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때 난생처음 재봉틀이라는 기계를 보았다. 태평양 전쟁 중이라 산업이 피폐했고, 유기그릇을 비롯하여 쇠붙이는 모조리 탄피용으로 공출해 갈 때였다.
물자가 부족한 그 시절에 재봉틀이 어떻게 시골 우리 집까지 왔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재봉틀을 장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상당히 고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백여 가호의 제법 큰 마을에 재봉틀이 있는 집은 우리 집뿐이라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구경을 왔다.
당시에는 재봉틀 사용설명서가 없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읽을 사람이 없어 판매인에게 간단한 설명만 듣고 스스로 용법을 터득해야 할 처지였다. 처음엔 사용법이 서툴러 바늘에 손톱이 찔려 고통에 신음하시던 어머니 얼굴이 눈에 선하다.
인고의 세월에 어머니는 이 기계로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이 맡긴 바느질의 삯을 대신하여 농사일을 시켰다. 어머니가 바느질하면 재봉틀 작동 소리가 늘 흥미로웠다. 천에 올올이 꼭 같은 간격으로 박음질 된 것이 신기해 호기심이 생겼다. 틈만 나면 그 기계를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를 틈타 재빨리 나사를 풀었다. 조이는 일이 재미있었다. 가끔 제대로 조립하지 못해 혼쭐이 났다.
어머니 곁에서 유심히 바라보며 나도 빨리 재봉틀을 부려보고 싶었다. 이불 홑청 같은 긴 천을 잇댈 때 앞에서 당겨주면 능률이 오른다. 나는 리듬에 따라 천을 잘 당겨 어머니의 칭찬을 받았다. 리듬을 맞추지 못하는 다른 형제들은 아예 곁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하복 상의가 처음으로 남방으로 정해졌다. 6·25 전쟁 중이라 사회가 혼란했고 판매하는 기성복이 없었다. 어머니가 대처에 나가 재단을 배워 옥양목 천으로 형의 옷을 만들었다. 가만히 보니, 재단만 해주면 내 옷은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느질을 자청하여 거들었다. 어머니가 재단하여 가봉한 후,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첫 작품을 만들었다. 꽤 잘 만들어졌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후로 속옷도 어머니가 재단만 해주면 만들어 입었다. 당시에는 양말도 품질이 떨어져 하루만 신으면 뒤꿈치가 뚫어졌다. 나는 재봉틀로 기워 신었다. 어머니가 대견한 듯 이웃 사람들에게 자랑하여 마을에서 제법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재봉틀을 팔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가난한 벽촌에서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겠다는 형의 태도에 불만이 있었으나 장남에 대한 부모의 기대감에 어쩔 수 없었다. 애지중지하는 재봉틀까지 팔아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말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낯선 아주머니가 재봉틀을 이고 동구 밖 산자락을 돌아 사라질 때,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뒤란에서 목 놓아 울었다. 내가 자립하는 날에는 세간으로 제일 먼저 재봉틀을 마련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결혼 몇 개월 후, 두어 달 봉급을 털어 재봉틀을 마련했다. 가슴 아린 사연을 들은 아내가 쾌히 승낙해주었다. 고마웠다. 산업 기술이 후진을 면치 못할 때라, 고장이 잦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중소기업 제품이었다. 제품 출하 몇 년 뒤 회사가 도산해버려 더 생산되지도 않는 기계였다. 내 힘으로 마련한 첫 세간을 매일 닦고 기름칠해주었다. 더구나 아내가 미혼 시절 양장점을 경영한 경험으로 알음알음으로 삯바느질을 하여 푼돈을 벌었으니 재봉틀은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반려 기계였다. 퇴근하면 낡은 러닝셔츠를 재단하여 걸레를 만들어 재활용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유명 업체 아동복이 드물었다. 고가의 아동복은 우리 같은 서민에겐 사치였다. 재래시장에서나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판매하는 옷을 사 입혔다. 바느질이 허술하고 품질이 뒤처졌다. 몸에 맞도록 품과 길이를 줄이고 넓혀 입히는 것은 내 몫이었다. 체계적인 재봉을 배우지 못했지만, 아이들 옷을 손봐 입히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박봉의 공무원 아내는 경제적 도움이 되는 바깥일을 하느라 아이들 옷을 손볼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내 집 마련을 위해 집을 지은 게 계기가 되어 작은 건축업체를 설립했다. 가사는 전적으로 나에게 맡겼다. 내 옷은 물론 아내의 옷도 유행에 뒤처진다 싶으면 사정없이 뜯어고쳤다. 가끔 핀찬을 들었지만 별로 괘념치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 바느질 보조가 무엇보다 진가를 발휘한 것은 퇴직 후이다. 며느리와 사위를 맞이할 즈음에는 솜씨가 제법 늘어 손자 손녀 옷도 넓혀주고 줄여주니 며느리들이 신기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버님, 옷 수선공으로 일하다 대학 가셨나 봐.”
자기들끼리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심지어 사돈은 옷 수선을 부업으로 했는지 농담처럼 묻기도 했다.
나의 재봉틀은 육십 년 대 중소기업 제품이지만 육십 년이 넘게 사용해도 한 번의 고장이 없다. 고장이 날 원인을 주지 않았다. 먼지를 털고 윤활유를 치고 사랑으로 건사했다. 내 의지대로 묵묵히 따라주는 반려 기계가 되어 내가 머무는 방에서 교감하는 기쁨을 준다. 어디에 두어도 자리를 탓하지 않고 묵연히 자기 소임을 다하는 기계다. 반려동물보다. 더 친근하고 정겹다. 반려동물은 재롱과 애교를 부리지만 배설물 처리, 목욕 등 성가심을 감수해야 하고 사료 비용이 든다. 배란 기에는 무단가출을 서슴치 않는다.
내 반려기계는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고 성가심이 없다. 아내는 팔순을 넘겨도 아직 자기 일을 하고 아이들은 독립했기 때문에, 무료한 시간이 많다. 이럴 때 정분이 쌓인 재봉틀과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귀천(歸天)의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내가 없어지면 혈연처럼 아끼고 교감하던 재봉틀이 팔려나갈 때처럼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먼 길 떠나면 민속박물관으로 보낼 것을 유언으로 남기려 한다. 평소 아비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아이들이니 실천하리라 믿는다. 먼 훗날 영혼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첫댓글
이정식 선생님의 '재봉틀' 을 읽으며 옆으로 눈길을 돌리니 나와 오십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brother 미싱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네요. 이선생님의 재봉틀 처럼, 반세기를 넘기면서도 단 한 번의 고장이 없었답니다. 나를 힘차게 뛰게 하였고, 이이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게 하여준 고마운 가족이지요.
데이빗 님 찾아주심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