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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립보 교회(빌 1:1-11)”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옥중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로마 감옥?)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과 감독, 집사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라면 바울이 옥에 갇혀있을 동안 도움을 준 일에 대한 감사와 방문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듣게 된 교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대략 신자들을 잘못된 교사들의 가르침에서부터 보호하고 위로, 권면하는 등,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 분파와 갈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상황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이 주를 이르고 있는데, 빌립보의 특수한 상황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본 서신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자칫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신약 말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건이라고 여겨집니다. 먼저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 성읍은 유럽 즉, 마게도니야의 첫 성이면서 로마의 직할 식민지였습니다. 원래 이 성읍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2세의 이름을 기념하여 명명되었습니다. 위치는 각자 소유한 성서지도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빌립보는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해상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럽의 첫 성읍이었습니다. 한편 부근의 유명한 판게우스 금광 때문에 더 유명해진 성읍이기도 합니다.
특히 로마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게 되자, 이 성읍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풀(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도로(군사적인 목적으로 닦은 도로, 현재로 비유하면 고속도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말의 기초되었던 도로임)가 생기면서 빌립보를 통과하였고, 성읍은 정치 군사적인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 제국 안에서 중요한 요충지로서 각광을 받기까지는 역사적인 내전에 따른 영향이 컸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줄리어스 시저를 살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국과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대 사이에 내전으로 옥타비아누스 쪽의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소속된 군인들의 정착지로 빌립보를 택했으며 정착한 그들에게는 로마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내전입니다. 이 전쟁에서도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었고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 아구스도로 부르게 됩니다. 그때부터 빌립보 성읍은 로마제국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의 군인들과 전역한 장교들, 그리고 로마로부터 추방된 안토니우스 휘하의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로마시민과 똑 같은 혜택을 부여했으며 비록 식민지에 거주하지만, 로마 시민권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시민들이 집단으로 정착한 성읍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자세한 정황은 사도행전 16장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빌립보서에서 군사, 정치적인 용어들이 자주 사용된 데에는 이러한 정황을 바울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이 지역이 헬라 문화와 동양 문화가 혼합된 형태의 헬레이즘을 답습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우상숭배와 성 문란 행위에 의한 타락한 성향을 보게 됩니다. 물질주의와 회의주의가 지배하였기 때문에 숙명론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개발이나 진취적인 성향보다는 타락과 숙명주의 그리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성술이 유행하였으며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우상들을 달래기 위해 마술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점점 신비종교를 낳게 되는 출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성향은 기독교가 전파되기에는 적합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행전 16장에 기록된 대로 바울의 이차 전도여행 때에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마게도냐 지방이 복음선교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자주물감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서 첫 예배가 드려졌고 유대인 중심이 아닌 순수 이방인들의 주축이 되어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하므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는 특별히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건너간 후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후원하였으며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 빌립보 교회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쓰게 된 까닭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추천하기 위함이었고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헌금과 편지에 대한 감사의 답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조언도 다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열광적인 유대 기독교주의자들의 잘못 가르친 할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본문을 다루면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1)”는 교회에 소속된 동역자의 관계가 권위, 우월성이 관계가 아닌, 겸손한 동등한 관계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사실 영적인 부자 지간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독 빌립보서 서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바울과 동등하게 디모데도 같은 종으로 기록한 것은 매우 산뜻한 느낌을 수신자들에게 전했으리라 봅니다.
한참을 배워야 할 디모데를 대 사도 바울과 같은 위치에 둠으로써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겸손을 배울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실제로 동등한 권위와 능력으로 객관적인 지위를 가졌습니다. 지금 교회의 담임과 부목사와의 상하 계급관계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종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성경대로 순종하지 않는 교회의 현황을 지목하였습니다. 고쳐야 할 당연한 일임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탓을? 세상의 환경 탓으로만 변명하는 것 자체가 성경 말씀 앞에 불순종이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종은 전혀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최저 수준의 노예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헌신적 봉사와 종속 개념을 확고히 하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전적인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목회자가 바로 그러한 종입니다. 다음에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 모든 성도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 내에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나 교회의 분란을 조성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편지를 쓴다는 의도입니다. 즉,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빌립보 출석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룩함에 동참한 자라야 붙일 수 있는 명칭입니다.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도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입니다. 즉,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자에게 해당된 말씀입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시지만, 역사적이고 인간적 존재 이상의 완벽한 분이심을 고백한 믿음 위에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그리스도라는 인식 안에서 죄사함의 역사를 현실로 받아드리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빌립보서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전하는 편지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물질과 영적인 문제를 관할하는 직분자들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지속적인 후원과 중보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그들을 수신자에 삽입한 것입니다.
2절의 안부 인사에는 은혜와 평강을 말하고 있는데 은혜는 초대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독교의 독특한 의미(헬라적)를 나타내는 단어이고 평강(샬롬)은 동양적(이스라엘) 사고의 틀에서 나온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한 인격체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처럼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유일신론을 가진 유대인 바울이 이러한 인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3-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와 같이 인사를 마치고 3절 이후부터 바울의 감사와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 개인이 빌립보 교인 개개인에게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왜?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3)” 감사할 까닭이 무엇인가? 복음 안에서 기도와 물질적으로 협력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만이 가능한 그들의 부족한 부분의 채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마음에 둔 그들의 부족함은 무엇인가? 결국 교회 내의 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상호 불신 해소 신뢰 등이 그것입니다.
좀더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면, 옥에 갇힌 바울의 현재 처지가 기뻐할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기쁨의 근원은 빌립보 교회가 주 안에서 견고히 서는 것이고, 서로 신뢰하여 분쟁을 끝내는 등의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염원이었고 그들이 바울의 권고를 받아드려 적극적인 호응을 보낸다면 바울의 기쁨은 배가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처음부터 적극 동참하여 믿음의 나눔을 실천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선교사 후원금 지원 등으로 복음 사역에 참여 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것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6)”를 통해서였습니다. 착한 일이란 그리스도의 죄사 함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즉, 회개와 연관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이루어주실 줄을 믿는 확신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충격이었고 상당한 믿음의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복음 사역이 좌초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감옥에 갇힌 일로 말미암아 믿음이 확산되었고 지속적으로 교회가 믿음이 성장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 가운데에 뿌리를 내린 신앙의 삶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확신과 믿음이 토대가 되어, 바울과 사이에 복음 안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교제가 바로 착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될 미래를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복음 사역의 목적을 공유하고 이루기 위해서 함께 노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7)”고 고백합니다. 그 뜻은 너희가 내게는 매우 소중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는 중요한 협력자들입니다. 이방인의 복음사역의 사명을 수행하는 바울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 사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 1:7)”
이방인의 복음 사역은 바울에게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 이 모두가 은혜이며 빌립보 교회가 다 함께 이 은혜에 동참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고난 당했고, 복음을 변명하는 상황이 그 사명으로 말미암아 가져오는 결과일 뿐, 그 자체가 복음사역은 아닙니다. 때문에 복음에서 고난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는 불가불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일을 은혜이며 재정적으로 동참한 그들도 같은 은혜를 입었다고 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감옥에서 복음을 변명한 것이 무엇인가? 복음은 설교로만 전파되지는 않습니다. 죄수의 몸으로도 복음은 전파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오해와 중상모략에서도 복음이 확정되었으므로 이에 따른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8)”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와 기쁨 그리고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들 안에는 분명히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속에 너희를 간직하고 있다는 표현은 바울이 얼마나 그들을 사모했는지를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기도의 대상임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기독교 복음의 참된 지식 즉, 사랑은 각자의 삶 가운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지식입니다. 또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모든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암묵적으로 그들이 아직은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에서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사랑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자와 맹목적인 사랑으로 또는 편협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양 호도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웃 개척교회에 대해서는 냉냉하면서도 수 억 만리 떨어진 아프리카 선교에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매년 수십 명의 신자들을 현지 방문시키는 경우는 무엇을 구하는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재정이면 이웃의 연약한 교회를 지원하고도 남을 성 싶은데,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혜롭게 모든 총명을 동원하여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탐욕과 욕구를 최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10)”
선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통찰력과 지각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성실과 정직,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실족할 만한 장애물을 만들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기도의 마지막은 의의 열매를 맺는 빌립보 교회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성실과 정직과 투명한 삶을 통하여 내면에서 우러나는 의의 열매가 익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품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즉 사랑과 기쁨, 평강 그리고 지식과 총명의 열매를 말합니다. 이 모든 선한 행실은 풍요로운 열매가 될 것이며 사실 생명과 선함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바울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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