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갈5:13
제목: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 기독교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신앙입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
성도들은 죄를 짓는 자유를 위해서 부름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고 진리로 자유하게 되어 죄의 굴레를 벗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요8: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33.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 죄에서 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자유(실제로는 죄의 종)를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자유를 주장하고 누리는 자들은 죄에서 속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최근에 기독교를 사칭하면서도 율법폐기론 또는 도덕률폐기론에 빠진 이단자들의 삶이 얼마나 거짓된 자유를 빙자하여 죄악의 노예가 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된 실체가 MBC PD수첩을 통해서 방영이 되니, 그 이단 집단을 이단이 아니라고 이전에 옹호했던 신학자가, ㄷㄹㅂ을 이단이 아니라고 말했던 자신의 옛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때늦은 사과를 했는데도 그 신학자는 역풍을 맞고 있는데요. 과연 MBC PD수첩이 이단의 타락한 모습을 방영하지 않았더라도 ㄷㄹㅂ이 이단이 아니라고 했겠느냐? 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단에게 연합해 이익을 함께 누리다가 불리해지니까 때늦은 손절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이단들이 이단인 모양을 분별하는 것은 애매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현저(顯著, 뚜렷이 드러나 분명하다)하며 분명합니다.
갈5: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현저하니, 개역한글)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이번에 기독교 안팍에서 타락한 교회와 이단으로 이슈가 된 ㄷㄹㅂ을 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단은 교리에서만 변질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를 믿음으로 인해 사고방식과 생활까지도 왜곡되고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거의 절대 다수의 이단은 교리적인 오류로만 끝나지 않고 육체의 일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을 분명하고 현저히 드러냅니다. 그런데 신학박사에 교수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서를 썼다는 사람이 이단의 이단됨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똑똑한 척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지만 이단과 관계해서 이익만 취하겠다고 잔머리를 굴립니다. 글쎄요. 그게 가능할까요? 이단과의 결합은 분리가 가능한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하나가 되는 화학적 변화를 합니다.
고전6: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위 말씀의 의도와 정신을 가지고 이단과 합한 자를 분별하면 이단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창녀의 몸을 이용하여 육체의 욕구를 채우려고 창녀와 합하는 자가 창녀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이단의 이익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이단과 연합한 자는 이단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갈5:19와 고후6:16 등을 보면, 자신은 이단이 아니라고 어거지를 쓰지만 이단에게 연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며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와 합한 자는 신실한 믿음만 가진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녀와 연합한 자는 믿는 듯이 보이던 처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고후6:11)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면 주와 합한 자가 한 영이 된 것처럼 창녀와 합하여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보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던 자들이 성도들(갈5:13)인데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중생∙회심∙)칭의되고 칭의의 결과로서 성화되며, 그 성화라는 것을 갈5:13로 보면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은 죄의 억제 또는 죄 죽이기이며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은 성화의 적극적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껏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벧전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죄에서 속함을 받고 의를 얻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 중 더욱 성숙한 자녀들은 진리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합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이지요. 그러나 성숙한 자녀로서 더 어리고 연약한 자녀를 도와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전도자로 택정함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는 육체의 유혹을 이기고 죄를 억제하는 성화를 수반합니다.
벧후2:18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
수많은 신비주의자와 이단들이 신령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해냈지만 결국에는 육체의 정욕에 포로가 되어 음란을 행하다가 멸망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하게 하는 진리가 없고 죄악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진리와 의(義) 가운데 확실히 있게 만들어줍니다.
● 성경을 볼 때 ‘율법’이라는 단어가 있는 문맥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마5:17만 들이대며 율법주의로 가면 아니 되고 갈3:11만 들이대며 율법폐기론으로 가도 안 됩니다. 이신칭의(갈3:11)가 된 이후에는 칭의(稱義)의 결과로서 믿음의 증명으로서 율법을 행하게 됩니다(마5:17).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행하는 것(율법주의)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행하는 것(성화)입니다. 그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성화의 차원에서 율법을 행하는 것 중에 가장 성숙한 것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이 묵상을 읽은 성도들이 모두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성숙한 믿음의 축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은 묵상 본문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다만 더 깊고 다양한 이해를 요하는 분들을 위하여 주석과 참고자료를 올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갈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여기 "너희가"(* )란 말은 헬라 원어의 어순(語順)대로 강세형(强勢形)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비교하여 그들의 특수한 처지를 지적함이다. "자유"란 말(* )은 종들을 놓아줌에 대하여 흔히 사용된 말이다(Greijdanus). 인간은 죄악의 종이었음에 따라서 거기 심판자로 임한 율법에도 종이 된 것이다(요 8:34; 갈 4:1-3, 5: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에서도 놓였다(요 8:32,36; 롬 8:1).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 )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죄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실제적 경험의 사실이다. 롬 3:31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로서 죄악에 접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속죄 사업의
본의(本意)를 무시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한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이다. "종노릇 하라"란 말(* )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 한다. "섬긴다"는 개념과 "종이 된다"는 개념는 다르다.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돕는 행위이고, 그의 의지(옳은 소욕이나 옳지 않은 소욕)에 맹종함은 아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불의한 소욕에는 응종하지 않음이 그를 사랑함이다. 그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행하고 노예적 심리로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율법을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이 밝힌다.
@장코뱅 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성화의 단면을 잘 설명하는 갓 같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매튜 헨리 주석>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갈라디아서 5:13-26)
본장의 후반부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거짓 교사들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자구책으로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말한다.
Ⅰ. 서로 다투지 말고 살아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들에게(13절) "그들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에 그들을 굳건히 서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것" 즉 그들이 부패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갖거나 그러한 행위에 탐닉하지 말 것과 특별히 이러한 일들을 멀리하고 가까이 하지 말며 이러한 일들로 그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의 근거가 되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한다. 서로 애정을 간직하여 그들 가운데 다소의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 존경과 친절을 베푸는 데 주저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성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즐기는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지만 그렇다고 그가 율법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은 아니다. 복음은 "경건에 관한 교훈"으로(딤전 6:3) 복음이 죄를 조금이라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정복할 강한 의무에도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우리가 기독교인이 자유 안에 굳게 서야 하겠지만 그 자유를 근거 삼아 기독교인이 베풀어야 할 자애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를 동료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과 다투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장코뱅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지만 율법에 대한 책임이 면제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매우 균형잡힌 것 같습니다.
<박윤선 주석>
갈 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여기 "너희가"(* )란 말은 헬라 원어의 어순(語順)대로 강세형(强勢形)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비교하여 그들의 특수한 처지를 지적함이다. "자유"란 말(*)은 종들을 놓아줌에 대하여 흔히 사용된 말이다(Greijdanus). 인간은 죄악의 종이었음에 따라서 거기 심판자로 임한 율법에도 종이 된 것이다(요 8:34; 갈 4:1-3, 5: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에서도 놓였다(요 8:32,36; 롬 8:1).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 )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죄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실제적 경험의 사실이다. 롬 3:31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로서 죄악에 접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속죄 사업의
본의(本意)를 무시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한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이다. "종노릇 하라"란 말(*)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 한다. "섬긴다"는 개념과 "종이 된다"는 개념은 다르다.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돕는 행위이고, 그의 의지(옳은 소욕이나 옳지 않은 소욕)에 맹종함은 아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불의한 소욕에는 응종하지 않음이 그를 사랑함이다. 그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행하고 노예적 심리로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율법을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이 밝힌다.
@장코뱅 호크마 주석을 베낀 것이 아닌가 의심이 조금 들지만 기우이겠지요. 오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도덕률폐기론
무조건 용서 어쩌고 하고 복음을 운운하는 것이 빼박 율법폐기론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
갈라디아서 5장 말씀이 마치 예언서 같습니다. 측은한 분들이네요ㅠㅠ
확실한 물증을 보여주네요. 기가 막힙니다ㅠㅠ
다른 기독 카페에 올라온 좋은 분별의 댓글
"내용 중에 다락방이 전하는 교리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지적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당장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퍼지고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스며들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 옵니다. 다락방의 교리는 괜찮지 않는가 하고 묻는 분들에게는 그 교리가 이 모든 범죄문제의 시작이라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공감해요. 깊은 통찰입니다.
공감합니다22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몸이 찢기며 가장 부끄럽고 극악한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죽음으로써 주신 거라는, 가장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주신 거라는 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쓸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희생자의 희생을 생각하며 아주 송구스럽게 하루하루를 감사해하면서 그를 기리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서 자기의 언행을 살펴볼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 정상인의 반응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주신 자유를 육체를 위해 사용하지 말고 사랑의 섬김을 위해 사용하라고 가르친 것 같습니다.
이단 사이비는 제쳐두고 보통의 교회 신자들이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적당히 세속적인 생활로 안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죠. 우리의 목표는 부활의 푯대를 바라보며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준비하며 사는 것인데, 곧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실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중히 생각하고 성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깊고 풍깊고 풍성한 댓글에서 배우고 공감합니다.
네, 공감합니다22
이 묵상 본문과 PD수첩에 나온 율법폐기론의 이단의 사례를 보면 진리가 주는 자유가 아니라 육체의 방종을 자유로 삼은 자들의 결국이 지옥이라는 것을 엄숙히 깨닫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