘진짜’ 연대기풍 ; 경기지부 사업장 철야농성 시작(8/8~9/25)
- 경기지부는 2010년 6기부터 지역연대의 복원이 핵심이라는 점을 내걸고 꾸준히 연대를 강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왔음.
- 경기지부는 휴가가 끝난 뒤 곧바로 열린 운영위(8/6)에서 휴가기간까지의 SJM 상황을 공유하면서 철야농성을 결의하였다. 각 지회의 상황과 조직력 상태 등 조건은 달랐지만 조합원 전체가 참여하는 사업장에서부터 철농은 확대간부가 맡고 조합원들은 3시간의 농성프로그램에 결합하는 사업장, 물품과 지원금을 자발적으로 모아 오는 사업장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별사업장 조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회, 분회들의 노력이 계속됐다.
- 민주노총 지역지부와 경기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등의 자발적 농성결합이 진행되었고, 금속노조는 중집회의를 통해 각 지역지부와 기업지부들의 순환철농을 결합할 것을 결의하여 참여하는 등 SJM 앞 농성장을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이 더 크게 확장되는 계기로 작동했다.
- ‘SJM 공장 주간에는 지회 조합원들이 지키고, 야간에는 경기지부 조합원들이 지킨다’는 목적으로 진행된 철야농성은 8월 하순 15호 태풍 볼라벤이 닥칠 때나 비바람에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농성프로그램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 강화되어 운영되었다. (심리전-규찰시 선무방송 5분에서 30분으로 확대, 여론전, 규찰조 운영, 농성참가자 교육프로그램 등)
- 철농 초기 왜 투쟁 주체는 철농을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경기지부는 SJM 조합원들이 튼튼하게 조직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해서 지치지 않고 다양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했고 이견에 대해 설득해 나갔다.
- 이 철야농성은 SJM 조합원들에게 심리적 안정은 물론이고 자기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지부 전체 사업장이 지지․ 엄호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으며 금속노조에 대한 불신을 불식시키고 우리 조직, 나의 조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또한, 철농을 진행하면서 지회 사업장들의 지부 중심성과 구심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SJM투쟁은 사업장 전체 조합원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그 결과 운영위원들의 100만원 기금 결의와 조합원 매달 2만원의 기금을 결의하게 되었으며 지부 독자파업을 하게 되었다. 사업장 임․ 단협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부투쟁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 8월 초 대체인력이 불법이라는 노동부의 발표가 있는 다음 날부터 지회 조합원들은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불법대체인력에 대한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경기지부는 철농 시 출퇴근 대체인력에 대한 저지투쟁을 실천하였다. 실제로 8월 7일 11명의 남아공 해외 대체인력이 철수하였으며, 8월 14일에는 파견업체 대체인력 60여 명도 완전히 철수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사측은 8/13 기업노조 설립하고 노동부에 접수하면서 지부와 지회를 갈라치고 지회 지도부와 조합원을 이간질시켜 내부를 흔들려는 전술을 구체화하려 했다. 실제로도 기업노조 설립 전후에 집중적인 접촉 작업을 했다. 하지만 지회 조합원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킬 여유도 없었고 지부와 지회를 분열시키는 전략도 몸으로 하는 연대 앞에 무력화 될 수밖에 없었다.
6. 이데올로기 투쟁(여론전 포함)에서의 승리
- 지피지기(知彼知己)는 공포를 제거하고 승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회사가 무슨 짓을 벌일지 다 알고 있다”
- “모든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펜의 힘은 총보다 강하다.” 등의 격언은 SJM투쟁의 성패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대개의 경우 노동자를 공장에서 쫓아내고 고립을 심화시켜 전망을 상실하게 만들고 패배감에 휩싸여 굴욕을 참고 영혼을 빼앗긴 채 항복하면서 조직이 무너지는 패턴으로 투쟁이 패퇴하는 과정을 밟았다면 우리는 사측에 대한 ‘역포위고립화 전략’으로 맞섰다.
- 수성전이 아닌 공성전에 있어서 여론의 압도적 우위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적을 알아도 적이 너무 강하거나, 아군의 태세가 준비되어있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지피지기를 하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지혜지만 그전에 적을 알고 대비하게 되면 공포에서 벗어나 이길 수 있는 길을 도모하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먼저다. 그런 측면에서 지부와 지회는, 회사가 벌일 일련의 노조파괴 공작을 미루어 예측하고 대비하면서 일전을 준비했고 사태가 전개되면서 이데올로기 투쟁과 여론전에서 사측을 압도할 수 있었고, 조합원들의 조직력을 굳건히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무한 신뢰를 획득하게 하였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였다.
- 사측의 노조무력화 준비 및 현장통제 강화(도표 참조) 프로그램에 대해 지부와 지회는 사전 대비태세를 갖춰 나갔다. 조합원 교육을 통해 사측의 2세 경영세습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가동할 것이라는 예상과 그에 따른 준비태세를 갖춰 나갔으며 “기업이 살아야 노조가 산다.”, “고용이데올로기” “노조파괴 시나리오”들에 대한 의식화 교육과 토론을 해 나갔다. 탄압에 대비한 정신무장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들을 강화해 나갔다.
- 소식지의 지속적 발행 ; 활화산(7/28~8/5 8회) 해방누리 통합 소식지(8/6~9/27 39회)
; 지부는 야만의 새벽 다음 날인 7월28일부터 9월27일 조합원들이 현장 복귀 한 날까지 총 47회에 걸쳐 소식지를 발행하면서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알려 나갔다. 또한, 전체 사업장과의 투쟁상황을 공유하였다. 소식지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전략적 판단과 그에 따른 투쟁 전술의 방향을 잡아 나갔으며 사측을 압박해 나갔다.
; 소식지를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초기 야만의 새벽의 대대적 폭로 -> 컨텍터스 용역깡패의 폭력 쟁점화 -> 사측의 사전 노조탄압 기획 폭로 -> 노동부, 경찰 책임 추궁 -> 민00이사 구속 촉구 -> 직장폐쇄의 사전 기획의 불법성 부각(대체인력 불법 판정 이끌어 냄) 8월 말 민00이사 컨텍터스 책임자 4명 구속 -> 9월부터 공세적 대응과 교섭시도』등 투쟁의 흐름과 목표, 요구 사항 등에 대해 기획된 방향으로 전체투쟁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을 생산하면서 투쟁방향을 공유해 나갔다.
; 사측의 유인물, 기업노조의 선전물, 수시로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된 문자메시지, 가정통신문에 대한 대응도 압도적 물량과 내용의 구체성, 정당성을 확보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조직적으로 해 나갔다.
; 가령 문자메시지 대응은 발레오 만도와 SJM 사측의 문자메시지 내용을 비교 분석하는 대자보를 작성 부착하고 조합원 스스로 대응하도록 했으며,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지 않고 분노와 결속력으로 작동했다.
; 사측은 총자본을 동원해 엄호세력을 확보한 기반위에서 관작업에 근거해 노동부를 앞세워 ‘노조 파업은 불법, 직장폐쇄는 합법’ 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조합을 흔들려 했으나 전략적 판단에 기초한 여론전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지부-지회의 쟁점화 투쟁으로 완전 무력화 되었고 불법 대체인력은 투입 2주 만에 철수하게 되었다.(사측의 대체생산에 대한 타격으로 이어지고 관리직, 파업불참자 고립감, 심리적 불안이 증폭되어 가는 계기가 됨)
; 사측, 경총, 보수언론 등의 역공에 대한 대비도 하였으나 고립을 자초한 사측이 이렇다 할 대응력을 상실하였다.
- 가족대책위 가세로 여론전 우위 탄력
; 7월 29일 가족 모임을 시작으로 가족대책위 활동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부상자 병문안을 시작으로 조합원 야유회 및 식사 지원 등 소박하게 활동한 가족대책위는 조합원 내부에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고 밖으로는 여론전에 있어서 대단히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 또한 사측의 심리전에 맞대응하는 팀플레이도 적극적으로 펼쳐 파업불참자에 대한 문자메시지 발송, 민00이사에 대한 공세적 항의전화 시도와 직접통화, 파업파괴자에 대한 항의 전화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가족대책위 명의의 소식지도 6차례 각 가정에 발송하면서 사측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무력화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연대문화제 등 큰 투쟁에 있어서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을 연대단위들에게 보여주면서 사기를 붇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 실제로 대부분의 투쟁사업장에서 가정문제와 생계문제로 곤란을 겪고 이탈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SJM에서는 대부분의 조합원 가족들이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빠르게 공유되었고 가족대책위 활동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응원하였다.
** SJM 지회의 구성원들은 지역에서의 연대활동, 민노당 시절의 지역 정치활동 경험 등 다양한 사회활동들이 지속적으로 되어 왔고, 내부적으로도 조합원 간의 다양한 서클 활동, 소모임이 활성화 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생활속의 조합활동 경험으로 축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의 조합원 간 교류, 가족 간 자연스런 유대감 들이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축적되어 온 경험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가정에서의 아내들도 다양한 사회활동과 노조 경험들이 축적되어 온 측면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7. 연대단위와의 공조(정치권 포함)에서의 관점
- 휴가기간 중 ‘야만의 새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휴가기간이 끝나자마자 다양한 단위의 연대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안산지역 공대위가 꾸려졌고, 경기지역 지원대책위가 움직였다. 기자회견과 지원활동에 필요한 물품 전달, 점심연대, 집회와 문화제 때의 다양한 역량을 집중시켜 문화제와 집회투쟁을 풍부한 형식과 내용을 담아내는 역할을 해냈다. 정치권 중 통합민주당이 진조위를 꾸리고 환노위 차원의 용역폭력 문제로 정치쟁점화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 경기지부는 다양한 단위에서의 연대활동 동참에 대해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열린 자세로 대했다. 다만 중재단이나 교섭형식을 만들어 조합원에게 무언가 기대하게 만드는 심리를 철저히 차단하려고 했으며 조직과 투쟁이 훼손되면서 벌어지는 상층 중심의 교섭력과 정치적 행보를 경계하면서 조합원과 상황을 공유했다.(해결사식 접근에 대한 경계) 아울러 사태해결의 열쇠는 ‘노조-지부-지회로 이어지는 교섭과 투쟁의 주도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 하지만 연대 확장의 질적인 측면에서 경기지부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대단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부족한 면이 있었고, 투쟁승리의 소중한 경험을 더 많은 단위가 조직적으로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단계 진전되는 지역연대운동의 경험이 축적되도록 하는 방향으로의 사고가 부족했다는 것은 이후 지역총전선을 구축해 나가는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8. 교섭과정과 교섭방식(형식)에서의 평가
- 지회와 지부는 청문회(9/25)를 여야가 합의한 후 국면전환과 사태해결을 위한 전략적 판단을 하였고 공세적인 교섭재개 전술을 확정하여 언론에 사실을 알리면서 사측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9월12일 직장폐쇄 후 첫 교섭이 이루어졌다. 초기에 사측은 업무방해, 사측 컴퓨터 분실 등의 이유를 들어 “지회의 공식사과가 있기 전에는 어떠한 교섭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청문회를 넘긴다.”, “추석 전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피력하며 지회를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했으나 지회의 공세적 교섭요구 전술과 투쟁의 의미가 확대되어 나가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느낀 사측은 마침내 굴복하여 청문회장에서 위로금을 포함한 11개 조항에 합의하게 되었다.
- 투쟁에 있어서 금속노조는 직접결합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으며 큰 일정을 보면서 전국 간부집결투쟁 등을 진행했고, 언론대응에서 금속노조가 지회와 지부보다 포괄력이 넓다는 점에서 보도자료 등 여론 작업의 내용은 지부에서 작성, 노조 명의로 배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흐름은 교섭국면속에서도 다소 혼란이 있었으나 현장요구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살리는 방식을 견지하였다. 교섭에서도 지회가 직접교섭의 주체가 되고 지부는 간접교섭, 노조는 이를 포괄적 지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 이윽고, SJM 조합원들은 직장폐쇄 2달 만인 9월 26일 공장 문을 열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직장폐쇄 철회와 회사의 사과, 단협해지 철회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계약직 정규직화와 위로금 지급” 등 지회의 요구는 모두 관철되었다. 단협무력화 공세의 상징적 의미라 볼 수 있는 계약직 현장 노동자의 ‘정규직 합의’와 7.27일 폭력만행으로 빚어진 부상자 치료비를 포합한 ‘위로금 지급’ 등 11개 항에 대한 합의내용은 전적으로 조합원 총회와 분임조 토론을 통해 의견을 수렴한 결과를 기본으로 한 내용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9. 연대투쟁과 지회 조직력의 극대화
- SJM투쟁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굵직굵직한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과 다양한 연대형식이 공장 앞을 춤추게 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실천이 가능하게 됐는지, 이러한 연대투쟁이 위력을 발휘했는지 밝혀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 대개의 연대투쟁은 상황 발생에 대한 즉자적 동원 방식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회성 집회에 그치거나 과정의 빈약함에 비해 일정과 지침으로 형식적이거나 행사 중심의 효과 이상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 하지만 SJM투쟁 과정을 보면 상급 단위의 투쟁 배치와 연대단위의 기자회견을 비롯한 다양한 실천들이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는 지회 조직력의 확고한 유지와 투쟁의지의 주체화가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실천과정을 중심으로 연대를 확장해 온 전술적 판단에 근거한 투쟁배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효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 몇 가지 중요한 투쟁을 보면 다음과 같다.
8/7 한국GM 지부, SJM 규탄 성명 발표(8/8일 지회 완성차 중심으로 한 홍보단 활동 시작) ; 이후 남아공 금속노조 성명서 발표, SJM 원청사 성명 발표로 이어짐
8/8 용역침탈 노동탄압 규탄 확대간부 결의대회 ; 철조망 걷어냄
8/11(토) 쌍차 해결 촉구, 용역깡패 규탄 전국노대(서울), 지부 1박2일 난장 문화제 투쟁
8/17 금속노조 4차 총파업
8/29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 ; 안산시청 -> 노동부 -> SJM앞 결의대회
8/31 민주노총 서울 상경투쟁 ; 민00이사 구속 소식 전달
9/1 회사 앞 난장문화제 ; 노동자 스타일 첫 등장
9/5 경기지부 독자파업 결의와 생계대출 월 2만원 결의
9/11 금속 지역지부 철농 결합 시작
9/13 지부 독자파업 ; 과천 노동부 앞 항의 집회
9/15 풀업운동 시작 ; SJM 조합원 안산전역으로 선전전 확대
10. 회사 고립화냐? 공장 탈환이냐? 의 판단에 대하여
- 경기지부와 지회는 주․ 객관적 상황과 투쟁 전개과정에서의 진단에 기초해 회사고립화 전략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이는 SJM투쟁의 특수한 상황속에서 판단한 것이다. 이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은 정당성과 명분을 확실히 틀어진 조건에서 사회․ 정치적 쟁점화의 확장에 대한 확신이 전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다른 투쟁에도 일반화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휴가가 끝난 후 지부 철농이 시작되고 상급조직 차원의 연대투쟁이 확장되면서 사측은 급격히 고립되었다. 공장 앞 투쟁과 철농을 하면서 연대 단위와 개인들의 물리력을 동원한 공장 탈환에 대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지회 조합원들 중에서도 이런 의견들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 지부와 지회는 이러한 투쟁전술에 대한 의견들을 존중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장탈환 전술보다는 조합원 조직력과 주체의 투쟁의지가 강화되고 있고 여론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조건속에서 회사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전술을 채택했고 그에 따른 준비를 강화해 나갔다.
- 물론 장기화와 생계 압박으로 지회 내부가 흔들리는 시점과 결정적 순간에서의 공장 점거 등 배수진을 치는 문제도 추석을 앞 둔 시점에서 고민을 가져갔지만 회사 고립화 전략이 승리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판단했고 SJM지회와 조합원들과도 공유하면서 일관된 전술을 우리방식대로 가져갔다.
- 자칫 초조해져 무장해제 된 상태의 회사와 공권력에게 빌미를 제공하면 정당성과 명분을 틀어쥐고 투쟁의 주도권을 유지해 나가는데 역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현실적․ 경험적 판단을 하고서 대처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자부심으로 조합원들은 똘똘 뭉쳐 모든 투쟁을 주체적으로 수행해 나갔으며 노예의 길의 거부하며 노동자의 길에 대한 승리의 확신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충남지부가 농성장을 찾았던 날 한 여성 조합원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노조가 아니라 전국의 민주노조를 위해 싸웁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한 노동자도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인생 다시 한 번 살고 싶다.” 가슴으로 말하는 조합원의 이야기에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미래와 전망이 있다. 우리는 울림에 답할 준비를 하는 것! SJM투쟁의 교훈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