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5] 이요한(李耀翰) - 하나님, 나의 하나님 6. 환란을 딛고 서서 - 1
1 ‘말씀’ 앞에 선 자는 한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의 대결이 말씀을 가진 자로 말미암아 벌어졌고 한순간 긴장을 풀면 사탄의 제물이 생기고 마는 것이었다.
2 나의 전도 행각은 짐을 챙겨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방랑자의 신세와 다름없었다. 남산동에서 삼덕동, 동인동으로 다시 남산동으로 옮겨 다녔다. 동인동 춘자(春子) 씨 집에 있을 때 남산동 교회 정동렬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다.
3 의처증이 심한 정동렬(鄭東烈)은 장로교 권사인 부인이 나를 따르게 되자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1953년 가을에 선생님께서 대구에 처음 오셔서 봉산동 교회에서 며칠간 머무르셨다.
4 그러시다가 그 해 12월 24일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당시 부산에 유효원 선생이 입교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찾아가셔서 20일간 강의를 해주셨다. 봉산동에서도 세 차례나 이사한 기억이 나는데 선생님께서는 두 번째 집에 있을 때 오신 것 같다.
5 또 그 후 대봉동에 교회가 있을 때 선생님께서 부산에 계시다가 오셨으며, 1954년 2월 9일 대봉동 교회에서 선생님 탄신 34주년 축하행사를 부산 식구와 함께 20여 명이 모여 거행했다. 대봉동에서도 세 차례나 이사한 것 같다.
6 그다음 선생님께서 용문산에 오르시기 조금 전에 계시던 집인 봉덕동 교회로 옮겼다. 집 옆에는 용두방천(龍頭防川)이라 하는 시내가 있다. 봉덕동 교회에서 옮긴 곳이 대신동 2층 집이었는데 선생님은 이곳에서 용문산으로 떠나셨다.
7 1954년 3월 25일, 강현실( 姜賢實), 김장근(金蔵根), 옥세현(玉世賢), 지승도(池承道), 정덕기(鄭徳基), 이석빈(李石頻) 씨와 내가 동행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김천역에서 두 사람씩 흩어졌는데 선생님은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용문산(현재 금릉군 어모면 능치동)에는 나운몽(羅霊夢) 장로가 집회를 하고 있었다.
8 선생님께서는 아래 마을에 계시고 나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윗동네에 가서 신도들과 좌담을 하였다. 천막에는 일반 기독교 신도들이 합숙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아침 식사 이후 예배시간이 될 때까지 신앙적인 여러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는데 여러 명이 나의 말을 듣고 예배에 나가지 않고 말씀에 취해 있었다.
9 그럴 즈음 청년들이 와서 내가 가지 않으면 몰아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광고까지 하면서 나를 내쫓았다. 마침 아랫마을에 내려와 있는데 임춘자(林春子) 집사가 달려와 형사들이 동원되어 잡으려고 하니 피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는 내려오고 형사는 우리를 잡으러 올라갔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용문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