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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플라자(DDP) 진경산수화전 견학
Dr. Gold
지난 3월 31일 4시 아리랑 작품연구반에서는 DDP에서 정선 등,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전을
10여명이 견학하였다. 이것은 5월 초까지 M1 이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겸제 (謙齋) 정선(鄭敾)
Dr. Gold
김양수 (청주대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정선(鄭敾, 1676~1759 A.D.)은 그의 할아버지가 양반 관직을 가졌던 양반 출신이었다. 인왕산 근처에서 자라서 서울과 한강의 그림을 많이 그렸고, 금강산과 동해지역을 유람하면서 많은 경치 그림을 남겼다. 한강 선유도 근처 그림에는 일제때 공사로 사라진 암봉과 선유도 경치 등이 잘 그려졌고, 한강 상류를 운항하던 송파진 배들에는 돗대가 하나?, 바다로 운항하던 마포나루 배들은 여러 돗대를 그리기도 하였다.
영조 18년(1742) 10월 보름 경기관찰사 홍경보는 동부지역 순시 중에 삭녕 우화정으로 연천현감 신유한과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였다. 시인과 화가를 모아 뱃놀이를 즐겼다. 정선은 이 장면을 <우화등선, 羽化登船>과 <웅연계람, 熊淵繫纜 > 두점 그림으로 그렸다. 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과, 웅연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장면을 각기 담았다. 여기에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 그리고 정선의 발문을 합해서 꾸민 서화첩이 <<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이다. 여기에서 연강은 임진강에서 임술년에 노를 저었다는 뜻이 되겠다. 소동파가 임술년(1082 A.D)에 호북성 황강에서 손님과 선유하고, <적벽부>를 남겼던 고사를 재연한 행사였다. 정선은 비록 서인-노론계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붕당을 떠나 남인계 관료의 요구에 따라 그 풍경을 그려 내었다. 정선의 발문에는 신주맥(신유한)이 부를 지어 기록하고, 내가 또 그림을 이어서 그려, 각자 1본씩 집에 소장하였다고 3본을 제작한 사실을 썼다.
그런데 위의 그림을 지금의 임진강 강안 풍경과 대비해 보면 상당히 모습이 달라서 정선이 암석 등을 과장법을 써서 그려낸 것이 파악된다고 한다. 겸제는 뱃놀이를 한 후에 마음에 그려두었던 풍경을 심안으로 형상화하여 그렸기 때문에 임진강 강안과 흡사한 지형, 지물은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그대로를 형상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화정(羽化亭)은 현재 북한 지역에 들아가 있다고 한다.
<<연강임술첩>>은 그동안 개인이 소장한 화첩이 하나 있었는데, 2011년 종로 동산방 갤러리에서 새로 한 본을 발굴하여 11월 <조선후기 산수화전>에 출품하였다. 크기는 53.5*44.4cm 로 당대에 표구된 작품이고, 회화적으로도 붓과 먹의 농담변화가 부드러워서 더 성공적이라고 하였다. 이번 간송미술관 전시에는 <<연강임술첩>> 그림은 물론 없었다.
어떤 비평가는 그의 가문 배경으로 음양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의 금강산도는 가운데 만폭동을 음으로 하고, 이를 에워싼 금강산을 골체미를 양으로 하여 음양을 조화시켜 그렸다고 한다.
그는 중국의 남종화를 계승하여 경치를 부감법과 앙부법 및 다각시점을 통한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고, 특유의 필묵 담채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조선화의 완성은 그를 중심으로 화단을 鄭敾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분류하게도 만들었다.
간송박물관에서 오래 연구한 최완수는 1993년 <<겸제 정선 산수화>>에서 겸제 정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천부의 자질을 타고나서 그를 절실히 요구하는 시대환경을 만나게 되었으니,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는가...북방화법의 근간인 筆描와 남방화법의 기본인 墨描가 음양 대비의 자연섭리에 띠리 한 화면에 조화를 이루게 한 화면구성법이나 임리(淋漓)한 묵법과 강경한 선묘가 보이는 뛰어난 필묵법에서 가위 남북화법이 이상적으로 조화되는 그 첫 성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니, 이는 고전을 바탕으로 한 대담한 청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선의 진경화법은 그의 아들과 손자인 정황(鄭榥)을 비롯하여 , 최북, 김유성, 이성린, 김응환, 김희겸 등, 18세기 주엽 전후 화원화가와 여항화가(閭巷畵家)들 사이에서 많이 애호되고, 통신사 화원들을 통해서 일본 에도(江戶)시대 남화가들의 화풍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심사정과 강세황, 허필 등의 문인화가들은 오파(吳派)나 안휘파 (安徽派)의 진경화풍이나 새로운 감각의 참신한 신흥양식을 더 선호하였던 것 같다. 특히 강세황은 정선의 진경을 다음같이 공격하였다.
그가 평소 익숙한 필법으로 마음대로 휘둘러서 돌모양이나 산봉우리의 형태에 상관 없이 한결같이 열마준법 (裂麻皴法)에 의해 함부로 그렸기 때문에 참 모습을 나타냈다고 말할 수 없다 (강세황. <<표암유고, 豹菴遺稿>> 권 4, 유금강산기, 遊金剛山記).
즉 실물경관을 통해 자득한 필법이라도 그 본연의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상투화된다면, 대상물의 참된 경관과 부합되지도 않고, 현현시킬 수 없음을 비판한 것이다.
강세황은 대상의 형태를 닮게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 사물의 '진경'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고 보고, 초상화에서처럼 실물과 머리털 하나의 오차도 없이 꼭 닮도록 그릴 것을 강조하였다.
화원들은 임금 초상화인 御眞을 그려서 왕의 고임을 받아 서울 근처 등, 수령에 임명되기고 하였다. 요새 청와대 전속사진사와 같은 구실로 그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수령으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화가들이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들의 후원을 받았던 것과 비견된다. 그런데 이러한 초상을 제작하는 데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므로 서양에서 근래에 사진술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는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있을 때, 서민 출신답게,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중매를 서기도 하였다. 지금도 연풍지방에서는 가끔 김홍도의 그림이 나오는 수가 있다고 한다.
◎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2009. <<겸제 정선>> 화집.
안휘준 1998, <미술, 회화><<한국사>> 35. 조선후기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김양수 등, 1995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
김양수 1998, < 조선후기 中人의 경기지방관진출
-守令案과 內鍼醫, 議藥同參先生案을 중심으로->《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제 4․5권 합본, 한국전통기술학회, 제 1호 121~165쪽에 게재.
김양수 등, 1999 <<한국 근대이행기 중인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신서원.
이태호 2011 <<조선후기 산수화전>> 동산방.
< 조선후기 中人의 경기지방관진출
-守令案과 內鍼醫, 議藥同參先生案을 중심으로->에서 화원 조항.
김양수
6. 畵員 出身
[표 20] 17세기이전 畵員出身 지방관(경기 등)
이름 | 시기 | 본관 | 타과 | 子/號 | 업 적 | 지방관 등 | 근친(부친등 | |
裵連 | 1425- | 호군 | 子 裵乾孟의 생진과 응시를 위해 家系위조 | |||||
李福長 | 1570-? | 여주 | 진사 | 景錫/杏村 | 현령(양천), 판관 | 同樞 精 | ||
李仁民 | 1590- | 경주 | 현감 | 司果 彦詳 | ||||
李震膺 | 1595- | 경주 | 현감 | 希哲 | ||||
李震白 | 1605- | 경주 | 현감,昭武功臣,掌樂主簿 | 希哲 | ||||
李伸 | 1610- | 여주 | 무과 | 현감,무관 | 復長 | |||
鄭琛 | 1610- | 한천 | /西谷 | 군수 | 栢壽 | |||
李壽長 | 1661-1733 | 천안 | 仁叟/貞谷 | 찰방,감목관 | 律科 德寬 | |||
李維和 | 1665- | /愚翁 | 현감 | |||||
鄭歚 | 1676-1759 | 광주 | 元伯/謙齊,蘭谷 | 금강산도, 인왕제색도 | 현령(양천). (청하, 자연, 하양)의 현감. | 時翊, 但 士大夫출신이어서 화원 통계에는 양천현령 하나만 넣음. |
[표 21] 18세기의 畵員出身 지방관(경기 등)
이름 | 시기 | 본관 | 타과 | 子/號 | 업 적 | 지방관 등 | 근친(부친 등 |
卞相璧 | 1730- | 밀양 | 무과 | 完甫/和齌 | 영조어진도사 1763,1773) | 현감 | 武科 雲瑞 |
鄭宗裕 | 1737-? | 신평 | 정조어진도사 (1787) | 감목관 | 생질은 金得臣 | ||
金弘道 | 1745-1816 | 김해 | 士能/檀園,丹邱,西湖,古眼居士, 輒醉翁 | 영조어진 | 찰방, 감목관, | 錫武 | |
張承業 | 1768-1815 | 대원 | 景猶/吾園,醉暝居士 | 감찰 | |||
李在官 | 1783-1838년이후 | 용인 | 元納/小塘 | 태조어진(1838) | 감목관 | 문인화풍, 李維新의조카? |
[표 22] 19세기의 畵員出身 지방관(경기 등)
이름 | 시기 | 본관 | 타과 | 子/號 | 업 적 | 지방관 등 | 근 친 |
金仁逑 | 1800 | 보령 | 감목관,別提 | 德鉉 | |||
李漢喆 | 1808-1880 | 안산 | 子常/希園,喜園, 松石. | 현종어진(1846),철종어진(1852),고종어진도사 (1872). | 군수 | 義養 | |
朴基駿 | 1810- | 밀양 | 驥叔/雲憔 | 순조어진(1830),헌종어진(1846),철종어진(1851, 1861),고종어진 (1872) | 군수 | 부친 敏煥. 子가 鏮頀 | |
趙重黙 | 1820- | 한양 | 德荇/雲溪,蔗山 | 헌종어진도사 (1846),철종어진도사(1861),태조어진도사,고종어진도사(1872) | 감목관 | 시문 잘하는 秀三의 손자 | |
韓應耆 | 1821-1892 | 신평 | 壽汝/小貞 | 찰방 | 惠主 弘遠 | ||
李容喜 | 1838-? | 전주 | 진사 | 起哉/雨亭 | 찰방,別提 | 籌學察訪東柱 | |
金季永 | 1840- | 김해 | 군수 | 尙鍵 | |||
趙錫晉 | 1853-1920 | 함안 | 應三/小琳 | 고종의 초상화를 그림 | 군수(영춘),현감 | 廷珪의 손자 | |
安中植 | 1861-1919 | 순흥 | 公立/心田,不不翁 | 1918년 서화협회 조직 | 군수(통진, 양천). |
[표 23] 조선후기의 畵員出身 지방관(경기 등)
官職 時期
| 守 令 | 察訪 | 監牧官 | 武官 | 기타 | 合 計 | ||||||
牧使 | 府使 | 郡守 | 縣令 | 縣監 | 不明 | 小計 | ||||||
16세기 | - | - | - | 1 | 2 | - | 3회/ 3명 | - | - | 1 | 1 | 5회/ 4명 |
17세기 | - | - | 1 | 1 | 3 | - | 5 / 5 | 1 | 1 | 1 | 2 | 10 / 6 |
18세기 | - | - | - | - | 1 | - | 1 / 1 | 1 | 3 | - | 1 | 6 / 5 |
19세기 | - | - | 6 | - | 1 | - | 7 / 5 | 2 | 2 | - | 2 | 13 / 9 |
합 계 | - | - | 7 | 1 | 5 | - | 13 / 11 | 4 | 6 | 1 | 5 | 29 / 20 |
조선시대 회화 미술은 圖畵署의 화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중인 계층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회화와 화가가 그다지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료의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肅宗․ 英祖․ 正祖 때에 御眞이 여러 차례 제작되고 英祖․正祖 등의 회화 애호에 따라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화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게 되었고 또한 화원의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중인 화원의 지방관을 [표 23]에서 보면 17세기에는 5명의 화원이 군수 1회, 현령 1회, 현감 3회 등에 이르고 그 밖에 찰방 1회, 감목관 1회씩 총 6명이 10회의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18세기에는 1명이 현감 1회를 지내고 찰방 1회, 감목관 3회로, 총 5명이 6회의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19세기에는 군수 6회, 현감 1회를 지내고 찰방 2회, 감목관 2회로, 총 9명이 13회의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화원 수령이 많이 나온 시기로는 19세기가 가장 많고, 17세기, 18세기 차례였다. 18세기에 화원 출신 감목관이 많은 점은 운관에서와 같이 주목되었다.
조선 후기에 대표적 화원인 鄭歚은 사대부의 집안이었지만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아 마침내는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선은 한성부 주부, 청하, 자연, 하양의 현감과 양천현령 등의 지방 수령을 지내면서 우리 자연을 소재로 한 금강산, 관동 지방의 명승과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를 그렸다. (그가 사대부집안 출신이므로 여기에서는 양천현령 한자리만 통계로 잡았다.) 金喜謙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 24년(1748년)에 어진을 改模할 때 참여하여 그 공으로 邊將 벼슬을 받고 사천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초상화의 傳神에 뛰어났다고는 하나 작품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午睡靑天圖〉가 있는데 암벽 안의 道人에서는 그의 뛰어난 인물 묘사력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중인 가계인 인동장씨는 30명의 화원을 배출하였고 그 중 張敬周는 도화서의 화원으로 초상에 뛰어나 英祖 20년(1744년) 英祖 御眞圖師에 참여하였으며 4년후에는 肅宗 御眞模寫의 主管畵師로 활약하였고 사천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인 金弘道의 경우 어진 제작에 동참한 횟수가 3번 있는데 1773년에는 英祖의 御眞과 王世子(正祖)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正祖 5년(1781년)에는 正祖의 御眞 翼善冠本을 그릴 때 同參畵師로 찰방을 제수 받았으며 1788년에는 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1791년에 正祖의 御眞 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특히 正祖는 '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 고 할만큼 그를 총애했다. 李在官은 화원으로 벼슬은 감목관을 지냈으며 1837년 太祖의 御眞을 模寫한 공으로 登山僉使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花鳥, 草蟲, 물고기 그림에 뛰어났으나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고 하며 현존하는 유작으로 〈美人寫書圖〉․〈午睡圖〉등이 있다. 李漢喆은 1846년 憲宗 御眞圖寫의 주관화사로 활약하였으며, 1852년 哲宗 御眞圖寫, 1861년 哲宗御眞 遠遊冠本圖寫, 1872년 高宗 御眞圖寫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초상 실력 때문에 趙重黙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고 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趙錫晉은 조선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이었으며 領選使 일행의 製圖使로 安中植과 발탁되어 1년간 톈진에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영춘 군수로 있던 1920년에 高宗과 純宗 전하의 어진 도사에 안중식과 함께 선발되어 화명을 드높였다. 1911년 李王家의 후원으로 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안중식과 더불어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 근대 전통 회화를 주도하게 되는 화가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어진 제작으로 당시 최고의 화원들이 선발되었고 이에 대한 공로로 지방의 수령직을 지냈으며 또한 임금의 회화에 대한 애호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화원들에게 지방의 수령직을 주어 그림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화원들은 명예직에서 벗어나 실직에도 임명되었으며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 조선후기 中人의 경기지방관진출
-守令案과 內鍼醫, 議藥同參先生案을 중심으로->《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제 4․5권 합본, 한국전통기술학회 1998, 제 1호 121~165쪽에 게재.
정선, 시중대
정선, 광진(廣津)
현재 광나루 다리 북쪽사진
정선, 통천 문암
정선, 박연폭포?
정선, 풍악내산 총람
정선, 단발령 망금강
정선, 장안사?
정선,
정선, 금강대
정선,
정선, 금강산?
국립 중앙의료원 마당 목련꽃
이하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畵風)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로,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였다.
진경산수화의 중심, 겸재 정선
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선대는 경기도 광주(廣州) 일대에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다가 고조부 연(演) 때부터 도성의 서쪽, 즉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정선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 인근이었다. 19세기 유본예(柳本藝)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유란동은 북악산 밑에 있다. 언덕 바위에 〈유란동〉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 이 동네는 청송 성수침(成守琛)이 살던 곳으로 꽃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金弘道, 1745~?)나 신윤복(申潤福, 1758~?)이 화원 출신이었던 반면에,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열 살을 지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일하러 가는 형편이었으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만은 잊지 않았다.
정선은 유란동에 살면서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느껴볼 수가 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정선은 40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721년(경종 1) 46세 때 경상도 하양(河陽)의 현감을 맡아서, 5년간 근무한 후 1726년(영조 2) 임기를 마쳤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성주 관아의 정자를 그린 <쌍도정도(雙島亭圖)>가 전한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의 유란동 집을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으로 이사를 했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의 대표작인 <인곡유거(仁谷幽居)>는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정선이 남긴 4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 1751(영조 27)년에 그린 것으로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순간을 포착하여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정선의 그림 가운데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많은이유는 그의 근거지가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138.2 x 79.2cm , 국보 제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이것은 영조대에 정선이 여러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729년 정선은 영조의 부름을 받아 한성부 주부가 되고, 1733년 6월에는 청하현감에 임명되었다. 청하현감 시절 그림으로는 <청하성음도>, <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이 있다.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郎廳)을 지냈으며,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경기도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정선은 65세부터 70세까지 현재는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관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금강전도(金剛全圖)>, < 인왕제색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79세인 1754년에 종4품인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거쳐 1756년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으니 관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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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좋은사진~ 많이 감상하고 갑니다.
요새 분들은 사진은 보아도 글은 읽지 않는데,
이것이 일본인과의 차이인가 합니다.
그래도 독자 한명을 건져서 다행입니다.
종교 간증을 위해서 깨달은 시집을 내는 분을 산에서 우연히 만나서,
한국에서는 책을 제값 내고 사려는 분이 거의 없으니, 초판은 우선 1,000부 보다는
500부를 내고, 잘 팔리면 더 찍을 수 있게 출판사와 계약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천부를 찍어서 약 600만원을 저자가 부담하느니, 저자의 손해를 좀 줄여 보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잘 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Dr. G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