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41,13-20; 마태 11,11-15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나셔서 가르멜회 수도 사제로 살아가셨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기도의 스승이시면서, 수도회의 개혁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제도 수행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개혁을 반대하는 수도자들에 의해 8개월간 감금되기도 하셨는데,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어둔 밤의 여정을 계속 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리시는데요, 성인께서 쓰신 ‘잠언과 영적 권고’라는 책에 실려 있는 성인의 일대기 중 일부를 발췌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도원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의 성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성화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이 성화를 외부 성당에 안치하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성화가 단지 수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공경과 찬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외부 성당에 안치한 후 어느 날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원하는 것을 내게 청하라. 내게 이런 봉사를 한 답례를 주고 싶다.’”
과연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무엇을 청하셨을까요?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당신께 청하고 싶은 것은, 당신을 위해 고통당하고 멸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일대기는 이렇게 전하는데요, “고통받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남은 생애 마지막 10개월 동안 그에 대한 중상모략이 퍼져 나갔다. 그가 맡고 있던 모든 직책은 박탈되었다. 원장은 간호 수사들로 하여금 임종이 다가오고 있는 그를 돌보아 주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은 생애 끝 무렵에 개혁 가르멜회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협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두 수사를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수사가 원장이 되었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원장은 병든 성인을 방치하였고,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1591년 12월 13일, 임종 직전에 성인은 원장을 불러 자기가 그간 원장과 수사들에게 폐를 끼친 데 대해 용서를 청하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장님, 여기 내가 입었던 성모님의 수도복밖에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디 청하오니, 애긍으로 이 성모님의 수도복을 저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원장은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고 자신의 냉혹함을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성인은 주님을 흠숭하고 싶으니, 성체를 모셔 오도록 부탁하였고, 밤 12시가 되자 “하느님께 영광! 나는 주님이신 하느님 앞에서 밤 기도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뒤 곁에 있던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숨을 거두셨습니다. 성인의 나이는 마흔아홉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고통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을 함께 겪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여전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데요, 특히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는 말씀은 이집트 탈출 때의 일을 연상시킵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이 이집트 탈출과 비교되고 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처지가 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어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료들에 의해 폭행당하고 감금되었을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감옥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놀라운 것은 그러한 폭행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겼다는 것입니다.
어제 대림 특강 때 거룩한 독서 실습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아마도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당신을 위해 고통받고 멸시받기를 원한다’고 청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까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내가 청하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