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전통 마을로 가장 유명한 곳은
안동의 하회 마을일 것입니다.
안동의 하회 마을은 살아 있는 전통 마을로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고
우리 나라의 옛 모습의 향취를 고향의 정으로 고즈넉히 느끼게 하였습니다.
자연 경관이 빼어난 천혜의 비경에 자리잡은 하회 마을은
향토적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장으로 소중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낙동강으로 둘러쳐진 하회 마을은 수려한 경관의 전통 마을로
강과 백사장, 그리고 사인암을 옮겨다 놓은 듯한 깎아지른 절경을 천혜의 비경으로 가졌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장으로
세계 가운데 빛나는 우리 전통으로 찬란한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로 유명한 곳 가운데 또 하나는
경주의 양동 마을입니다.
경주의 양동 마을은 눈 오는 날 절친인 김상식 목사님과 여행하였고
또 비오는 날 믿음의 아들 선대 형제와 멋진 여행의 추억을 남겼습니다.
20센티 이상의 눈 덮힌 양동 마을의 전경은 출사의 기쁨을 더 하였고
비 오는 날 양동 마을은 초가의 정서를 그윽히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회 마을은 평지형이지만
양동 마을은 앞에 형상강 줄기의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산지형 전통 마을입니다.
여러 개의 동산 그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환상적인 출사의 각이 나옵니다.
산기슭에 미로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은 돌담과 흙토담으로 집과 집의 경계를 이루었고
그 사잇길은 언덕 아래와 위를 옛 길의 향취로 느끼게 하였습니다.
양반과 천민의 생활 모습을 기와와 초가로 느낄 수 있고
높은 지대의 기와집과 낮은 지대의 초가집의 모습은 신분의 구분이 뚜렷한 옛 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였습니다.
양동 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가문으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이언적의 출생지입니다.
이언적은 삼묘에 배향된 인물로
가묘의 국불천위였으며, 종묘의 배향신공이었고 문묘의 문원공으로 동방오현이었습니다.
양동마을 인근의 옥산 서원과 독락당은
이언적을 봉사(奉祀)하고 배향하기 위한 사적지요,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전통 마을을 찾아서 출사를 다녔던 또 다른 마을은
고령의 개실 마을과 성주의 한개 마을이었습니다.
고령의 개실 마을은 출사의 동무였던 김병화 집사님의 고향이어서 방문하였고
함께 출사를 다니면서 성주의 한개 마을까지 탐방하였습니다.
개실 마을은 일신 김씨의 동성촌으로
김종직의 종택이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종직은 정몽주의 제자로
조선 성리학의 대가였고 유학의 꽃을 피운 동방오현을 낳았습니다.
성리학의 동방오현은
함안의 남계 서원에 배향된 정여찬과 대구의 도동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용인의 심곡 서원에 배향된 조광조와 경주의 옥산 서원에 배향된 이언적과
안동의 도산 서원에 배향된 이황입니다.
성주의 한개 마을과 고령의 개실 마을은
초가집이 없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성촌으로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한옥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성주의 한개 마을은 성산 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동성촌으로
한옥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오래된 돌담길은 출사의 손 맛을 감칠나게 하였습니다.
전통 마을의 탐방과 출사는
영주 선비촌과 소수 서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소수 서원은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 서원을 세웠는데
퇴계 이황에 의해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최초의 서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5대 서원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류성용과 그의 아들을 배향하기 위한 하회 마을 인근의 병산 서원과
이언적을 배향하기 위한 양동 마을 인근의 옥산 서원과 퇴계 이황을 배향하기 위한 안동의 도산 서원과
정몽주와 김종직의 성리학 적통을 이은 김굉필의 도동 서원이 있습니다.
도동 서원은 우리 고향 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초등학교 때 소풍가는 일순위 장소였습니다.
도동 서원의 은행 나무는
소수 서원의 500년 수령의 은행 나무와 쌍벽을 이루는 유서 깊은 서원의 은행 나무입니다.
도동 서원의 은행 나무는 소수 서원의 은행 나무보다
그 둘레가 굵고 가지가 무성하여 천년기념물적인 고유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영주의 소수 서원에서 느낀 교향 마을의 도동 서원은
참으로 동심어린 깊은 감회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소수 서원은 우리 나라 성리학의 비조 안향을 배향한 서원으로
학맥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향과 정도전을 배출한 소수 서원과 선비촌은
학문의 전당으로 옛 문헌의 보고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이 살아있는 선비 고을에서
유학의 학맥을 잇는 전통의 멋을 한껏 느꼈습니다.
보다 일찍 전통 마을의 체험은
서울의 경복궁과 남산 한옥 마을, 그리고 용인의 민속촌에서
믿음의 딸 선미 자매와 출사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으로
12×17=30p의 압축 앨범 세 권을 출사의 궤적으로 남겼습니다.
지난 날 출사의 열정은 스튜디오 사역의 희망을 열었으며
전원 갤러리의 꿈을 여전히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꿈의 전원 갤러리가 완성되면......
여수룬 언약문화 공동체의 오프라인 실체가 될 것입니다.
여행사를 통하여 늦가을 여행으로
고창의 운곡 습지와 전주의 전통 마을과 함양의 와인 동굴을 경유하는 출사의 투어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다양한 전통 마을을 탐방하였지만
전주 한옥 마을의 명성을 듣고 꼭 한 번 출사 투어를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여행사에 당일 코스로 좋은 상품이 있어서
전날 한 자리 남은 좌석을 급하게 예매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출사를 다녀왔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로 가는 길에
고창의 고인돌 공원과 운곡 습지를 경유하였습니다.
고인돌의 유적지로 유명한 고창에
고인돌 공원의 산고개 넘어 운곡 습지가 있었습니다.
운곡 습지는 우포 늪과는 다른 개념의 습지로
산의 넓은 저지대 계곡에 울창한 숲으로 밀림을 형성하였습니다.
숲의 밀림을 이루었지만 습지에서
데크길을 따라서 한 시간을 다녔지만 절반 밖에 관람하지 못하였습니다.
데크길 주변을 따라 사진을 찍으며
산약초가 있는가 유심히 살펴 보았으나 강원도의 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습지여서 당귀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당귀는 없고
토봉령인 망개와 산마, 그리고 노박 열매가 간혹 눈에 보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데크길을 걸으면서
하수오 줄기가 있는가 눈 씻고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습지의 밀림 숲을 데크길로 다니면서
몸에 익은 산약초를 찾는 것은 관람의 깊이를 더하였습니다.
손에 든 카메라는 습지의 그 모든 것을
디테일한 마음의 감각으로 모두 담았습니다.
고창의 고인돌 공원과 운곡 습지를 떠나서
두어 시간 만에 전주한옥 마을에 도착였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
그 동안 출사로 탐방하였던 전통 마을의 환상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와우! 인산인해의 인파......
피서철 해운대 해수욕장보다 더 많은 인파였습니다.
성탄 이브....동성로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인사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전통 마을의 재해석.....
전주의 도약과 비상, 그 자체였습니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먹거리 문화로 옯겨다 놓았습니다.
분명 전통 한옥 마을인데
한옥 아이템에 줄 서서 먹는 유명 맛집을 모두 모아놓은 듯하였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은
음식 문화의 혁신을 이룬 창조적 한옥 거리를 먹거리 문화의 집성촌을 만들어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전주 한옥 마을에서 모두들 저마다의 행복한 삶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한옥과 전통의 아이템으로 넘쳐나는 전주 한옥 마을은
한옥의 전통을 현대화된 소통과 공감의 문화 공간으로 창조적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에 있는 옛스런 사적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과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 장소인 전주 향교와
한국 최초 순교의 터 위에 1908년에 건립된 100년이 넘은 전동 성당이 있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은 일제시대 때 전주의 상권을 장악한 일본식 건축물과
선교사들에 의한 서양식 건축물에 반발하여
1930년대부터 전통 한옥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한옥 집성촌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주는 한옥과 일본식 건축과 서양식 건축의 문화가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기묘한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어느덧 전주 한옥 마을은 버킷 리스트로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함양의 와인 동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