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59)
제10권 오월춘추
제 33장 오월춘추(吳越春秋) (9)
초나라 이웃 사수(溠水) 상류에 당(唐)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고, 그 북쪽으로 또 채(蔡)나라가 있었다.
그 무렵 당나라 군주는 당성공(唐成公)이었고, 채나라 군주는 채소공(蔡昭公)이었다.
당성공과 채소공은 초소왕(楚昭王)이 천하 보검 담로를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잘 보이기 위하여 친히 영성으로 달려왔다.
원래 채소공에게는 아끼는 보물이 있었다.
양지백옥패(羊脂白玉佩) 한 쌍과 은초서구(銀貂鼠裘)라 불리는 갑옷 두 벌이 바로 그것이었다.
채소공(蔡昭公)은 축하의 뜻으로 백옥패 한 개와 은초서구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용했다.
그런데 초나라 영윤 낭와(囊瓦)가 그것을 보고 욕심을 내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 은근히 부탁했다.
- 저에게 백옥패와 은초서구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채소공(蔡昭公)은 낭와의 마음을 짐작하고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한편 당성공에게도 보물처럼 아끼는 명마 두 필이 있었다.
털이 비단처럼 희고 머리는 높고 목은 길며 다리는 날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숙상(驌驦)이라고 불렀다.
천하에 보기 드문 명마 한 쌍이었다.
당성공(唐成公)은 그 말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영성에 도착했다.
영접 나온 낭와(囊瓦)가 그것을 보고 또 탐내었다.
사람을 보내어 그 중 한마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당송공은 워낙 숙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낭와의 청을 거절했다.
채소공과 당성공이 초소왕과의 회담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영윤 낭와(囊瓦)가 궁으로 들어가 초소왕에게 참소하는 말을 올렸다.
"듣자하니 채(蔡)나라와 당(唐)나라는 비밀리 오나라와 내통하고 있다 합니다.
만일 두 나라 임금을 그대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오(吳)나라 앞잡이가 되어 우리 초나라를 들이칠 것입니다.
차라리 저들을 우리나라에 잡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초소왕(楚昭王)은 아버지와도 같은 낭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불손하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 나라 군주를 역관(驛館)에 가두었다.
겉으로는 호위 형식이었지만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기절초풍한 것은 본국에 있던 채나라와 당나라 신하들이었다.
먼저 손을 쓴 것은 당(唐)나라였다.
당나라 대부 중에 공손철(公孫哲)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초나라 영성으로 달려왔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조사한 결과 영윤 낭와의 농간임을 알게 되었다.
공손철(公孫哲)은 당성공이 갇혀 있는 역관으로 찾아가 말했다.
"말 두 마리와 종묘사직 중 어느 것이 중합니까?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낭와에게 숙상을 내주고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숙상(驌驦)은 천하의 보물이다. 초왕에게도 바칠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영윤에게 그것을 바치겠느냐?
더욱이 낭와는 욕심이 끝없는 비루한 자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저 말을 내줄 수 없다."
그러나 공손철(公孫哲)은 말보다 임금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종을 시켜 어인(圉人)에게 술을 잔뜩 먹인 후 몰래 숙상을 훔쳐내 영윤 낭와에게로 가져갔다.
"우리 주공께서 영윤의 덕망을 사모하여 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짐승이니 거두어주십시오.“
낭와(囊瓦)는 기뻐하며 궁으로 들어가 초소왕에게 말했다.
"신이 자세히 알아보니 당(唐)나라는 오나라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몇 번 서신을 왕래한 모양입니다.
당성공(唐成公)을 용서하시고 본국으로 돌려보내십시오.“
초소왕은 그 날로 당성공을 석방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당성공(唐成公)은 공손철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오늘날 호북성 수주시 북쪽에 가면 숙상파(驌驦坡)라는 곳이 있다.
옛날 당성공의 애마인 숙상 두 마리가 그곳을 지나간 일이 있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인 곳이라고 한다.
채소공(蔡昭公)은 당성공이 말을 바치고서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도 어쩔 수없이 은초서구(銀貂鼠裘)와 백옥패(白玉佩)를 낭와에게 갖다 바쳤다.
낭와는 그날로 초소왕에게 들어가 아뢰었다.
"채(蔡)나라도 당나라와 마찬가지입니다. 당성공을 돌려보냈는데, 채소공만 잡아둘 까닭이 없습니다."
마침내 채소공(蔡昭公)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영성을 벗어나기는 했으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한수(漢水)가에 이르러 강물에 대고 맹세했다.
- 내가 장차 초(楚)나라를 쳐서 이 분을 풀지 못하면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채소공(蔡昭公)은 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세자 원(元)을 진(晉)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나서 진정공(晉定公)에게 간청했다.
"초나라를 치겠으니 군사를 빌려 주십시오.“
이때 진나라의 정권은 위씨, 조씨, 한씨, 범씨, 순씨, 지씨(知氏) 등 여섯 귀족이 서로 나누어 갖고 있었다.
지씨는 순씨에서 갈라져 나온 일족이다.
진문공의 신하 순림보의 동생인 순수(荀首)의 시호가 지장자(知莊子)인 것을 보면 아마도 순수 대(代)에 이르러 성을 지씨로 바꾼 것 같다.
진정공(晉定公)은 각 일문의 당주들과 의논한 끝에 주왕실의 이름을 빌려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채(蔡)나라를 돕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주나라 왕은 주경왕(周敬王)이었다.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라는 내용의 격문이 중원 제후국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리하여 진(晉)나라를 필두로 송․ 제․ 노․ 위․ 진(陳)․ 정․ 허․ 조․ 거․ 주(邾)․ 돈(頓)․호(胡)․ 등(縢)․ 설(薛)․ 기(杞)․ 소주(小邾)․채(蔡) 등 18개국이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소릉(召陵) 땅에 집결했다.
이 중 진(陳)․ 허․ 돈․ 호(胡)나라는 초나라 속국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에 가담했다.
초나라가 주변 나라들에 대해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나라 범앙(范鞅)이 연합군 대장이 되었고, 순인(荀寅)이 부장이 되어 각 나라 군사들을 점검했다.
이때 총병력은 10만.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이대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초(楚)나라는 멸망하지는 않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이 소식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나라 군사 손무(孫武)였다.
그랬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치밀한 용간책(用間策)의 결과였던 것이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