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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川李氏 沙川齋舍
1. 유래 사천재사는 고려 말엽에 군기시소윤을 지낸 영천이씨 소윤공파(少尹公派) 파조인 이헌(李軒)공과 그 배위인 숙인 선성이씨(宣城李氏)의 묘제를 봉행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재사가 위치한 서삼리는 본래 예안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현리․사천리․이전리 등 3개리를 병합하여 ‘서면의 3개리’라는 의미에서 서삼동이라 불렀다. 모란마을은 서삼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예부터 산세가 아름답고 실개천이 산기슭을 안고 흐르며 고운 모래가 아름다워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렀는데,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이 냇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읍(揖)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야곡(也谷)이라고도 한다. 재사로 가는 길은 와룡면 감애에서 녹전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4km쯤 가면 서삼리가 있고 ‘모란입구’라 적힌 푯돌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300m쯤 가면 된다. 재사와 강당인 추원재는 동쪽과 서쪽에 조금 떨어져 있고 재사 건너편과 뒤편의 산록에는 소윤공과 배위의
모란 동구 근처 개울가의 화개석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재사 근처인 모란 동구에는 소윤공의 묘소는 재사와는 약간 떨어진 건너편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데, 좌향은 을향(乙向)이다. 봉분은 고려시대의 양식인 하방상원형(下方上圓形)의 형태로 평면은 전면이 폭 280㎝ 정도이고, 후면은 250㎝, 길이 550㎝정도이다. 봉분의 전면과 양 측면의 하단부에는 길이 170㎝, 높이 40㎝ 정도의 장대석을 놓아 직방형으로 구성한 후 봉분을 둥글게 조성하였다. 묘역은 흙과 돌 등으로 축대를 쌓아 하단, 중단, 상단의 3개영역으로 구획하여 석물과 봉분 등을 배치하였는데, 맨 하단의 폭이 130㎝ 정도로 가장 길고, 중단과 상단의 폭은 약간씩 좁아진다. 석물의 배치는 맨 하단부의 가장자리에 문관석 2기를 마주보게 배치하였고, 중단에는 가운데에 향로석을 놓고, 상단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좌측에 묘전비를 배치하고 가운데는 상석을 놓았는데 봉분과 상석사이에는 옛날에 있었던 비석의 대좌가 남아있다. 묘전비는 옛 비석이 마모되어 약 200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인데,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의 대좌와 사암으로 만든 비신과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약 2m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대좌는 가로 90cm, 세로 52cm이고, 높이는 외부에 드러난 부분이 10㎝ 정도이다. 비신은 가로 51㎝, 세로 22㎝, 높이 144㎝로 전면에는 해서체로 ‘高麗少尹永川李公之墓(고려소윤영천이공지묘)’라고 음각하였고, 뒷면에는 공의 세계와 행적을 새겼다. 배위인 선성이씨의 묘는 사천재사와 추원재의 뒤편 산중턱에 사향(巳向)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 이르는 길은 시멘트로 조성한 60개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묘역은 봉분과 비석, 상석, 향로석 등이 있는 상단부와 문관석 2기가 배치된 하단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부는 자연석으로 높이 120㎝ 정도의 축대를 쌓아 만들었는데 폭이 17m이고 길이는 240㎝ 정도이며 묘사 때 배례하는 곳이다. 상단부는 장대석으로 높이 80cm의 축대를 쌓아 조성하였는데 폭이 10m, 길이 2m이다. 석물은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묘전비가 자리 잡았고, 한가운데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있다. 선성이씨는 소윤공보다 앞서 타계하여 묘소도 먼저 조성되었는데, 묘터는 소윤공이 손수 잡은 터로 전한다. 봉분의 형태는 소윤공의 봉분과 비슷한 상원하방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소윤공의
선성이씨 묘소 부근에서 바라본 재사와 동구 봉분과는 달리 하단의 앞부분에만 장대석을 놓았고 좌우 측면에는 돌을 두르지 않았다. 봉분의 폭은 앞부분이 3m정도이고 길이는 약 5m이다. 묘전비는 돌의 재질과 양식과 크기 등이 소윤공의 묘전비와 같아 같은 시기인 신묘(1831)년에 함께 세웠음을 알 수 있는데, 소윤공의 묘갈명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2) 비의 전면에는 해서체로 ‘淑人宣城李氏之墓(숙인선성이씨지묘)’라고 음각하였고, 뒷면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淑人世系及子孫錄 已見於 考位碑陰, 辛卯 十一月 九日 立(숙인세계급자손록 이견어 고위비음, 신묘 십일월 구일 립)’ 이라고 새겼다. 재사의 주인공인 소윤공 이헌은 호가 낙은(洛隱)으로 고려 봉선대부 군기시(軍器寺) 소윤을 지냈는데, 묘갈명과 기(記)에 나타난 세계(世系)와 행적을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영천이씨의 계보는 고려 평장사인 휘 문한(文漢)에서 나와서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공의 5대조는 신호위대장군을 역임하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휘 대영(大榮)이다. 고조부의 휘는 득분(得芬)인데 전공판서를 지냈고, 증조부의 휘는 문경(文卿)인데 보승호군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송려(松侶)인데 이부시랑을 지냈고, 부친은 일충(日忠)인데 주부를 지냈다. 공은 고려의 운세가 끝날 무렵 영천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옮겨 잠시 예안현 사천에 머물렀다가 예안현 분천(汾川)으로 이거하였는데, 예안에 살고 있는 영천이씨는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배위인 숙인선성이씨는 합(合)의 따님인데, 공보다도 먼저 타계하여 사천촌 동쪽 기슭의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실(宗實)과 의흥현감을 지낸 파(坡), 한림 직제학인 오(塢)이고, 사위는 오원하(吳元夏)이다.
소윤공 내외분을 제향하기 위한 추원재 문헌상 전해지는 사천재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건물이 퇴락하고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몇 번의 중수가 있었는데, 재사의 초창은 15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1751년과 1788년에 기록한 중수기와 중건기에 따르면 소윤공의 상을 당하여 장자 파(坡, 생몰년 미상)와 차자 오(塢, 생몰년 미상)가 70세와 50여세의 나이로 묘소의 여막에서 삼년상을 마쳤는데, 재사를 임시로 창건한 것은 이 무렵이라고 한다.3) 그 후 소윤공의 손자인 봉례공(奉禮公) 효손(孝孫, 1404~1487)과 증손자인 흠(欽), 현손인 효절공 농암(聾巖, 賢輔)에 이르러서 재사의 규모를 더욱 크게 확장하고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하연공(賀淵公, 仲樑), 매암공(梅巖公, 叔樑), 간재공(艮齋公, 德弘) 등 후손들이 선대의 뜻을 따라 정성스럽게 재사를 수호하였다. 그러나 재사가 오랜 세월에 퇴락하여 1751년에는 후손들이 새로운 규모로 증축하여, 재실과 대청, 부엌과 주소, 마구와 창고를 합하여 총 23칸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이 재사는 불행히도 1785년 가을에 화재를 당하여 전소하였는데 후손이 힘을 모아 이듬해에 착공하여 3월에 대청(추원재) 8칸을 건립하고 나머지 건물도 4월에 상량하였으며 규모는 총 23칸이다. 그 후 건물이 다시 퇴락하여 강당인 추원재를 1992년에 새로 중수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현재 소윤공의 직계 계열에 속하는 재사는 모두 3곳으로 안동시 도산면 의일리에 있는 장자 파의 연곡재사(燕谷齋舍)와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손자 효손의 도곡재사(道谷齋舍), 예안면 신남리에 있는 현손인 농암 이현보의 자운재사(紫雲齋舍) 등을 들 수 있다. 소윤공을 비롯한 3분의 묘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거행되는데, 이 가운데 농암선생의 묘제가 가장 빠른 시간인 9월 그믐날 오전에 봉행되고 이어서 오후에는 봉례공 효손의 묘제를 지낸다. 묘제를 마치면 참제원들은 다음날인 10월 초하루날에 거행되는 파조 소윤공의 묘제를 위해 사천재사에서 1박을 하고 그날 오전에 파조와 배위의 묘제를 봉행한다. 오후에는 현감공 이파의 묘제를 지내게 되는데 묘사에 참제원은 30명 내외이다. 2. 건물의 구성과 배치 사천재사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문간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형태는 트인 口자형으로 전면에 一자형의 문간채를 두고, 뒤에는 ㄷ자 형태의 안채를 배치한 후 안채와 문간채 사이의 트인 부분은 담으로 막아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산자락의 기울기를 이용하여 전면에 앞에 약 70㎝ 높이의 축대를 쌓은 후 문간채를 건립하였으며, 안채가 들어설 곳에는 다시 85㎝의 시멘트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특히, 좌우익사 부분의 기단은 안채의 기단에 비해 30cm정도 낮아 안채 부분이 익사보다 솟아 보인다.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홑처마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춧돌 위에 각주를 세워 건물을 구성하여 하였다. 공간구성은 맨 가운데에 낸 1칸 크기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 크기의 광 2개를 배치하였고, 우측에는 2칸통 크기의 온돌방을 설치였다. 벽체의 구성은 광의 전면과 뒷면 바깥벽에는 널빤지를 대어 벽을 만들었고, 나머지 칸에는 시멘트벽 위에 흰색 안료를 칠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ㄷ자 형태의 안채가 보인다. 크기는 전면이 5칸이고 좌측면이 3칸 반 우측면이 3칸이다. 안채에서 좌측 익사가 우측 익사보다 반 칸 정도 큰 것은 부엌을 늘이기 위해 반 칸 크기의 가작을 달았기 때문이다. 공간구성은 전면에 3칸 크기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는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안방은 2칸 통방으로 이 가운데 1칸이 좌익사 쪽에 편입되었고, 바로 옆에는 1칸 반 크기의 부엌이 설치되었다. 대청의 우측에는 1칸 크기의 건넌방이 설치되었고 그것과 접하여 앞쪽의 우익사에는 1칸 크기의 부엌과 광이 어어 진다. 사천재사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공간은 간결하게 구성된 대청인데 대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높이 솟아있고 확 트여 있다. 대청의 마루는 우물마루로 구성하였고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으며, 벽면에는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넌출문의 바라지창을 설치하여 조망과 통풍을 고려하였다. 추원재는 소윤공과 배위를 제향하기 위한 강당으로 1786년에 중건되었으나 1992년에 다시 지었다. 건립 경과를 보면 중건 후 2백 여 년이 지나 체목이 썩고 강당 전체가 도괴(倒壞) 직전에 이르러서 1991년 종회에서 중수가 결정되어 그해 9월에 공사를 착공하였으며 공사비는 모두 5천3백 여 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지의 조성은 산자락의 경사면을 깎아 터 고르기 한 다음 건물을 앉히고 건물 주변에는 담장을 둘렀다. 출입문은 앞쪽에 내지 않고 우측 담에 내었는데 사주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전방에 추원재중수전지비(追遠齋重修顚趾碑)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비석은 건물을 중수할 때의 사실과 후손들의 성금록을 기록한 것이다. 추원재는 시멘트와 돌로 쌓은 높이 60㎝의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각주를 세워 건축하였는데 대청 전면의 기둥 2개는 원주를 사용하여 변화를 꾀하였다. 공간구성은 가운데 전면 2칸의 4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배치한 간결한 구조인데, 왼쪽 방은 2칸 통방이고 오른쪽 방은 1칸 크기이며 앞쪽에는 1칸 크기의 마루가 설치되었다. 대청의 전면 벽면에는 사분합분을 달고 뒷면에는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넌출문의 바라지창을 설치였는데, 사분합문은 필요시에 들어 걸쇠로 고정할 수 있게 하였다. 3. 기타 1) 關聯儀禮 (1) 墓祭 笏記 諸執事先就外位○贊者入就再拜○因就位○祝及諸執事入就再拜○各就位○陳設○執事設蔬果○參神主人以下皆再拜○降神○主人陞詣盥洗位○盥水○因詣墓位前跪○三上香○執事二人一奉酒注○奉盤盞○斟酒授主人○主人灌于地○俛○伏○興○再拜○因降復位○進饌○執事奉飯羹餠麵進于俎
行初獻禮 主人陞○執事酌酒授主人○奠爵○俛○伏○興○少退跪○祝進主人之左○跪○讀祝○主人跪○伏○興○再拜○因降復位
行亞獻禮 獻官陞詣盥洗位○盥水○因詣墓位前跪○奠爵○俛○伏○興○再拜○因降復位
行終獻禮 獻官陞詣盥洗位○盥水○因詣墓位前跪○奠爵○俛○伏○興○再拜○因降復位
行侑食禮 添酌○扱匙箸○主人以下皆俯伏○興○進茶○主人以下皆鞠躬○平身
行飮福禮 主人詣香案前○跪○祝取首獻盤盞之酒○授主人○主人飮訖○祝復虛盞于尊卓○俛○伏○興○降復位○撤匙箸○撤茶○辭神再拜○焚祝○主人以下以次出○祝及諸執事皆再拜而出
(2) 墓祭 祝式 顯先祖考 奉善大夫軍器寺少尹 府君之墓 伏以 功存始卜 澤流後裔 今當孟冬 霜露旣降 膽掃封瑩 不勝感愴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 尙 饗
顯先祖妣 淑人宣城李氏之墓 伏以 配德嗣微 毓慶昌後
2) 關聯資料 (1) 高麗奉善大夫軍器寺少尹洛隱公墓碣銘 【前面大字】高麗少尹永川李公之墓 【碑 文】高麗奉善大夫軍器寺少尹洛隱公墓碣銘 公諱軒姓李永川人也永之李系出高麗平章事諱文漢世襲簪冕有諱大榮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是爲公五代祖高祖諱得芬典工判書曾祖諱文卿保勝護軍祖諱松侶吏部侍郞考諱日忠主簿公之生卒年紀盖以世代悠遠累經兵燹文獻無徵祗以譜牃所載考之則公當麗末官奉善大夫軍器寺
소윤공 이헌의 묘소 少尹壽八十四墓禮安沙川越麓也字局辛坐之原嗚乎公生丁革命之辰潛光隱德不樂仕進爲遯跡自靖之計遍訪佳山水自永稅駕于禮安之沙川逮至曾玄赫世榮耀內外雲仍名賢相繼公之實跡泯沒雖若可恨天之所以報施於公者自有不掩而不朽者焉又何必深慨乎哉配淑人宣城李氏有諱元白之孫合之女先公沒始卜葬于沙川東麓亥坐之原有三男一女男宗實坡縣監贈參議塢直提學女吳元夏宗實二男可種可植俱无后參議有二男一女男孝孫奉禮贈參判誠孫女金有庸直提學有一男一女男凞良司正女權葺參奉參判有二男三女男欽縣監贈參贊鈞直長女朴有阜郡守南瑞雲縣監安從仁縣監誠孫一男仁堅進士司正有二男玉仝參奉銀仝展力副尉贈左承旨參贊有四男一女男賢輔知中樞號聾巖諡孝節立祠汾江賢佑習讀贈參判賢佐部將賢俊察訪女權謨直長有三男四女男賢弼忠順校尉賢祖賢哲司直女權甫均金長孫朴彦樑李友參進士進士有一男一女男賢東女金潤石玉仝三男琱參奉瑜參奉瑞左承旨三男二女男仁輔參奉仁弼參奉贈參判仁碩判官女金彦倫鄭公翰孝節公有八男一女男碩樑文樑察訪號碧梧希樑縣監號虎巖仲樑監司號賀淵季樑縣監號串巖閏樑判事號杏巖叔樑師傅號梅巖追享硏經衍樑司僕寺正女金富仁兵使號山南立祠洛川習讀有一男二女忠樑敎授贈參判女南崧文科監察琴應石主簿部將有三男一女男元樑亨樑貞樑女朱世增察訪有七男二女男宗樑進士國樑進士號暘谷堂遂樑汝樑生員世樑慶樑應樑女琴克仁梁允成校尉有一男二女男雄進士女郭崇武李士悌賢祖女安寬司直一男英出賢東一男芝府使琱有一男三女男希亨主簿女朴承枰閔僖安
瑜有三男一女男希常參奉希倫參奉號智仁堂希種參奉女朴承軾瑞有一男一女男杜壇女金彦璞進士仁輔一男之英參奉仁弼有三男四女男之華同樞之芳之蕃女權景純安國梁南胤叔金彦璣進士號惟一齋立祠龍溪判官有二男慶男禦侮將軍應男同樞宣武功臣文樑男元承進士福承全承僉樞女黃俊良牧使號錦溪立祠郁陽琴應侁金箕報縣監號蒼筠希樑男善承忠順克承生員仲樑男令承秉節校尉號東巖季樑男光承判決事號犁巖顥承僉樞號景巖明承號近巖閏樑男誠承奉事叔樑男敬承參奉號遯窩揚承世承企承忠樑男命弘贈參議號坤曰壽弘福弘贈參議號蘆雲德弘縣監號艮齋以扈從功臣贈吏參立祠
溪女琴應夏申汝瓘貞樑男逸民參奉國樑男永承奉事遂樑男德承主簿應樑男安承參奉雄男淑熙號錦溪命熙參奉芝男靑春察訪希亨男繼僉樞希常男得忠參奉希倫男聖鯉號樂窩希種男夢南主簿杜壇男唐賢僉樞號江左之英男夢鯉景鯉號種德女安潤屋正郞琴悌筍參奉朴毅長府尹贈判書諡武毅立祠九峯之華男佺引儀侃敎授號阿休之芳男偉奉事之蕃男儼都事號仙巖慶南男起憲僉樞汝憲號耘叟良憲應南男英震以下子姓亦多文行科宦之可傳而不能盡錄焉就其外裔而攷之則有若晦退兩先正彰明較著去公之世未遠趙月川朴嘯皐權晦谷諸賢永有聞焉于公有光斯益驗矣公之碑碣未知刱建於何代而去丁酉冬重磨改刻以表塋域迄于今五十餘年則石面苔荒字畫剝落且陰記簡忽難詳玆用合謀諸族兩位碣石一時改竪畧叙公世系及子孫錄如右系之以銘銘曰 裕其澤厚其仁理昭昭族振振始娥銘垂千億如可考視斯石 後孫 祥奎 謹識 ■ 고려봉선대부 군기시소윤 낙은공 묘갈명 공의 휘는 헌이고 성은 이씨이고, 영천인이다. 영천이씨의 계보는 고려 평장사인 휘 문한에서 나와서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휘 대영은 신호위대 장군을 지내고 영양군으로 봉군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부이다. 고조부의 휘는 득분인데 전공판서를 지냈고, 증조부의 휘는 문경인데 보승호군을 지냈고 조부의 휘는 송려인데 이부시랑을 지냈고 부친의 휘는 일충인데 주부를 지냈다. 공의 생졸 연기는 세대가 아득히 멀고 여러 번의 병란을 겪었기에 찾을 문헌이 없어서 다만 족보에 기재된 바를 살피니 공은 고려 말엽 당시에 봉선대부 군기시 소윤을 지내셨고 84세를 향수하셨고 묘소는 예안현 사천촌 건너편 기슭의 야(也)자 형국의 신좌 언덕이다. 아! 공은 혁명이 싹틀 때를 만나 만나서 재주를 숨기고 은근히 덕을 쌓으셨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안정하실 계획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두루 다니시다가 영천으로부터 예안현의 사천촌에 머무시게 되었다. 증손 현손까지 미쳐서는 세상에 명예를 빛낸 내외손 중에 명현이 계속하여 나타났으나 공의 실지 자취가 없어져서 비록 한스러우나 하늘이 공에게 베푸는 바를 스스로 숨기지 않고 있으니 영원히 전할 것인데 또 무슨 필요가 있어서 한탄만 할 것인가. 배위 숙인 선성이씨는 휘 원백의 손녀이고 합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처음 잡아두었던 사천촌 동쪽기슭의 해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3남 1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종실이고, 파는 현감을 지내고 참의에 증직되었고 오는 직제학을 지냈고 사위는 오원하이다. 종실의 아들은 가종과 가식인데 모두 무후이다. 참의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효손은 봉례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성손이고 사위는 김유용이다. 직제학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량은 사정을 지냈고 사위 권즙은 참봉을 지냈다. 참판(효손)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흠은 현감을 지내고 참찬에 증직되었고 균은 직장을 지냈고 사위 박유부는 군수를 지냈고 남서운과 안종인은 모두 현감을 지냈다. 성손의 아들 인견은 진사였다. 사정(희량)은 2남을 두었는데 옥동은 참봉이고 은동은 전력부위를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참찬(흠)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현보는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는 농암이고 시호는 효절이고 분강서원에 봉향되었고, 현우는 습독을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현좌는 부장을 지냈고, 현준은 찰방을 지냈고 사위는 권모이다. 직장(鈞)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현필은 충순위 교위를 지냈고, 현조이고, 현철은 사직을 지냈고 사위는 권보균과 김장손과 박언량이고 이우삼은 진사이다. 진사(인견)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동이고 사위는 김윤석이다. 옥동은 3남을 두었는데 조와 유는 모두 참봉이고 서이다. 좌승지(은동)는 3남 2여를 두었는데 인보는 참봉이고 인필은 참봉을 지내고 참판에 증직됐고 인석은 판관을 지냈고 사위는 김언륜과 정공한이다. 효절공(현보)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석량이고, 문량은 찰방을 지냈고 호는 벽오이고, 희량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호암이고, 중량은 감사를 지냈고 호는 하연이고, 계량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환암이고, 윤량은 판사를 지냈고 호는 행암이고, 숙량은 사부를 지냈고 호는 매암이고 연경 서원에 추향되었고, 연량은 시복시 정을 지냈고 사위인 김부인은 병사를 지냈고 호는 산남이고 낙천에 봉향되었다. 습독(현우)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충량은 교수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사위 남숭은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을 지냈고 금응석은 주부였다. 부장(현우)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원량과 형량과 정량이고, 사위는 주세증이다. 찰방(현준)은 7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종량은 진사이고 국량은 진사이고 호는 양곡당이고 수량이고 여량은 생원이고 세량과 경량과 응량이고 사위는 금극인과 양윤성이다. 교위(현우)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웅은 진사이고 사위는 곽숭무와 이사제이다. 현조의 사위는 안관이다. 사직(현철)의 아들 영은 출후하였다. 현동의 아들 지는 진사이다. 조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형은 주부이고 사위는 박승평과 민희와 안업이다. 유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상은 참봉이고 희륜도 참봉이고 호는 지인당이고 희종도 참봉이고 사위는 박승식이다. 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두단이고 사위 김언박은 진사이다. 인보의 아들 지영은 참봉이다. 인필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지화는 동추이고 지방과 지번이고 사위는 권경순과 안국량과 남윤숙이고 김언기는 진사이고 호는 유일재이고 용계에 봉향되었다. 판관(인석)은 2남을 두었는데 경남은 어모장군이고 응남은 동추를 지냈고 선무원종공신이다. 문량의 아들 원승은 진사이고 복승이고 전승은 첨추이고 사위 황준량은 목사를 지냈고 호는 금계이고 욱양에 봉향되었고 금응신이고 김기보는 현감을 지냈고 호는 창균이다. 희량의 아들 선승은 충순이고 극승은 생원이다. 중량의 아들 영승은 병절교위이고 호는 동암이다. 계량의 아들 광승은 판결사를 지냈고 호는 여암이고 호승은 첨추이고 호는 경암이고 명승은 호가 근암이다. 윤량의 아들 성승은 봉사이다. 숙량의 아들 경승은 참봉이고 호는 돈와이고 양승이고 세승이고 기승이다. 충량의 아들 명홍은 증직이 참의이고 호는 곤재이고 수홍이고 복홍은 증직이 참의이고 호는 노운이고 덕홍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간재이고 호종공신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오계에 봉향되었고 사위는 금응하와 신여관이다. 정량의 아들 일민은 참봉이고 국량의 아들 영승은 봉사이고 수량의 아들 덕승은 주부이고 응량의 아들 안승은 참봉이다. 웅의 아들 숙희는 호가 금계이고 명희는 참봉이다. 지의 아들 청춘은 찰방이다. 희형의 아들 계는 첨추이고 희상의 아들 득충은 참봉이고 희륜의 아들 성리는 호가 요와이고 희종의 아들 몽남은 주부이고 두단의 아들 당헌은 첨추이고 호는 강좌이고 지영의 아들은 몽리이고 경리의 호는 종덕이고 사위 안윤옥은 정랑이고 금제순은 참봉이고 박의장은 부윤을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무의이고 구봉서원에 봉향되었고 지화의 아들 전은 인의이고 간은 교수이고 호는 아휴이고 지방의 아들 위는 봉사이고 지번의 아들 엄은 도사이고 호는 선암이고 경남의 아들 기헌은 첨추이고 여헌은 호가 운수이고 양헌이고 응남의 아들은 영진이다. 이하 자손 또한 많고 문행과 과환이 전하고 있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어서 외손을 살펴보면 회재(이언적)와 퇴계(이황)같은 두 분 선정은 뚜렷하게 드러났고 공이 돌아가시고 멀지 않은 세대에 조 월천(조목), 박 소고(박승임), 권 회곡(권춘란) 같은 여러 어진 분은 소문이 길게 났으니 공의 후광이 있다는 것이 이처럼 더욱 징험되었다. 공의 비석을 어느 대에 처음 세웠는지는 알지 못하나 지난 정유년(1777) 겨울에 새로 다듬고 새겨서 묘소에 세웠는데 50여년이 지났으므로 돌에 이끼가 끼고 거칠어 졌으며 글자의 획이 떨어졌고 또 비문이 간단하고 소홀해서 상고하여 활용하기 어렵기에 여러 종친들이 합의하여 두 분의 비석을 일시에 다시 세우고 간략한 서문과 공의 세계 및 자손을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한다. 명에 이르나니, 은택이 넉넉하고 인자함이 두터우며 도리는 소명하고 자손은 드날리도다. 이 명을 시작으로 영원히 드리워지리니 옳게 상고하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후손 상규4)는 삼가 기록한다. (2) 沙川齋舍重修記 金鶴山一枝逶迤東轉爰有小溪環山而美麗者曰沙川以沙而名川也山麓臨溪有若拱揖者曰也谷以形而名谷也昔我先祖少尹公當麗季自永來宣盖爲此山水之勝而睠玆也谷實爲冠屨之攸藏夫人李氏墓在越山之南而子孫因近居焉始知吾先祖始卜之功其將與天地無窮而子孫之卽墓下置齋舍永世奠掃者豈徒然哉第年深歲久物換星移堂序之突兀者或至於頹碎制作之堅固者漸至於傾圯百世交神之所豈可一日而苟存也頃在白猿會奠之日遂發重刱之議盖出於不得已也詢謀旣同卜日經始欂櫨株檽或不無增損而左右齋堂各因其舊制不數月而功告訖苟非在天之靈有以默佑烏能完役之及期而抑亦近地僉宗賢勞之致也豈不偉歟於是劑庖樁庫比前殊備釜鼎床席亦皆有藏至於典守之人咸得以安其所而不侈於前無廢於後則當初先輩之白地營建者可謂勤且至而孱孫今日之事半功倍者不亦幸也嗚乎奉先祖於誠敬而不貴於物侈守業在於繼述而每患於終怠使後日諸族人必愛護此舍隨毁隨補而各思樹立無貽門戶羞則報本追遠之義尊祖守祭之道不外於是僉宗其勔之哉勔之哉咸曰諾遂爲記 十一代孫 慶泰 謹記 ■ 사천재사 중수기 금학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이어내려 동쪽으로 돌아들고 실개천이 산을 안고 흐르니 아름답고 수려하여 사천(모란)이라 하는데 모래가 유명한 개천이란 뜻이고, 산기슭은 개천에 다다라서 공읍하는 것 같아서 야곡이라 하는데 모양이 유명한 계곡이란 뜻이다. 옛날 우리 선조 소윤공(李軒)이 고려 말엽에 영천에서 선성으로 오신 것은 아마도 이곳 산수의 훌륭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 야곡은 실지로 묘소를 모셨고 부인 이씨의 묘소도 건너 산 남쪽에 계시고 자손들이 그로 인하여 근처에 살고 있다. 우리 선조의 터전을 잡은 공로를 비로소 알았으며 앞으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리니 자손들이 바로 묘소 아래에 재사를 마련하고 길이길이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해가 가고 세월이 오래되면 물건도 바뀌고 별자리도 이동하는데 우뚝하던 집도 무너지고 부서지게 되고 견고하게 만든 것도 점점 기울고 무너지는 것이니 백세토록 신을 모시는 것이 어찌 하루 같이 보존될 수 있을까? 신미(1751)년 묘사 때에 드디어 중건할 의사가 발의된 것은 아마도 부득이하여 나왔을 것이다. 계획과 함께 시작할 날을 받았고, 두공 등 재목은 혹 보태고 뺄 것이 없지 않으나 좌우의 마루는 옛날의 규모에 따랐고 몇 달이 안 되서 공사를 마치고 고유를 했으니 참으로 하늘에 계신 신령이 묵묵히 돕고 있지 않았는가? 어떻게 역사를 기대에 미치도록 완전하게 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또한 인근의 여러 어진 종친들의 노력으로 이루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이에 방과 부엌과 방앗간과 창고를 이전에 비교하여 뛰어나게 갖추고 가마솥과 밥솥과 밥상과 깔 자리 역시 모두 갈무리 하니 고지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안전한 곳이라고 했으며 이전보다 사치하지도 않고 이후로 폐함도 없을 것이므로 당초 선배의 빈터에서 건축을 맡은 사람은 부지런했다고 말할 수 있겠고 또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오늘 일의 공로의 반을 보태었으니 역시 다행이지 않은가? 아! 선조를 정성과 공경으로 받드는 데는 사치한 물건이 귀중한 것이 아니고 물려받은 사업을 지키는데 있으며 매양 걱정은 끝에 가서 태만 하는 것이다. 훗날 여러 종친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 집을 애호하며 헐리면 보수하여 각자 문호에 수치를 끼침이 없도록 생각을 다져라. 그러면 조상에게 보답하고 공경하는 의리와 조상을 받들고 제사를 모시는 도리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여러 종친들이 권하고 또 권하며 모두 옳다고 하여 드디어 기문을 한다. 11대손 경태5)는 삼가 기록한다. (3) 沙川齋舍重建記 少尹李公衣履之藏在縣西沙川洞子姓至今保守三百餘年嗚乎遠哉公諱軒慶之永川人也世居貫鄕有諱大榮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實爲永李之中始祖而於公爲五代祖高祖諱得芬典工判書曾祖諱文卿保勝護軍祖諱松侶吏部侍郞考諱日忠主簿秘書少監皆麗朝官職也世代已遠文獻無徵聲徽不大傳而喬木世室累葉炳靈大抵爲積善之家也公之生在麗末盖當革命之際以遯跡自靖之計遍訪佳山水至本縣汾川乃曰天藏好丘以待主人彼汾之曲是我攸廬遂稅駕焉禮之有永李實自公始意在入林之密而入山之深也披荊榛開天荒結屋數架扁以洛隱幽居其居鄕也老少俱得歡心與之追隨樂道以善成人之美天性然也以門蔭除軍器少尹年八十四卒葬于沙川乙向之原夫人宣城李氏先公歿墓他麓巳向之原乃公手點處也兩塋東西相望而間一水長子坡文科義興縣監次子塢文科翰林直提學當公之喪義興公年已七十直提學公亦踰不毁之年猶能廬墓致哀以終三年丙舍之創權輿於此至今樵童野叟指點爲李某基實蹟之久而不泯乃如此繼以奉禮公孝孫麟蹄縣監公欽世守而尊掃焉至玄孫孝節公聾巖先生益張大之恢拓舍制兼置土田臧獲每當春秋奠掃之際齋室潔修庖廚整頓守護之節於斯爲盛其後賀淵梅巖艮齋諸公克承先志不懈益虔以外裔則晦退兩先生尤大彰明較著而嶺中諸儒洛下名卿多彌甥也嗚乎休哉顧其門運中否家聲零替墓道未遑顯刻崇禎年間始立小碣亦屆丙舍措置根深源遠後孫有可以籍手也是時舍旣年久頹圯遂成老屋聚姓孫名下木數百疋助其事力稍廣舊制增置新規齋堂庖廚廐庫合爲二十三間後孫上舍公百葉後改永植取其前後事實集成一冊汾溪公元弼倡爲一律勉諸族以完護之意又上舍公東弼續以和之鄕中諸老亦多步韻幷與諸孫之作合爲一帙櫝以藏之舍中前後故事作一文獻可開卷而考也不幸乙巳秋續出之災起於東廊假簷正堂翼室頃刻而空先世遺墨前少尹洛隱公六大字及故事二冊蕩爲灰燼更無副本可憑嗚乎惜哉後孫老少驚惶齋會卽操文告由於墓前以慰震驚遂相與開坐於破瓦殘礎之間涕泣而相告曰吾族雖擧皆窮約而以多寡之數則可謂百足之虫也爲先之道惟在竭力而不在於貧富肯構之責惟在殫誠而不在於饒乏門衰祚薄雖有此變重建之擧不容但已盍亦齊心一力謀所以更始乎聞者一口同辭曰諾遂定出都監二人曰昌龍曰東馨有司三人曰鴻泰曰思黙曰壽龍棟樑新材自有龍山丘木經用之費分定各派名下其餘冗雜骨蕫之需惟在主事之手分闊狹卽席定議而退翌年掌事諸員收得各派名錢且責奴婢可堪之類以近百緡貿得村民材瓦補新材之不足寫材於道谷借丁於校院隨削隨運士友競勸樂爲之助以三月二十四日先立正堂八間四月二十四日升欐材兼新舊役借公私左右夾室東西長廊次第而立不出五六日建二十三間屋子若干材木未準入者宜仁李陰城芝涯金上舍各以丘木許其容入面內英陽南氏德山尹氏宣城金氏亦皆聞風而許斫焉豈有他哉皆公內外餘慶之所及而亦見今世之尙有好人也以木則尺朽無棄材以財則一毫不妄費名下收穀不過五六十包所持者狹前後之役不知其幾千百名役鉅力綿爲何如哉猶能撰斲無停供饋無乏兩朔之內訖工斷手士殫匠勤正謂此也鄕人譚者素稱李氏爲先之誠果知其非誣也許多本孫太半貧困餓躬不閱未必皆窮不失義也未必有學問之力也至於此事莫不奔走效勞一其心力期於準事而後乃已嗚乎其可尙哉運氣雖衰本天不壞李氏其復興乎旣成而後落之會者皆歸功於都監都監之於此事勤亦摯矣遜謝不敢當而歸之先蔭積慶天佑神助其言亦知義哉雲仍耆舊凋謝殆盡惟有汾沙李丈巋然若魯靈光今以八十二歲之年構成草本手自繕寫屬不侫爲之記儘可驚也不侫忝在彌甥之列何敢以不文辭略叙古今事實前後成毁幹事諸人之勞如右煩而不刪得其詳以備舍中故事之萬一云爾 崇禎紀元後三戊申淸和之望 外裔孫 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令 李級 謹記 ■ 사천재사 중건기 소윤을 지낸 이공의 묘소는 예안현 서면 사천동(모란)에 있는데 자손이 지금까지 3백여 년을 지켜왔으니 아! 오래됐도다. 공의 이름은 헌이고 경상도 영천인으로 살아온 곳을 관향으로 했다. 이름이 대영인 분은 신호위 대장군을 지내고 영양군에 봉해졌는데 실지로 영천이씨의 중시조이고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이름은 득분이고 전공판서를 지냈고 증조의 이름은 문경이고 보승호군을 지냈고 조부의 이름은 송려이고 이부시랑을 지냈고 아버지의 이름은 일충이고 주부와 비서소감을 지냈는데 모두 고려의 관직이다. 세대는 이미 멀어졌고 밝혀 볼 문헌도 없고 울렸던 명성도 전하는 것이 많지 않으나 우뚝한 가문으로 훌륭한 분이 여럿이 나왔으니 대개 적선의 가문이라고 한다. 공의 출생은 고려 말엽이었으니 아마도 혁명할 당시라서 자취를 숨기고 스스로 안정할 계획으로 은거할만한 곳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본 고을의 부네(분천)에 이르렀다. 이에 말하기를 “하늘이 감추어 둔 좋은 곳으로서 주인을 기다리는구나. 저 부네 골짜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다.”하고는 드디어 이사를 했다. 예안에 살고 있는 영천이씨는 공으로부터 시작됐다. 뜻은 빽빽한 숲속에 들어가거나 깊은 산에 들어가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있었다. 집 몇 칸을 지어서 ‘낙은유거(洛隱幽居)’라고 현판을 걸었다. 마을에서는 노인과 젊은이 모두에게서 환심을 얻었고 함께 즐거운 길로 따르게 해서 훌륭한 어른으로 찬미했으니 천성이 그러하셨고, 가문의 음직으로 군기시 소윤을 제수하시고 84세에 돌아가시니 모란의 을향에 안장했다. 부인 선성이씨는 공 보다 먼저 돌아갔고 묘소는 다른 산기슭의 사향의 언덕인데 공이 직접 잡으신 곳이다. 두 분 묘소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서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장자 파(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현감을 지냈고 차자 오(塢)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직제학을 지냈다. 공의 상을 당할 때에 의흥공(坡)은 이미 70세였고 직제학공(塢) 또한 50세가 넘었으나 오히려 묘소의 여막에서 슬퍼하며 3년을 마쳤다. 그리고 재사를 임시로 창건한 것도 이 때였고, 지금도 나무꾼이나 늙은이들이 이 아무개의 터전이라고 지적한지가 오래됐어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어서 봉례공 효손과 인제현감공 흠이 대대로 수호하며 제사를 모셨다. 현손인 효절공 농암선생에 이르러서 재사의 규모를 더욱 크고 넓게 확장하고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마련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모실 때 마다 재실을 깨끗이 수리하고 부엌과 주소를 정돈하니 수호하는 범절이 이렇게 성대했다. 그 후 하연공(중량), 매암공(숙량), 간재공(덕홍)의 여러분이 선대의 뜻을 이어 받들어서 게으르지 않고 더욱 정성스러웠다. 외손으로는 회재(이언적)과 퇴계(이황) 두 분 선생이 더욱 대단하고 뚜렷하게 드러났고, 영남의 여러 선비 중에 명성이 드러나서 이어지는 외손이 많으니 아! 아름답도다. 회고하니 문중의 운세가 중간에 막히기도 하고 가문의 명성이 떨어지기도 하여 묘소의 비석을 마련할 겨를이 없다가 숭정 연간에 비로소 작은 비석을 세웠고, 또한 재사의 마련에 이르러서는 근원이 깊고 오래됐으며 후손들이 직접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재사는 이미 오래되고 허물어지기도 하여 노옥이 되었었다. 자손의 이름 아래로 목화 수백 필이 모아져서 그 일에 힘을 보탰고 조금씩 넓히던 옛 규모를 새로운 규모로 증축하여 재실과 대청과 부엌과 주소와 마구와 창고를 합하여 23칸이 됐다. 후손인 상사공 백엽(永植으로 개명)이 그 전후 사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과 분계공 원필이 한 율의 시를 지어서 종친들이 힘써서 완벽하게 수호하라는 뜻을 나타낸 것과 또 상사공 동필 계속하여 화창한 것과 향중의 노인들 역시 많이 차운한 것과 여러 자손들이 지은 것을 아울러서 한 질의 책을 만들어 궤짝에 갈무리했었다. 재사에서 있었던 일의 전후를 하나의 문헌으로 만들었으니 책을 젖히면 살필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을사(1785)년 가을에 동랑에서 계속하여 화재가 나서 잠깐사이에 대청과 익실의 처마에 이르니 안타깝게도 선조의 유묵인 소윤을 지낸 낙은공의 큰 글씨 여섯 자와 고사 두 권이 불에 타서 없어졌으므로 부본이 없어 다시 증빙할 수 없으니 아! 애석하도다. 후손 노소가 깜짝 놀라서 재사에 모여서는 바로 글을 지어 묘전에 고유하여 몹시 놀란 영혼을 위로했고, 마침내 깨어진 기와 조각과 남은 주춧돌 사이에 둘러앉아서 울먹이며 서로 하는 말이 “우리 일가가 비록 거개가 가난하나 숫자의 많고 적음은 여러 갈래로 퍼졌다고 할 수 있고, 조상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노력을 다하는데 있는 것이지 부자나 가난한데 있는 것이 아니며 긍구(조상의 업적을 이어감)의 책임은 오직 정성을 다하는데 있는 것이지 재물이 넉넉하고 모자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문중이 박복해서 비록 이런 변을 당하고 있으나 중건의 거사는 그만 두는 것이 용납 안 되니 어찌 마음을 다져서 한결같은 노력으로 도모하여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인가?” 라고 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한목소리로 “좋소!”라고 하여 드디어 뽑아서 정한 도감 두 사람은 창룡과 동형이고 유사 세 사람은 홍태와 사묵과 수룡이다. 마룻대와 들보로 쓸 새 재목은 용산의 언덕에 있는 나무를 쓰고, 사용할 경비는 각 파에 나누어서 정하고 나머지 잡다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마련하는 것은 오직 일을 주관하는 사람의 수완이 넓고 좁음에 있다(주사자의 능력에 맡긴다.)고 즉석에서 의논하여 정하고는 물러났다. 다음해(1786년)에 일을 맡은 여러 분이 각파의 명전(분담금)을 거두고 또 노비가 맡아서 감당할 수 있는 류가 백 냥에 가까웠으며 마을 주민의 재목과 기와를 사서 새 재목이 모자라는데 보충했고, 재목은 도곡에서 다듬고 장정은 향교와 서원에서 빌려서 다듬고 운반하니 사우가 서로 권하고 기꺼이 협조했다. 3월 24일에 먼저 대청 8칸을 세우고 4월 24일에 상량을 했는데 재목은 새 것과 헌 것을 섞었고 역부는 공청과 사가에서 빌렸다. 좌우에 작은 방과 동서의 긴 복도를 차례로 세운지 5, 6일이 안되어 23칸의 집을 건립했다. 약간의 재목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의인의 이음성(음성군수를 지낸 이세술)과 지애 김상사(김협)가 각기 언덕의 나무를 베어내기를 허락하여 들여오고 면내의 영양남씨와 덕산윤씨와 선성김씨가 또한 모두 소문을 듣고 베어내기를 허락했으니 어찌 (원인이) 다른 곳에 있겠는가? 모두 공 내외분의 남은 경사가 미친 바이며 또한 지금 세상에서 숭상할만한 호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수는 한 자도 썩히거나 버리는 재목이 없었고, 돈은 한 푼도 낭비하지 않았으며 이름을 적고 거둔 곡식은 5, 60포에 지나지 않은데 가진 것이 적어도 전후의 역사(공사)에서 몇 천 몇 백 명을 부렸는지 알 수 없어도 큰 역사에 적은 힘이나마 이어졌으니 어떻다고 하리오. 오히려 공사는 정지함이 없이 다듬고 지었고 음식은 모자람이 없이 공급됐으며 공사는 두 달 안에 마치고 마무리 했으니 사가(선비가문)의 정성과 목수의 부지런함이 진정으로 이렇다고 하겠다. 향인이 평소에 칭찬하는 말이 “이씨의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 과연 꾸며낸 말이 아님을 알겠다. 많은 본손(자손)의 태반이 가난하나 굶주림을 돌아보지 않고 반드시 모두 뜻을 잃지 않았으며 반드시 학문에만 힘쓰고 있지도 않았고 이 일에 이르러서는 분주히 노력하지 않음이 없이 기대한 대로 준비하여 마쳤으니 이! 숭상할 만 하도다. 운수가 비록 쇠하였으나 근본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이씨는 부흥하리라.”라고 했다. 일을 이룬 후에 낙성에 모인 사람들이 도감에게 모든 공을 돌리니 도감은 이 일에서 부지런하고 또 진지했으나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감히 가당치도 않으며 조상의 음덕으로 하늘과 신령이 경사를 도왔다고 하니 그 말 역시 의리를 안다고 하겠다. 자손 중에서 옛 노인은 거의 다 돌아가고 오직 분사 이장(이복형)이 홀로 남았는데 영광(총기)이 무디어진 것 같았으나 금년에 82세로서 초본을 구성하고 직접 베껴주면서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부탁하는데 깜짝 놀랐다. 나는 외손의 대열에 있으니 어찌 감히 짓지 않는다고 사양하리오. 서문을 간략하게 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헐리고 이루어낸 전후 사실과 간사 여러 분의 노고를 오른 쪽과 같이 번잡하게 하면서 깎아 내지 않은 것은 얻은 것을 상세히 기록하여 재사에 비치함으로써 사적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함이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무신년(1788) 4월 15일에 외예손 통훈대부전행사헌부 장령 이급6)은 삼가 기록한다.
(4) 沙川齋舍重建上樑文 興廢有數方歟齋室之遽災經營爲謀奄觀堂廡之重刱玆追前人志業畧倣舊日規模恭惟我先祖少尹公圭組相襲學術有源淳耀未泯傳永陽君之豐功偉烈志操有尙承主簿公之峻節高風累以德行以仁因基業之方始進以道退以禮際麗運之將終相陰陽降山川美哉汾水之曲離親戚棄墳墓逖矣永州之鄕豈有苟全姓名亦曰可辭爵祿其心皎然而不顯其跡泯焉而難明惟天眷顧我家俾人納于沙麓益光前烈何讓乎魏公之庭植三槐垂裕後昆幷美乎于氏之門容駟馬逮中葉而大闡猗歟聾祖諸賢間世之興至外裔而且延有若退翁羣哲繼統之作是知餘慶之及玆皆發源於公肆追遠有齋俾崇報有典佳山麗水護陰藏儼然西考東妣之斧堂上棟下宇向陽開壯哉左翼右廚之厦屋春以省秋以掃禮容肅於旅酬齋於是祭於斯誠意感於祀享不幸百年之宅忽爲一朝之災但見焦土流金前世之文籍安在空餘敗瓦殘礎先輩之經紀莫憑且懼且驚謂無齋何以祭也自南自北卽其址相與弔之胥出萬死之心爰謀重建之議收錢聚穀敢不竭力以圖運瓦伐材殆無虛日以繼移其南而相地溪山更奇仍其舊而爲堂軆勢克壯豈意烟銷燼滅之地遽見翬飛燕賀之儀于㭬于礱旣盡匠師之技載謀載度實賴幹事之能報本追遠之誠於斯庶盡采蘩奠藻之禮于玆可行不有諸孫之勤焉不有今日之盛焉敢綴蕪語助擧修樑抛樑東淑氣芝山千仞崇欲識澤流看底像汾河不盡慶無窮抛樑南桑鄕雲物碧天涵洋洋陟降先楸感寒食東風雨露 抛樑西松岳蒼蒼白日低一片丹誠何處寓林間晦迹誦夷齊抛樑北金鶴山高聳幹直龜伏龍蟠沙鴈呌睪如宰如是玄宅抛樑上一理昭昭天宇朗大闢天荒推盛際報應無爽捷於響抛樑下馨香歲薦錫純嘏永言尊祖敦宗戒遺大投艱肯構者伏願上樑之後堂宇奠安地靈顧護孝思不怠人必謂敬乃祖有乃孫祭儀無虧予其曰承先謨軆先意家聲赫赫於苞竹之詠門風藹藹於花樹之歌於千萬年永保無替 十三代孫 祥熻 ■ 사천재사 중건상량문 흥하고 폐하기를 여러 번 있었으나 바야흐로 재실이 갑자기 재난을 당했기에 계획하고 경영하여 당무(堂無)의 성대한 중건을 보았도다. 이는 선조를 추모하는 뜻 있는 사업이요 옛날의 규모를 대강으로 본받았구나. 공경하옵는 우리 선조 소윤공께서는 대를 이어 인품과 지위를 계승하셨고 학문은 근원이 있었으며 명성은 영양군의 풍성한 공로와 위대한 충렬이 전해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지조는 주부공(일충)의 준엄한 범절과 고귀한 기풍을 이었으니 숭상할 만 하도다. 덕을 쌓고 어질게 실행하여 바야흐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하셨으며 고려의 국운이 끝나 가는 때에 도리로 나아가고 예의로 물러나셨도다. 음양(풍수)을 보고서 내리신 곳이 산천이 아름다운 분천 마을이었고 친척을 떠나고 분묘를 버렸으니 고향인 영주(영천)을 그리워 하셨도다. 어찌 구차하게 성명을 보전하려 하셨겠으며 벼슬 또한 사양하셨다고 말할 수 있도다. 마음은 너무도 깨끗하여 드러나지 않았으며 자취는 사라져서 밝히기 어렵도다. 오직 하늘을 우러러 우리 가문을 회고하여 보고 후손으로 하여금 선조의 영전에 바치옵니다. 선대의 충렬이 더욱 빛나니 사양하지 않은 것은 위공의 정원에 심은 세 그루 회나무 같고, 훌륭한 도를 후손에게 물려주시니 아울러 아름다운 것은 은거하던 가문에서 벼슬길을 용납하심입니다. 중엽으로 바뀌어서 아! 크게 천명한 것은 농암 선조와 여러 어진 분들이 세상을 흥기시킴이요 외손에 이어지기에 이르러서 퇴계 선생 같은 분이 있어서 뭇 철학자의 계통을 작성했도다. 이렇게 남긴 경사가 미쳤음을 알겠으며 이 모두가 공에게서 발원했도다. 추원재를 숭상하고 보은하는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산수가 은근히 보호하여 서쪽에는 고위요 동쪽에는 비위의 산소를 엄연히 보장하였고 위아래의 용마루와 처마는 양지를 향해서 왼쪽에는 익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주방이 딸린 큰 집이 장엄하게 전개됐도다. 춘추로 성묘하는 예의의 모습은 음복에서도 엄숙하고 재사(齋舍)에서나 제사(祭祀)에서나 이렇게 성의가 있었음은 향사에서 느껴지도다. 불행히 백년을 유지하던 집이 홀연히 하루아침에 재난을 당했구나. 흙이 타고 쇠가 녹았는데 전세의 문적이 어찌 남아 있겠으며 빈터에 남은 것은 부서진 기와조각과 주춧돌뿐이라 선배의 경력과 연기는 증빙할 수 없도다. 다시 죄송하고 다시 놀랬으며 재사가 없으니 제사는 어찌하랴? 남북에서 바로 그 터에 모여들어 서로서로 위로했도다. 서로서로 단단히 작정하고 중건을 의논했도다. 돈을 걷고 곡식을 모아 힘을 다해 도모하지 않겠는가? 기와를 운반하고 재목을 베어내며 쉬지 않고 계속했도다. 남쪽에 이건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산천은 또다시 신기하고 옛날에 의거하여 대청을 마련하니 형체와 기세가 웅장하도다. 어찌 뜻밖의 불이 나서 타버린 곳이라 하겠는가? 문득 보니 제비가 훨훨 날며 축하하는 거동이로다. 다듬고 갈아서 목수의 기술을 다했고 계획하고 시행함에 간사의 능력에 힘입었도다. 조상에게 보은하고 추모하는 정성을 이에서 다했고 벌초하고 제사 모시는 예의를 여기서 행할 수 있었도다. 여러 자손들이 부지런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대함도 있지 않을 것이로다. 감히 거친 말을 엮어서 상량을 도우나니 (상량 음식을) 들보 동쪽으로 던지며 (분천을 향하여) 지산의 맑은 기상은 천 길 우뚝 솟아서 윤택하게 아래로 흐르는 모양을 보니 학문을 하려는가? 분천마을에 무궁한 경사가 그치지 않게 하소서 (상량 음식을) 들보 남쪽으로 던지며 (영천을 향하여) 고향에 떠있는 벽옥 같은 구름은 하늘을 뒤덮어서 양양하게 오르내리니 조상 생각 그리운데 한식에는 동풍 타고 비를 촉촉하게 내리게 하소서 (상량 음식을) 들보 서쪽으로 던지며 (소윤공 묘소를 향하여) 짙푸른 송악으로 해는 저무는데 한조각 정성은 어느 곳에 머무를까? 은거하여 자취 감추고 백이숙제를 본받게 하소서 (상량 음식을) 들보 북쪽으로 던지며 (임금을 향하여) 금학산 우뚝 솟고 산줄기 곧게 뻗어서 거북 등에 용이 서린 혈이요 모래밭에 기러기 노니는 혈이니 넓은 듯 높은 듯 현묘한 집을 짓게 하소서 (상량 음식을) 들보 위로 던지며 (천신을 향하여) 이치가 밝아지니 우주도 밝아지고 거친 하늘 크게 열리는 무성한 때이니 시원하게 갚지 못하나 울림은 크게 하여 주소서 (상량 음식을) 들보 아래로 던지며 (지령을 향하여) 고운 명성 세월 따라 크게 퍼져서 조상을 존경하고 종친 간에 화목 하는 계율은 영원하리니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상의 얼 이어지게 하소서 삼가 바라오니 상량 이후에도 대청에서 편안히 제사를 모시도록 지하의 혼령께서는 돌보고 보호하시고, 효성을 생각해서 사람들이 게으르지 않게 하시고 반드시 조상을 공경하라고 이르시어 살아있는 자손들이 제사의 의례에 이지러짐이 업게 하소서. 나의 말씀은 조상의 뜻을 체득하고 이어가라는 뜻이옵니다. 가문의 빛나는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시고 문중의 왕성한 기풍이 종친 간에 오르내리게 하시어 천만년을 변함없이 길이 보전하게 하소서. 13대손 상흡7) 1) 李祥熻(1735~1791):永川人. 字는 雲瑞, 號는 敬謨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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