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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문학
18세기 지식인의 정리벽 - 유득공의 발합경
18세기에는 지식인 집단 내부에서 새로운 지적 경향이 꿈틀대던 시기다. 중국과 활발한 문화 교류의 바탕 위에 사회 내부
의 급격한 변화가 얹히면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생동하는 도시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군자로 표상되던 획일화된 도덕적 표준 대신,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 집단이 대두되었다.
이전 시기 사물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이었다. 즉물궁리(卽物窮理)나 격물치지(格物致知)란 말은 사물의
너머에 존재하는 이치를 궁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앎의 영역을 확장하라는 요구이지, 사물 자체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단지 사물 자체에 대한 몰두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오히려 선비의 바른 정신을 손상시키는 행동으로 여겼다.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이와 달랐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뜻을 잃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이해의 폭을 확장시켜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음지에서가 아니라 드러내놓고 실천으로 옮겼다.
최근 미국 버클리대학교 아사미 문고 소장의 필사본 1책이 소개되었다. 책 한 권이래야 불과 28장의 필사본이다.
여기에는 다시 네 종류의 짧은 저술이 실려 있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남방이
목부(南方異木簿)》․《발합경(鵓鴿經)》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단연 흥미를 끄는 것은 18세기 서울지역의 애완용 비둘기 사육에 대해 적고 있는 《발합경》이다.
발합(鵓鴿)은 집비둘기를 뜻하는 한자말이다. 《발합경》은 집비둘기 사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적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19세기의 백과전서적 저작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란 책 속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저술로 밝혀져 있다.
다행이 아사미 문고본의 《발합경》 전문이 새롭게 발견됨으로써, 그 전모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발합경》은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에는 무려 23종에 달하는 관상용 비둘기의 각 품종
이 상세히 나온다. 오늘날 공원에서 흔히 보는 비둘기도 깃털의 모양이 다 같지 않다. 이 책을 보면 예전 낱낱의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모두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흰 바탕에 검은 꼬리, 정수리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은 점오(點烏), 즉 까막
점이라고 불렀다. 갈색에 목 털이 흐린 홍색, 날개에 두 줄의 검은 줄이 있는 것은 중[僧]이 입는 가사와 같다 해서 중으로
불렀다. 오늘날의 양비둘기다.
이밖에 이 책에는 비둘기의 여러 별칭, 종과 종 사이의 교배 규칙과 좋은 비둘기를 판별하는 방법, 비둘기의 성질과 비둘기 집 만들기, 비둘기 꼬리에 매달던 방울과 비둘기 잡는 그물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적었다. 당시에 이런 정보를 글로 남겼다
는 것이 우선 놀랍다. 또 관상용 비둘기 사육이 18세기에 그토록 성행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는 사실이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유득공은 《발합경》 뿐 아니라 《연경(烟經)》도 남겼다. 《연경》은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2백년도 더 된 담배에 관한 이런저런 기록들을 체재를 갖추어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흥미로운 주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자료를 널리 수집해서 꼼꼼히 분류하고 정리하는 수집벽과 정리벽이 있었다.
이런 바탕에는 엄청난 양의 독서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도 평생 바비 인형만 모으거나 모형 비행기, 또는 지포
라이타만 모으는 등의 수집벽을 가진 마니아들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따로 오타쿠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거 우리의 지적 전통 속에도 분명 이런 맥락이 존재했다.
유득공의 친구였던 이서구는 《녹앵무경(綠鸚鵡經)》이라 하여 초록 앵무새의 사육 경험과 문헌 속에 보이는 앵무새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기도 했다. 그때는 이런 저술 행위가 유행처럼 번졌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폭넓게 펼쳐졌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잊혀졌다. 그런 일이 있었던 조차 모른다.
그런 면에서 새롭게 발견된 유득공의 《발합경》은 이 시기 지식인들의 공부 태도와 세계 이해의 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뜻깊은 자료다. 인간 본성의 탐구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는 자리에서 근대가 출발한다.
18世紀 朝鮮의 웰빙(Well Being) 風潮와 園藝趣味
1
18世紀 朝鮮은 中國文化의 活潑한 受容을 바탕으로 전에 없던 큰 變化를 經驗한다. 北學으로 代辯되는 中國 배우기 熱風
이 그것이다. 특별히 서울의 京華士族을 中心으로 消費的 形態의 都市文化 流入이 加速化되었다. 一種의 웰빙 現象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삶의 質을 向上시키려는 欲求와 關係가 깊다. 또 이러한 欲求는 差別化된 趣味와 慾望을 부추긴다.
그것은 骨董과 藏書 趣味, 園藝와 觀賞用 動物 飼育 等 多樣한 方向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一種의 消費文化다. 消費文化
는 流行을 낳고, 流行의 底邊에는 남과 나를 差別化하려는 戰略이 깔려 있다. 差別化는 새로움을 낳고, 새로움은 過消費나 지나친 形態의 遊興文化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性理學 理論에 立脚하여 小中華의 名分을 앞세워 北伐의 旗幟를 높이 들었던 朝鮮의 保守 一邊의 知的 風土는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淸朝의 文物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外部와 接觸이 遮斷된 채 學問에만 몰두하던
地方의 知識人들이 한번씩 들렀다가 目擊하는 서울의 雰圍氣는 亡國 一步前의 危機意識을 深化시켰다. 都市化의 물결이
中央과 地方間의 文化 隔差를 한층 더 벌여 놓은 것이다.
本 發表는 18世紀 서울 地域을 中心으로 發生한 都市文化의 새로운 風潮를 주로 園藝 趣味를 中心으로 簡略히 스케치
해보려는 것이다. 本 發表文는 發表者의 앞선 硏究를 要約 整理한 것이다.
2
이 時期 文化의 特徵的 變化 뒤에는 새로운 類型의 知識人 集團이 存在했다. 18세기 들어 갑자기 ‘癖’ 禮讚論이 쏟아져 나온다. 一種의 마니아 禮讚論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癖’이란 말은 이 時期 知識人의 한 傾向을 壓縮的으로 보여준다.
朴齊家는 癖이 없는 人間은 쓸모없는 人間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지금도 浪費癖, 盜癖 등 좋지 않은 語感으로 쓰는 이
말이 이때는 肯定的 意味로 쓰였다. 또 스스로를 ‘癡’, 즉 바보 멍청이를 自處하고 나서는 傾向도 생겨났다. 慣習的 基準에
서 볼 때 非正常的으로 미친 ‘癖’이 社會的 通念으로는 ‘痴’로 認識되었다.
이 시기 雪癡․癡齋․梅癡․看書癡․石癡 등 痴字가 들어간 이름이나 号가 부쩍 많아지는 것은 그 反映이다.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 같다는 말을 오히려 名譽롭게 여겼다. 미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욕 안 먹고 사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에서 近代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知識의 패턴이 달라지고, 情報 價値의 優先 順位도 바뀌
었다. 삶의 目標 또한 軌度 修正이 不可避 했다.
偏執狂的인 整理癖과 種類를 가리지 않는 蒐集癖, 些少한 事物에까지 미친 愛好癖이 同志的 結束 아래 熱狂的 支持를 받았다. 聖賢의 道를 實現하는 君子的 삶의 理想은 市井의 목소리에 점차 파묻혔다. 서울과 地方의 文化 隔差는 하루가 다르게 懸隔하게 벌어졌다. 이들은 꽃․새․벼루․骨董品․칼․書冊․旅行․數學․그림․물고기․武藝․出版․表具․글씨 등에 미쳐 마침내 그
分野에서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의 이러한 變化를 가능케 한 힘은 情報化에 있다. 이 時期 北京 琉璃廠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規模의 書籍은
情報 處理 方式과 情報의 有用性에 대한 判斷 根據를 하루 아침에 바꿔 놓았다. 萬卷堂을 일컫는 藏書家가 속속 登場하였고, 19세기로 넘어가면서는 3, 4만권을 헤아리는 엄청난 規模의 藏書로 擴張되었다. 沈象奎(1766-1838)는 그의 書齋 嘉聲閣에
무려 4萬卷의 各種 善本과 稀貴本을 所藏하고 있었다. 嘉聲閣의 扁額은 翁方綱이 80세 때 써준 글씨였고, 네 채의 附屬 建物을 두어 4萬卷의 藏書를 經史子集으로 나누어 收藏하였다. 가히 公共圖書館 規模의 尨大한 藏書였다. 室內 裝飾도 豪華의
極을 달려, 象牙로 만든 冊床과 壁을 채운 全面 거울, 그밖에 온갖 華麗한 彫刻과 裝飾으로 꾸며졌다.
中國에 간 使臣 行次의 重要한 일은 書冊과 奢侈性 消費財의 購入이었다. 譯官은 물론이고 使行員과 非公式 隨行員들은
北京의 書店街인 琉璃廠의 書舍를 돌면서 購入하고자 하는 書目을 들고 다니며 값을 아끼지 않고 稀貴本과 新刊 書籍을
싹쓸이 해 갔다. 어떤 때는 王命에 의해 《古今圖書集成》 같은 巨帙의 圖書를 購入해 오는 任務가 附與되기도 했다.
當時 琉璃廠을 통해 들어온 書冊들은 겉으로는 전통적인 性理學 書籍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稗官小品과 百科全書的 叢書
類 書籍들이 더 많았다. 《古今圖書集成》이나 《昭代叢書》,《檀几叢書》와 같은 尨大한 叢書들이 들어오면서 이를 본뜬 著作들이 만들어졌다.
最高 地位인 領議政까지 지낸 李相璜 같은 이는 稗說에 癖이 있어, 新刊으로 刊行되는 小說冊마다 반드시 구해 읽자, 燕京 가는 譯官들이 다투어 구해 바쳐 소설책만 수천 권을 所藏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西廂記》를 몹시 좋아하여 밥 먹을 때
나 便所에 갈 때나 손에서 놓지 않아 西廂癖이 있단 말을 들었다. 이 時期에 오면 藏書도 趣向에 따라 分化가 이루어졌던
셈이다.
書籍들이 活潑히 流通되면서 知識産業 市場에도 큰 變化가 일어났다. 中國의 書冊을 벤치마킹한 새로운 形態의 知識 經營
이 流行했다. 物的 土臺의 變化가 知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이들 著作들을 貫通하는 著述 原理는 널려있
는 情報를 蒐集 排列해서 體系的이고 活用 可能한 知識으로 탈바꿈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時期 知識市場의 가장 强力한
原理요 基本 原則이었다. 當時의 知識情報社會가 情報의 量보다 質을 重視하는, 規模의 經濟에서 速度의 經濟를 追究하는 패턴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以前 時期 聖人의 말씀에만 붙일 수 있었던 ‘經’이란 表現을 이들은 ‘不經’스럽게도 비둘기와 앵무새 같은 사물의 이름 뒤에 서슴없이 붙였다. 예전에는 玩物喪志라 하여 禁忌視되었던 事物에 대한 關心은 어느새 格物致知의 자리로 位置가 格上되었다. 以前까지 事物은 마음 工夫와 理致 探究의 手段에 不過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自體가 探究의 對象으로 昇格되었다.
編輯된 內容의 層位도 多彩로웠다. 關心 領域은 앵무새나 비둘기, 담배와 같은 個人的인 趣味의 次元부터, 天然痘나 수레
나 배의 制度, 武藝實技 등 社會 懸案이나 民生 또는 國防과 關聯된 有用한 情報 分野까지 擴張되어갔다.
日本에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던 李德懋는 各種 書籍에서 모은 日本 關聯 情報를 編輯해 《蜻蛉國志》를 펴냈다.
成大中과 元重擧도 각각 《日本錄》과 《和國志》를 競爭的으로 엮었다.
당시 知識人들 사이에 日本에 대한 情報 要求가 爆發的으로 늘어난 事情을 짐작케 한다.
《武藝圖譜通志》는 무려 148종의 國內外 武藝書를 參考해서 編輯한 綜合 武藝 敎科書다. 黑山島에 귀양 갔던 丁若銓은
물고기에 관한 情報를 整理해서 《玆山魚譜》를 펴냈다. 金鑢는《牛海異魚譜》를 엮었다. 李書九는 앵무새 사육 경험을
살려 《綠鸚鵡經》을 썼고, 柳得恭은 觀賞用 비둘기 飼育에 趣味가 있어 《鵓鴿經》을 지었다.
李鈺이 지은 《烟經》은 담배에 관한 자료를 다 모은 것이다.
이렇듯 한꺼번에 일어난 變化 앞에 18세기 朝鮮 社會는 휘청했다. 한쪽에서 利用厚生과 經世致用을 외칠 때, 한쪽에서는
中國製 物件이라면 四足을 못 쓰는 豪華奢侈 風潮도 蔓延했다. 朴齊家는 《北學議》를 지어 中國을 배워야 하는 까닭을
說破했지만, 中國製에 換腸 들렸다 하여 唐癖 또는 唐魁의 非難도 同時에 들어야 했다.
3
謙齋 鄭歚의 京郊名勝帖 가운데 讀書餘暇란 작품이 있다. 여름날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마당에는 고급스런 陶瓷器 花盆 두 개가 받침대 위에 놓였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 앉아 화분에 핀 꽃을 감상한다.
한편 國立中央博物館 所藏의 太平城市圖에는 高級 花盆에 담긴 花卉를 파는 商店과 三層으로 틀어 올린 盆栽松, 또는
怪石을 가마에 싣고 부지런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그림2).
18세기 들어 花卉 栽培와 庭園 經營이 웰빙 붐을 타고 크게 盛行했다. 吳昌烈이 〈看花篇〉이란 시에서 “나는 어린 꽃
기르길 어린 자식 기르듯 했고, 이름난 꽃 아끼기를 명사를 아끼듯 했다.(我養穉花如穉子, 我愛名花如名士)”라 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당시에는 꽃에 미친 사람이 참 많았다. 承旨 朴師海는 梅花에 癖이 있었다. 안채에서 자는데, 눈보라가 크게 몰아쳤다.
梅花가 얼까 봐 걱정이 된 그는 덮고 있던 하나 뿐인 이불로 梅花를 칭칭 둘렀다. 벌벌 떨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안 춥겠지?” 當時 文人들의 花卉癖이 잘 나타난 有名한 逸話다.
園藝에 대한 需要가 爆發的으로 增加하자, 자연스레 이를 供給하는 花卉 商人들이 생겨났다. 弼雲臺 아래 樓閣洞과 桃花
洞 淸風溪 등에는 衙前으로 있다가 물러난 뒤 盆栽나 花卉 栽培로 生計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이한 등걸에 접붙인 梅花나 怪石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盆栽, 층층이 꼬아 올려 높은 곳에 열매가 달리게 한 層石榴,
花盆 하나에 서너 가지 빛깔의 꽃을 피운 菊花 등이 특히 人氣가 높았다.
趙秀三의 文集에는 盆松만 專門的으로 取扱하는 趙八龍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桃花洞 어귀에 살며 盆에 담긴 온갖 기이한 形象의 소나무를 팔았다. 그의 소나무 盆栽는 서울의 부잣집에서 값을 아끼지 않고 사갔다. 사람들은 그를
愛松老人으로 불렀다.
湖南에서 漕運船이 쌀을 싣고 올라올 때면 梔子와 石榴, 冬栢과 映山紅, 百日紅과 棕梠, 倭철쭉 또는 柚子 같은 南方의
花卉들이 배에 가득 花盆에 담겨 실려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菊花 栽培도 크게 盛行했다. 白鶴翎이니 醉楊妃니 하는
外來 品種 菊花의 이름은 이 時期 여러 文人들의 文集에 수도 없이 나온다(그림3).
白雲朶 같은 日本 稀貴 品種이 새로 들어와 話題가 되기도 했다. 檗溪 북쪽 薇源村에 은거했던 沈錫龜 같은 사람은 혼자서
48종의 菊花를 栽培했던 것으로 有名했다. 申緯의 시에 보면, 국화꽃 파는 소리가 온 거리에 가득한데, 해마다 다른 品種이 나와 品形을 다툰다고 했다.
姜彛天의 記錄에는 菊花栽培 專門家인 金老人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국화꽃을 손톱만한 것부터 한자 남짓 큰 것까지
自由自在로 피워냈고, 심지어 검은 빛깔의 菊花까지 피웠다. 꽃 피는 시기도 마음대로 調節했고, 한 가지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꽃을 피워내기까지 했다. 그는 그 方法을 秘密에 부쳐 이것으로 먹고 살았다.
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徐有榘의 《藝畹志》에 한 줄기에서 여러 빛깔의 꽃을 피우는 秘法이 실려 있었다.
붉은 꽃을 희게 만들려면 硫黃을 태운 연기를 꽃받침에 쐬어 奪色시켰다. 검은 꽃은 흰 꽃이 막 피려 할 때 진한 먹을
기름 한 두 방울에 섞어 꽃잎에 떨구거나, 먹물을 젖에 적셔 칫솔로 몇 차례 뿌려 먹물이 꽃잎에 스며들게 해서 만들었다.
한 마디로 競爭力 있는 花卉 商品을 出市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丁若鏞도 서울 집에 18종의 菊花 花盆과 그 밖의 여러 種類의 花卉를 栽培했다. 康津 時節 弟子인 黃裳에게 써준 글에는
뜰 앞에 울림벽을 하나 세워 石榴․梔子 등 갖은 種類의 花盆을 品格을 갖춰 마련하되, 菊花는 48종은 되어야 具色을 갖추
었다 할만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국화꽃 화분을 등불 앞에 비춰 그 그림자를 감상하는 인상적인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것도 있다(그림4).
이밖에도 화분 하나에 3색 국화 또는 4색 국화를 피우는 재주를 부려가며 園藝의 技術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갔다.
재배가 단순히 재배로만 그치지 않고, 선비들의 雅會와 雅集으로 이어져 文人雅士의 淸閑과 興趣를 돋우는 구실로까지
擴張된 것이다.
中國에 使臣 갔던 사람들이 水仙花 球根을 가져오면서 水仙花 붐도 일었다. 나중에는 너나 없이 가져오는 바람에 國法으
로 水仙花의 搬入을 禁止해야 했을 정도였다. 南國의 植物인 芭蕉도 士大夫의 집안에서 栽培했다.
이 時期 文士들의 庭園을 그린 그림에는 으레 芭蕉가 그려져 있다. 溫室 裝置까지 갖춘 집도 적지 않았다.
園藝 붐이 이렇듯 競爭的으로 造成되다 보니 庭園 造景에 대한 關心도 커졌다. 당시 文集에서 庭園의 具體的 配置를 描寫
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 18세기 文集에서 主人의 姓氏를 따거나 固有한 이름이 붙은 庭園을 확인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시기 文集에는 各種 庭園의 具體的인 이름이 많이 登場한다.
曹園․吳園․李園․徐氏園 등 主人의 姓氏를 딴 庭園의 이름과, 梅竹園․三松園․梨園․栗園․七松園․百榴園 등 代表的․ 花木의
이름을 딴 정원, 駱園․南園 등 위치를 나타내는 정원, 和肥園․率更園․眞泠園․日涉園․逍遙園․積翠園 등 의미를 딴 庭園
이름도 있다. 이는 전에 볼 수 없던 현상으로, 이 시기 정원 조성이 얼마나 競爭的으로 갑작스레 붐을 이루었는지 잘 보여
준다. 이런 것은 물론 經濟的 餘裕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庭園을 經營할 餘力이 없을 境遇에는 意園, 烏有園, 將就
園 등 想像 속의 庭園을 꾸며 글로 남기는 일도 流行처럼 번졌다.
庭園 造成 붐을 타고 怪石에 대한 需要도 부쩍 늘어났다. 申緯는 중국에 使臣 갔다가 돌아오면서 수레 가득 怪石만 싣고
돌아와 話題를 뿌렸고, 李羲天 같은 이는 집에 1만 점의 壽石을 갖춰두고 堂號를 아예 萬石樓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柳璞이 黃海道 白川에 경영한 百花庵은 當代 내로라 하는 文人들이 모두 記文과 詩를 써주었을 만큼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花卉 栽培 經驗과 哲學을 담아 《花庵隨錄》이란 印象的인 책을 남겼다. 어느 집에 奇異한 花卉가 있단 말을
들으면 千金을 주고라도 반드시 구해왔고, 中國을 往來하는 배편에 부탁하여 外國의 花卉를 구해오기까지 했다.
이러한 消費的 形態의 園藝 趣味가 活性化되는 바탕에는 以前 같으면 玩物喪志라 하여 禁忌視 되던 것이 格物致知의 자리
로 昇格 되어 도리어 文人의 雅趣로 받아들여지는 認識 變化를 前提로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무슨 熱風이라도 분 것처럼
相互 相乘作用을 일으키며 園藝 붐이 擴散되어 갔다. 性理學的 이데올로기로 武裝된 이전 時期 知識人의 입장에서는 도저
히 있을 수 없는 變化가 이루어졌던 셈이다.
이렇듯 18세기 중반 以後 園藝 趣味와 庭園 造成은 서울 近畿地域의 文人知識人層을 中心으로 갑작스런 붐이 일었다.
庭園을 가꾸지 않고, 花盆 몇 種類 쯤 갖추지 않고는 文人의 雅趣를 모르는 沒趣味로 몰릴 雰圍氣로까지 바뀌었는데,
都市文化의 發達과 軌를 같이하여 삶의 質을 向上시키고, 自然과 가까이 하고픈 熱望이 가져온 變化였다.
4
18세기에는 한마디로 說明할 수 없는 變化가 同時多發的으로 일어났다. 18세기는 世界史的으로 볼 때도 確實히 特別한
世紀였다. 知識의 패러다임이 變化하면서 世界와 人間에 대한 解釋의 틀도 바뀌었다. 近代의 조짐은 西洋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 朝鮮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歷史家들이 ‘巨大한 矛盾의 용트림’이라고 表現하는 18세기의 變化는
全世界的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同時多發的이다.
18세기 들어 西歐 中世의 形而上學的 觀念理性은 合理主義的 啓蒙哲學에 자리를 내준다. 이들은 삶과 世界의 秩序를 科學
的 秩序로 再編하고자 했다. 宗敎의 束縛, 理念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世俗的 幸福을 追求하고, 救援의 美名 아래 恣行된
온갖 偶像과 暴力을 解體하기 시작했다. 基督敎의 자리에 朱子主義를 두면 朝鮮의 狀況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西歐 啓蒙主義가 合理的 理性과 함께 情熱的(Passion) 人間을 志向할 때, 18세기 朝鮮은 朱子學의 洗禮를 벗어 던지고,
實事求是의 合理性과 同時에 癖과 癡의 미친 熱情을 擁護했다. 디드로가 《哲學的 思考》에서 “사람들은 왜 情熱에 대해
友好的으로 말하면 理性을 侮辱하는 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人間의 靈魂을 偉大하게 高揚시킬 수 있는 것은
偉大한 情熱뿐이다”라고 투덜댈 때, 朴齊家는 “세상에 무언가에 미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볼테르가 啓蒙哲學의 代表的 著作으로 꼽는 《百科事典》을 ‘人間 精神 進步의 記念碑’라고 하며, 世上의 모든 事物을 項目化하여 알파벳 順序에 따라 配列하고 說明할 때, 朝鮮의 知識人들도 百科全書的 性格의 叢書 著作에 情熱을 쏟았다.
이것은 宗敎에서 科學을 分離하고, 理念에서 人間의 삶을 解放하는 權力의 再配置 過程이기도 했다.
西洋에서, 强要된 敬虔함과 僞善의 歲月이 지난 후, 快樂의 擁護와 官能의 狂氣가 휩쓸 때, 이곳에서도 웰빙의 美名 아래
온갖 骨董品 蒐集을 비롯하여 豪華奢侈 風潮와 風俗의 墮落이 恣行되었다. 어디서나 下層 百姓들의 삶은 여전히 慘酷한
것마저 꼭 같았다.
道德論者들이 볼테르나 디드로, 루소 등을 監獄에 가두고 抑壓한 것처럼, 朴趾源과 金鑢, 李鈺 등은 不穩한 文體로 不穩한 思想을 傳播시킨다 하여 國王 正祖에게 反省文 提出을 要求받고 科擧合格이 取消되었으며, 反體制 人物로 烙印 찍혀 陰濕
한 그늘에 묻혀 있어야 했다.
18세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맸던 自生的 近代化의 可能性을 본다. 그런데 産業革命으로 이어진 西歐와 달리, 어째서 우리에게 近代는 여전히 他者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들과 우리가 共有했던 問題意識은 어느 瞬間 우리에게는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未完의 可能性으로 끝나고 말았다. 日本과 朝鮮의 近代에 대한 差異 또한 正祖와 明治의 差異만으
로는 說明할 수가 없다. 보다 根本的이고 綿密한 比較의 視野를 마련할 必要가 있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
18세기 들어 갑자기 ‘벽(癖)’ 예찬론이 쏟아져 나온다. 일종의 마니아 예찬론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癖)’이란
말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제가(朴齊家)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
연히 말했다. 지금도 낭비벽, 도벽 등 좋지 않은 어감으로 쓰는 이 말이 이때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또 ‘치(癡)’,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관습적 기준에서 볼 때 비정상적으로 미친 ‘벽’이 사회적
통념으로는 ‘치’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 설치(雪癡)․치재(癡齋)․매치(梅癡)․간서치(看書癡)․석치(石癡) 등 치자가 들어간
이름이나 호가 부쩍 많아지는 것은 그 반영이다.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 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여겼다. 미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욕 안 먹고 사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지식의 패턴이 달라지고, 정보의 인식이 바뀌었다.
삶의 목표 또한 궤도 수정이 불가피 했다.
편집광적인 정리벽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이 동지적 결속 아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성현의 도를 실현하는 군자적 삶의 이상은 시정(市井)의 목소리에 점차 파묻혔다.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현격하게 벌어졌다.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사정의 칼날을 빼들지 않을 수 없었으리 만치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서울 문화계의 이런 풍조는 그저 해괴한 망국의 조짐으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았다.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에 있다. 정보 처리 방식과 정보의 유용성에 대한 판단 근거가 이때 와서
바뀌었다. 물적 토대의 변화도 한 몫 했다. 이에 힘입어 전에 보지 못한 괴상한 지식인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무엇에 미쳤던가?
정보 검색의 대가들 - 새로운 경(經)의 탄생
수집벽, 정리벽은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징이다. 그들은 낯선 것이 보이기만 하면 자료를 수집했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전적을 뒤졌다.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꼼꼼히 차례 매겨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은 꽃․새․벼루․골동품․칼․책․여행․수학․그림․물고기․무예․출판․표구․글씨 등에 미쳐 마침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연경에서 초록 앵무새 한 마리를 들여왔다. 그는 앵무새를 새장에 기르며 관찰한 내용과
관련 자료를 찾아 꼼꼼히 정리했다. 완성된 초고를 이덕무와 유득공에게 보였다. 두 사람은 더 많은 자료를 뒤져 앵무새에 관한 새로운 기록들을 찾아냈다. 초고가 그에게 되돌아왔을 때, 분량이 두 배 가량 늘어났다. 이서구가 17세 때 일이다.
박지원이 책 이름을 《녹앵무경(綠鸚鵡經)》으로 붙이고 서문을 써줌으로써 책은 완성되었다.
이들의 집체(集體) 작업은 몹시 흥미롭다. 행세하는 양반가의 자제가 성현의 말씀을 익힐 시간에 앵무새 사육에 몰두해
그 내용을 책으로 쓸 생각을 했다. 그러자 곁에서 함께 거들어 앵무새에 관한 고금의 기록을 금세 한 자리에 다 모았다.
마치 정보 검색 능력을 두고 한바탕 경쟁이라도 벌인 형국이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득공은 관상용 집비둘기를 사육하면서, 자신의 체험과 정보를 종합하여 《발합경(鵓鴿經)》을
썼다. 최근 미국 버클리 대 아사미 문고에서 발견된 이 책은 집비둘기 사육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23종의 비둘기를
생김새와 특징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좋은 비둘기 판별법과 품종간의 교배방법, 비둘기의 성질과 집 만들기, 잡는 그물에 이르기까지 없는 내용이 없다. 이 책만 있으면 시청 앞 광장의 비둘기 이름을 품종별로 다 붙일 수가 있다.
이밖에도 그는 호랑이에 관한 내용을 검색해서 정리한 《속백호통(續白虎通)》이란 책도 썼다.
두어 해 전 영남대 도서관에서 이옥(李鈺, 1760-1815)이 친필로 쓴 《연경(烟經)》이 나왔다. 《연경》은 연초 즉 담배에
관한 책이다. 장절을 나눠 담배 농사의 단계별 주의 사항을 적는 한편, 담배의 문화사적 정리까지 시도했다.
가짜 담배 식별법에서 담배에 얽힌 전설, 심지어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법까지 소개했다.
담배 피울 때 쓰이는 12종의 도구도 하나하나 설명했다. 애연가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하다.
그는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지 200년이 넘었고, 온 나라 백성이 모두 즐기는 기호품인데도, 정작 담배에 대해 정리한
저술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안타까워 이 책을 썼노라고 했다. 자신은 담배에 벽이 있어, 남의 비웃음도 아랑곳 않고 이 작업
을 한다고 적었다.
이옥은 《백운필(白雲筆)》이란 저술도 남겼다. 새․물고기․짐승․벌레․꽃․곡식․과일․채소․나무․풀 등 모두 10개 부문에 걸쳐
164항목의 기사를 소개한 책이다. 자신이 직접 견문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채록한 것으로, 그의 관심 폭이 얼마나 다양했는
지 알기에 충분하다. 꽃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시 서울 지역 원예의 활황과 꽃시장의 존재에서부터 각종 화훼의 품종과 재배방법까지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는 늘 이런 종류의 글만 썼다. 정조는 문체반정의 와중에 특별히 그의 문체를 불온하다고 지목하여, 그의 과거 합격을
취소시키고 멀리 부산의 기장으로 군역(軍役)을 보내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체재의 검열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귀양 가는 길에서도 가만있지 못하고 경상도 사투리의 특징과, 주택의 구조와 특산물, 도중에 만난 고적(古蹟)등을 특유의 발랄한
문체로 정리했다.
한편 이덕무(李德懋, 1741-1807)는 밀랍으로 매화를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잎은 도장돌에 잎사귀 모양을 파서, 종이를 넣고 눌러 말린 뒤 호호 불어 떼어내 가위로 오려냈다. 꽃은 밀랍으로 만들었다. 그는 제작의 전 과정을 도판 설명까지 보
태서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이란 소책자로 꾸몄다. 연암 박지원도 이 기술을 전수 받아 자신이 직접 만든 조매(造梅)
가 어느 한 구석이라도 부족하면 받은 돈을 환불해 주겠노란 보증서까지 얹어 돈을 받고 팔았다. 유득공은 밀랍 매화를
만드는 집이라 하여 납매관(蠟梅館)이란 편액까지 내걸었다.
전 같으면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쓸데없는 데 정신을 판다고 크게 야단 들었을 일을 이들은 거리낌 없이 했다.
담배나 앵무새, 비둘기 같은 미물에다 ‘경(經)’이란 말을 붙였다. 이전시기까지 경은 성인의 말씀에만 붙일 수 있는 표현
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물고기와 곤충과 채소, 방언과 속담에까지 확산되었다. 세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새로운 ‘경(經)’은 자체 검열로 솎아지고, 후손들의 염려로 걸러져 정작 자신의 문집에조차 실리지 못했다.
남은 것도 서문만 전하거나, 저자도 잊혀진 채 필사본으로 떠돌다가 운 좋게 생존한 것들뿐이다.
그들이 했던 일은 오늘날도 아무도 하려들지 않는다. 누가 지금 판매되는 담배의 종류와 각각의 맛과 가격, 어떤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담배를 피우며, 상표는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책으로 쓰겠는가? 성냥과 라이터의 종류와 재떨이의 각종 생김새를 그림과 글로 정리해 남기려 하겠는가? 금연운동에 대항하는 요령, 애연가 클럽을 소개하고,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방법을 정리하려 들겠는가?
나는 강남의 술집에서 나눠주는 술집 광고 전단을 여러 해 째 모으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이것도 나중에는 훌륭한 풍속사의 한 자료가 되리라고 했다. 서울과 부산과 대구의 광고 방식이 같지 않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여러 해 모은 그의 자료는 웬 해괴한 짓이냐며 그의 아내가 박스째 내다버림으로써 무위로 끝났다. 하지만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들의 방식은 지금 보더라도 참으로 신선하다. 확실히 전대의 지식인과는 정보에 접근
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참판을 지낸 이의준(李義駿, 1738~1798)은 《옥해(玉海)》란 책에 벽이 있었다. 《옥해》는 송나라 때 왕응린(王應麟)이
펴낸 2백 권에 달하는 총서다. 21문(門) 240여 항목에 걸쳐 천문 지리에서 길상선사(吉祥善事)에 이르기까지 온갖 내용을
모은 책이었다. 그는 평생 이 책만 아껴, 단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밥
먹을 때도 변소 갈 때도 반드시 이 책만은 지니고 갔다. 밖에 나들이 갈 때도 그랬다. 젊어서도 그랬고 늙어서도 그랬다.
그가 말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하루는 밤에 관아에 불이 났다. 잠이 덜 깬 채 뛰쳐나온 그는 뒤늦게야 《옥해》전질
을 방에 두고 나왔음을 알았다. 큰 소리로 “내 옥해! 내 옥해!”하고 외치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기 속에 뛰어들었다
가 질식해서 죽었다.
홍한주(洪翰周)는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벽(癖)을 ‘남들이 즐기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한 후
이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벽(癖)이 제 몸이 죽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게 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판서 윤양래(尹陽來, 1673-1751)의 상복벽(喪服癖)을 소개했다.
윤양래는 상주가 입던 상복과 두건을 모으는 벽이 있었다. 친척이나 벗이 탈상(脫喪)하는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날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상주가 입던 상복을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 이렇게 모은 상복과 두건이 백 벌이 넘었다.
비가 와서 손님이 뜸한 날만 되면 그간 모아둔 상복을 방과 마루에 잔뜩 늘어놓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벽 치고는 해괴한 벽이다.
중국에 사신 갔던 신위(申緯, 1769-1847)는 돌아오는 수레에 기석(奇石)만 싣고 왔다. 표면에 이끼가 낀 돌, 구멍이 숭숭
뚫린 돌 등을 수레에 가득 실어 수레의 주인이 돌인지 사람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희한한 광경을 그는 동행한 화가에
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자신은 시로 지어 노래했다. 그는 돌에 벽이 있어 가는 곳마다 돌 줍느라 바빴다.
심지어 근처 나무꾼까지 이상한 돌만 보면 그에게 가져다 줄 정도였다.
이유신(李維新)이란 화가가 있었다. 그도 괴석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가 정초에 새배 드리러 신위의 집을 찾았다가 책상
에 놓인 괴석을 보았다. 절하는 것도 잊은 채 괴석을 만지작거리며 차마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하도 좋아하니까 신위
가 종을 시켜 그 돌을 가져다주게 했다. 그는 환호작약하여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했다. 그의 호는 석당(石堂)이었다.
김억(金檍)은 영조 때 음악가다. 중국에서 들여온 양금(洋琴)을 처음으로 제대로 연주했던 사람이다. 그
는 칼 수집에 벽이 있었다. 칼마다 진주와 자개를 박아 방안에 걸어 놓고, 날마다 한 자루씩 바꿔 찼다.
1년 내내 바꿔 차도 끝이 없었다는 전언이다.
정철조(鄭喆祚)는 벼루에 미쳤던 사람이다. 호도 아예 돌에 미친 바보라 해서 석치(石癡)라고 지었다. 주머니에 칼을 들고
다니면서, 돌만 보면 즉석에서 벼루를 깎았다. 그리고는 벗들에게 그저 나눠주었다. 그는 엄연한 벼슬아치였다.
벼루를 깎아 돈을 벌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서 했다.
당시 사대부로 그가 깎은 벼루를 하나쯤 갖지 못하면 수치로 알 정도였다.
김석손(金祏孫)은 매화시에 벽이 있었다. 집에 수십 그루 매화를 심어 놓고, 시에 능하다는 사람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매화시를 받았다. 그렇게 모은 매화시 두루마리가 소 허리통보다 굵었다. 사람들은 그를 매화시전(梅花詩顚), 즉
매화시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18세기에는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몰두와 집착을 그들 스스로는 몹시 자랑스럽
게 여겼다. 벽이 없는 인간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고,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확실히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코드였다.
화가 김덕형(金德亨)은 꽃 그림에 미쳤다. 그는 1년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꽃밭에서 살았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잎새의 모습을 하나하나 사생하여 세상에 단 한 권뿐인 《백화보(百花譜)》란 꽃 그림책을 펴냈다. 그가 꽃밭에 나가 있을 때는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비웃었다.
박제가와 유득공이 이 미친놈을 위해 서문을 써주었다. 박제가는 이렇게 썼다.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
히는 것은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계로 삼을진저.” 벽도 없이 무언가에 미칠 줄도 모르면서, 나는 저런 멍청이가 아니
어서 참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보고 부끄러운 줄을 좀 알라고 일갈한 것이다. 그는 문화의 위대한 성과가 언제나 이런 미치광이들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자 기예를 지닌 장인에 대한 대접도 달라졌다. 최천약(崔天若)은 영조 때 평민으로 조각에 벽이 있었다. 쇠붙이나 나무, 돌을 가리지 않고 조각을 했다. 무과에 응시했다 낙방하고는 노자가 떨어져 약방 앞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약방에서 좀먹은 천궁(川芎) 뿌리를 내다 버렸다. 심심하던 차에 그는 무심코 뿌리에 용을 새겼다. 기막힌 솜씨에 크게 놀
란 약방 주인이 그를 대감 이요(李橈)에게 소개했다. 그 길로 그는 세상을 놀래키는 장인이 되었다.
영조 앞에 불려가 고장 난 자명종을 고쳤다. 나중에는 아예 그 구조를 살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명종을 만들어버렸다.
그는 이 재주로 무공(武功) 2품직에 발탁되었다.
편집광들, 세계의 질서를 편집하다
정조 때 일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륭원에 해마다 나무 심은 장부가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데도, 정작 심은 나무가
몇 그루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답답해진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 많은 문서를 일일이 점검하여 1권을 넘지 않게 간추려 올
것을 명했다. 다산은 물러나와 심은 시기와 장소별로 구분하여 가로 12칸, 세로 8칸의 도표로 만들어 129,712 그루의 나무
를 단 한 장의 보고서로 압축해 임금께 올렸다.
내가 아는 한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최고의 편집자요, 지식 경영의 귀재다. 그는 적어도 정보를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40세에서 57세까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에 5백여 권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탁월한 편집 역량 때문이다.
《목민심서》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25사와 역대 문집 등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일과 관
련된 사례를 가려 뽑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역대 문헌에서 추려낸 내용 카드의 양이 우선 엄청나다. 전체 목차를 보면
부임에서 이임까지의 단계를 12항목으로 나누어 사례를 정리했다. 물론 이 엄청난 작업을 그 혼자 한 것은 아니다.
강진의 제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1차 자료를 선별해 베껴 쓰고 분류했다. 다산은 이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한 총 기획자요 편집자였다.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서 말 구슬이 단번에 한 꿰미로 꿰어졌다.
다산은 6남 3녀를 낳아 4남 2녀를 대부분 마마로 잃었다. 그는 이 기막힌 심정을 담아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집했다. 모두 63종의 의서(醫書)에서 천연두 관련 내용만 추려내, 예방법과 치료법을 내용별로 정리한 것이다. 분류 방식은 《목민
심서》와 다를 것이 없다. 예방법과 초기 증세, 유사 증세, 진단과 처방, 속방(俗方) 등을 항목별로 정리하고, 부록에서는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했다. 병에 대해 잘 몰라 여러 자식을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낸 절통한 심정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부모들이 겪지 않게 하려는 거룩한 마음까지 담겨있다.
다산의 다른 저술인 《경세유표》《흠흠신서》와 지리서인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 등 대부분의 다른 저술도 모두 기존 정보들을 검색하고 재배열해서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종합하여 편집한 것들이다.
그에게서 훈련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편집자요 학자로 성장했다. 다산이 우리나라의 속담을 분류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펴내자, 이강회(李綱會)는 이를 보충해 《방언보(方言補)》를 썼다. 정약전이 미완성 필사본으로 남긴 《현산어보》는 그 후 다산이 이청(李청)을 시켜 수많은 문헌 자료를 찾아 보충하여 완성했다. 엄밀히 말해 《현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의 공저다.
최근 신안군 우이도에서 필사본으로 발견된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에는 당시 현안이었던 배와 수레의 제도와
개선방안에 관한 분석적 논문들이 실려 있다. 이들 모두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고, 문헌을 뒤져 관련정보를 찾아내던 강진 시절의 제자들이다. 강진 시절의 모든 성과는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낸 집체 작업의 결과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모두 16항목으로 나눠진 백과전서적 농서(農書)다. 채소 화훼 재배에서
음식조절방법, 의약과 의례, 선비의 취미생활, 주거와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18세기적 웰빙 교과서다. 한 사람이 취급한 정보의 양 치고는 너무 엄청나 경이
롭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제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 하고 편집해냈다. 일본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덕무는 각종 서적에서 정보를 모아 일본입문서인 《청령국지(蜻蛉國志)》를 펴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정리한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24반 무예를 도해(圖解)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무려 148종의 국내외 무예서를 참고해서 편집한 종합무예
교과서다. 무예를 몰랐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서얼인 장용영(壯勇營) 군관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각종 무기의 운용동작과 실기자세를 도해하여 펴냈다. 도화서(圖畵署)의 화공들이 동원된 비주얼한 도판 자료는 24반 무예의 복식과 동작의 현대
적 복원과 재현이 가능했을 정도로 치밀하고 꼼꼼했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제한된 정보가 독점적으로 유지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류의 전집들과 총서류의 저작들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이런 총서들은 한 질이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다.
만권루(萬卷樓)의 장서가들이 연이어 등장했고, 서적유통이 활성화되었다.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했다.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일상의 허접스런 놀이나 풍습, 시정(市井)의 이야기도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편집되었다. 모든 지식이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편집된 내용의 층위도 다채로웠다. 앵무새나 비둘기, 담배와 같은 개인적인 취미의 차원부터, 천연두나 수레나 배의 제도, 무예실기 등 사회 현안이나 민생 또는 국가와 관련된 유용한 정보 분야까지 확장되어갔다. 다룬 층위는 달라도 지식과
정보를 재배열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던 편집의 원리는 한결 같았다.
나는 나다
박지원의 〈염재기(念齋記)〉에는 잠에서 깬 뒤, 자기가 없어졌다며 사라진 자신을 찾으러 알몸으로 거리로 뛰쳐나간
송욱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의 실화다. 자의식의 과잉으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인간이 절망적 현실 앞에서 급기
야 미쳐버린 이야기다. 이후 그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제 답안지에 제 스스로 만점으로 채점을 하고 나오는 기행을
서슴지 않는다.
18세기 들어 지식인의 자의식은 제도와의 갈등 속에 부쩍 비대해진다. ‘그때 저기’의 도(道)를 추구하던 가치관은 ‘지금
여기’의 진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의식은 빠르게 변해간 반면,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여기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생각은 바뀌었는데 이를 뒷받침해 줄 인프라는 구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문인들의 호나 문집 이름에는 시대와의 불화 속에 증폭되는 자의식을 암시한 것들이 많다. 최근 발견된 이서구
(李書九, 1754-1825)의 젊은 시절 문집 제목은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이다. 풀이하면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자문한다’는 뜻이다. 심능숙(沈能淑, 1782-1840)은 자기의 문집 표제를 ‘후오지가(後吾知可)’라 했다. ‘훗날의 내가 알아주면 그뿐’
이란 말이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 박지원이 서문을 써준 역관 이홍재(李弘載)의 문집명은 ‘자소집(自笑集)’이다. 남에게 보여주자고 쓴 것이 아니라 그저 혼자 보고 웃자고 쓴 글이라고 했다.
자못 포스트모던한 명명들이다.
용에게 여의주가 소중하듯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소중하다. 사람들은 여의주만 귀하게 보고 말똥은 우습게 안다.
하지만 나는 내 말똥을 더 귀하게 여기겠다. 유금(柳琴)은 이런 취지에서 자신의 문집 제목을 ‘낭환집(蜋丸集)’이라 했다.
말 그대로 ‘말똥구리 문집’이다.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을 닮겠다는 뜻으로 문집 이름을 《영처집
(嬰處集)》이라고 적었다.
신의측(申矣測)은 ‘나에게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를 환아(還我)로 지었다. 이용휴가 그를 위해 〈환아잠(還我箴)〉을 지었다. 거짓 나를 쫓느라 잃어버린 참 나를 되찾아, 다시는 ‘나’를 떠나지 않는 주체적 삶을 살라고 권면했다.
이덕무는 흔해 빠진 명숙(明叔)이란 자를 무관(懋官)으로 바꾸었다. 이름은 남과 나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나만의 이름을 가져 내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모두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줄을 안다 해서 별호를 ‘자지자불지선생(自知自不知先生)’이라 짓는가 하면, 깔깔대며 웃는 사람이
란 뜻의 가가생(呵呵生)이나, 멍청이란 의미의 우부(愚夫), 들판에서 굶주리는 사람이라 하여 야뇌(野餒)니 하는 이상한
이름들을 즐겨 지었다. 신분이 천했던 시인 이단전(李亶佃)은 호가 필재(疋齋)였다. 단전(亶佃)은 뜻으로 풀면 ‘진짜 종놈’
이란 뜻이다. 필재(疋齋)의 필(疋)자는 파자(破字)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나는 진짜 종놈, 하인에 불과하다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름으로 세상을 조롱했다.
그들의 자의식이 지향하는 가치는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었다. 중국이 아니라 조선,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눈앞의 진실이었다. 이덕무는 자신의 시에서 “나는 지금 사람이라 또한 지금 것을 좋아한다.(我是今人亦嗜今)”고 했다. 옛것을 따르느라 참
됨을 잃기보다, 눈앞의 진실을 따르겠다는 의미다. 그러자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고 화답했다. 박지원은 조선 사람은 조선풍(朝鮮風)의 시를 짓는 것이 마땅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홍길주(洪吉周)는 사마천이 명나라 때 태어났더라면 《사기》를 쓰지 않고 《삼국지연의》나 《수호지》를 썼을 것이고,
지금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향랑전》 같은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했다. 전 같으면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입만 열면 요순의 정치를 말하고, 정주(程朱)의 학문을 추종하며, 이백과 두보의 시를 추수(追隨)하던 때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의 변화는 필연적이고, 변치 않을 모범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남의 떡이 제 아무리 커 보여도 내게 맞지 않으면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박지원이 들려주는 재맹아(再盲兒) 설화는 의미심장하다. 길 가다 보니 웬 젊은이가 울고 섰다. 왜 우느냐고 물었다.
원래 어려 장님이 되어 20년을 장님으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길 가다가 눈이 떠졌다. 너무 기뻐 집으로 가려 하니 골목은
갈림길이 많고 대문은 다 같아 제 집을 못 찾아 운다고 했다.
처방은 이렇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장님은 기뻐하며 지팡이를 더듬어 문제없이 제집을 찾아 갔다.
너는 그저 장님 주제로 살란 말이 아니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아지지 않는다. 문제는 집에서 눈 뜨지 않고, 도중에 눈
뜬데 있다. 그래서 눈을 뜨는 순간 그는 다시 눈이 멀고 말았다. 박지원의 생각에 눈 뜬 장님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었다. 눈만 뜨면 뭣 하는가? 정작 자아의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눈을 뜬 기쁨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좌표축을 세워 출발하라. 확장된 세계, 혼돈스런 정보 앞
에서 주체의 확립보다 절박한 것은 없다. ‘나’ 없는 세계는 카오스일 뿐이다. 이점은 인터넷 시대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한편 자각적 주체들의 동지적 연대감도 한층 커져갔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이나
윤광심(尹光心, 1751-1817)의 《병세집(幷世集)》은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기록이나 작품을 모았다.
이른바 ‘병세(幷世)’의식, 즉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집단의식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 흐름은 확산되어 이후 《이항견문록》, 《호산외사》 등 당대 시정(市井) 속 문인예술가 및 일민(逸民)들의 생생한 삶을 정리하는 노력으로까지 이어졌다.
꽃에 미쳐 정원을 꾸미다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가운데 독서여가(讀書餘暇)란 작품이 있다. 여름날 부채를
든 선비가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마당에는 고급스런 도자기 화분 두 개가 받침대 위에 놓였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 앉아
화분에 핀 꽃을 감상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고급 화분에 담긴 화훼를 파는 상점
과 삼층으로 틀어 올린 분재송(盆栽松), 또는 괴석을 가마에 싣고 부지런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18세기 들어 화훼 재배와 정원 경영이 웰빙 붐을 타고 크게 성행했다. 오창렬(吳昌烈)이 〈간화편(看花篇)〉이란 시에서
“나는 어린 꽃 기르길 어린 자식 기르듯 했고, 이름난 꽃 아끼기를 명사를 아끼듯 했다.(我養穉花如穉子, 我愛名花如名士)”
라 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당시에는 꽃에 미친 사람이 참 많았다. 승지 박사해(朴師海)는 매화에 벽(癖)이 있었다. 안채에서 자는데, 눈보라가 크게
몰아쳤다. 매화가 얼까 봐 걱정이 된 그는 덮고 있던 하나 뿐인 이불로 매화를 칭칭 둘렀다. 벌벌 떨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안 춥겠지?” 당시 문인들의 화훼벽이 잘 나타난 유명한 일화다. 승지라면 지금으로 쳐서 청와대 비서관이다.
원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자연스레 이를 공급하는 화훼 상인들이 생겨났다. 필운대 아래 누각동과 도화동 청풍계 등에는 아전으로 있다가 물러난 뒤 분재나 화훼 재배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이한 등걸에 접
붙인 매화나 괴석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분재, 층층이 꼬아 올려 높은 곳에 열매가 달리게 한 층석류, 화분 하나에 서너
가지 빛깔의 꽃을 피운 국화 등이 특히 인기가 높았다.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문집에는 분송(盆松)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조팔룡(趙八龍)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도화동 어귀에 살며 분에 담긴 온갖 기이한 형상의 소나무를 팔았다. 그의 소나무 분재는 장안의 부잣집에서 값을
아끼지 않고 사갔다. 사람들은 그를 애송노인(愛松老人)으로 불렀다.
호남에서 조운선(漕運船)이 쌀을 싣고 올라올 때면 치자와 석류, 동백과 영산홍, 백일홍과 종려, 왜철쭉 또는 유자 같은
남방의 화훼들이 배에 가득 화분에 담겨 서울로 실려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국화 재배도 크게 성행했다. 백학령(白鶴翎)이니 취양비(醉楊妃)니 하는 외래 품종 국화의 이름은 이 시기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수도 없이 나온다. 백운타(白雲朶) 같은 일본 품종이 새로 들어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수리 위 벽계(檗溪) 북쪽 미원촌(薇源村)에 은거했던 심석구(沈錫龜) 같은 사람은 혼자서 무려 48종의 국화를 재배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신위(申緯, 1769-1845)의 시에 보면, 국화꽃 파는 소리가 온 거리에 가득한데, 해마다 다른 품종이 나와 품형(品形)을 다툰다고 했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기록에는 국화재배 전문가인 김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국화꽃을 손톱만한 것부터 한자
남짓 큰 것까지 자유자재로 피워냈고, 심지어 검은 빛깔의 국화까지 피웠다. 꽃 피는 시기도 마음대로 조절했고, 한 가지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꽃을 피워내기까지 했다. 그는 그 방법을 비밀에 부쳐 이것으로 먹고 살았다.
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예원지(藝畹志)》에 한 줄기에서 여러 빛깔의 꽃을 피우는 비법이 실려 있었다. 붉은 꽃을 희게 만들려면 유황을 태운 연기를 꽃받침에 쐬어 탈색시켰다. 검은 꽃은 흰 꽃이 막 피려 할 때 진
한 먹을 기름 한 두 방울에 섞어 꽃잎에 떨구거나, 먹물을 젖에 적셔 칫솔로 몇 차례 뿌려 먹물이 꽃잎에 스며들게 해서
만들었다. 한 마디로 경쟁력 있는 화훼 상품을 출시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정약용도 서울 집에 18종의 국화 화분과 그 밖의 여러 종류의 화훼를 재배했다. 강진 시절 제자인 황상에게 써준 글에는
뜰 앞에 울림벽을 하나 세워 석류․치자 등 갖은 종류의 화분을 품격을 갖춰 마련하되, 국화는 48종은 되어야 구색을 갖추
었다 할만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에 사신 갔던 사람들이 수선화 구근을 가져오면서 수선화 붐도 일었다. 나중에는 너나 없이 가져오는 바람에 국법으
로 수선화의 반입을 금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남국의 식물인 파초도 사대부의 집안에서 재배했다.
이 시기 문사들의 정원을 그린 그림에는 으레 파초가 그려져 있다. 온실 장치까지 갖춘 집도 적지 않았다.
원예 붐이 이렇듯 경쟁적으로 조성되다 보니 정원 조경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당시 문집에서 정원의 구체적 배치를 묘사
한 글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 18세기 문집에서 주인의 성씨를 따거나 고유한 이름이 붙은 정원은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것만도 수십 개가 넘는다. 이런 것은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정원을 경영할 여력이 없을
경우에는 의원(意園), 오유원(烏有園), 장취원(將就園) 등 상상 속의 정원을 꾸며 글로 남기는 일도 유행처럼 번졌다.
정원 조성 붐을 타고 괴석에 대한 수요도 부쩍 늘어났다. 앞서 신위가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괴석만 잔뜩 싣고 온 일을 말했지만, 이희천(李羲天, 1738-1771) 같은 이는 집에 만 점의 수석을 갖춰두고 당호를 아예 만석루(萬石樓)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유박(柳璞, 1730-1787)이 황해도 배천에 경영한 백화암(百花庵)은 당대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모두 기문과 시를 써주었을
만큼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화훼 재배 경험과 철학을 담아 《화암수록(花庵隨錄)》이란 인상적인 책을 남겼다.
어느 집에 기이한 화훼가 있단 말을 들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반드시 구해왔고, 중국을 왕래하는 배편에 부탁하여 외국의
화훼를 구해오기까지 했다.
지식 시장의 확대와 도서 유통
1771년(영조 47) 5월 26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희천(李羲天, 1738-1771)과 책주름 배경도(裵景度)를 조리 돌려 목을 벤 후
청파교에서 효시하여 강가에 사흘 간 목을 달아두고, 그 처자는 흑산도로 보내 영영 관노비로 삼으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희천은 당대 이름 높던 문인 이윤영(李胤英, 1714-1759)의 아들로 명망 높은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는 왜 이렇게 참혹한 형벌을 받았을까? 고작 국가에서 금지하는 서책을 소지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청나라 주린
(朱璘)의 《강감회찬(綱鑑會纂)》이란 책에 태조 이성계와 인조를 모독하는 내용이 일부 실려 있었다. 이를 들은 영조는
격분하여 우의정 김상철(金相喆)을 청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주린을 처벌할 것과 《강감회찬》을 훼판하고 소각할 것을
요구하고, 이 책을 수입해온 세 사신을 삭직하는 조처를 취했다. 또 민간에 소장된 《강감회찬》을 자진 헌납케 했다.
당시 자진 헌납자는 영의정을 비롯한 3정승과 판서가 포함된 무려 75명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이 바친 책이름도 다양해서
10가지가 넘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저자의 문제의 책이 당시 내로라하는 조선 사대부의 서가마다 대부분 모두 꽂혀
있었던 셈이다. 같은 책도 완질과 축약본이 있었고, 명칭 또한 다양하게 유통되었던 사정까지 알 수 있다.
영조는 이 책의 유통 과정에 개입된 책주름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 이희천은 단지 이 책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
로 시범 케이스로 극형을 당해 죽었다. 이 일과 연좌되어 10여명의 책주름이 처형당하거나 변방으로 유배 갔다.
그의 친한 벗이었던 박지원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바깥과 일체의 왕래를 끊었을 정도였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당시 조선의 서적 유통시장의 규모와 서쾌(書儈)라고 불리던 책주름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강렬하
게 부각시킨다. 책주름이란 요즘말로 하면 도서판매 영업사원이다. 당시 서책의 활발한 유통에는 이들의 종횡무진한
활약이 있었다. 책주름들의 역량은 희귀본과 신간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여 고객의 요청에 신속히 부응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 시기 책 주름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신선(曺神仙)이란 인물이다. 정약용(1762-1836)과 조수삼
(趙秀三, 1762-1849), 조희룡(趙熙龍, 1789-1866) 같은 쟁쟁한 문인들이 그의 전기를 세 편이나 따로 남겼다.
조신선은 이들과 직접 왕래한 세월만도 50년에 가까웠다. 처음 만날 당시 그는 이미 4,50세가 넘은 상태였으므로 실제
그는 백 살이 넘어서까지 책 거간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전설적 인물이다. 그런데도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조신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책 주름은 책의 내용도 어느 정도 알아야 했다. 조신선 같은 이는 이밖에도 어느 집에 어느 해에 어떤 책이 들어갔는지
하는 정보를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책 이름만 대면 저자와 권수를 줄줄이 댈 수 있었다. 이밖에 필방이나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 거간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지냈던 홍윤수(洪胤琇) 같은 이의 존재는 당시 몰락한 양반들까지 서책 거간
에 뛰어든 사정을 알게 해 준다. 책 주름들은 연경 갔던 사신 행차 편에 대량으로 들어온 서적들을 유통시키는 중간 상인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실각 등으로 몰락한 집안에서 흘러나온 장서들을 다른 집안에 되파는 방식으로도 이문을 챙겼다.
18세기의 만권당(萬卷堂)을 일컫던 장서의 규모는, 19세기로 넘어가면서는 3, 4만권을 헤아리는 엄청난 규모의 장서로 확장되었다.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아버지 심념조(沈念祖, 1734-1783) 때부터의 엄청난 장서를 이어 받아, 그의 서재인
가성각(嘉聲閣)에는 무려 4만권의 각종 선본(善本)과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가성각이란 편액은 옹방강(翁方綱)이 80세 때 써준 글씨였고, 네 채의 부속 건물을 두어 4만권의 장서를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나누어 건물별로 수장하였다.
가히 공공도서관 규모의 방대한 장서였다. 실내 장식도 호화의 극을 달려 상아로 만든 책상과 벽을 채운 전면 거울, 그밖에 온갖 화려한 조각과 장식으로 꾸며졌다.
중국에 간 사신 행차의 중요한 일은 서책의 구입이었다. 역관은 물론이고 사행원과 비공식 수행원들은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의 서사(書舍)를 전전하면서 구입하고자 하는 서목(書目)을 들고 다니며 값을 아끼지 않고 희귀본과 신간
서적을 싹쓸이 해 갔다. 어떤 때는 왕명에 의해 거질의 도서를 구입해 오는 임무가 부여되기도 했다. 그들은 날마다 유리창의 서점에서 엄청난 양의 책을 구입했고, 이곳에서 만난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견문을 넓혔다.
중국의 서적 상인들에게 조선의 지식인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골 고객이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이상황(李相璜, 1763-1841)은 패설(稗說)에 벽이 있었다. 신간으로 간행되는 소설책마다 반드시 구해 읽자, 연경 가는 역관들이 다투어 구해 바쳐 이야기책만 수천 권을 소장했다. 그는 특히 《서상기(西廂記)》를 몹시 좋아하여 밥 먹을 때나 변소에 갈 때나 손에서 놓지 않아 서상벽(西廂癖)이 있단 말을 들었다. 이 시기에 오면 장서도 취향에 따라 성격
의 분화가 이루어졌던 셈이다.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청나라의 신간 서적을 멀리 제주도까지 실어 보내자 스승인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어 고마운 뜻을 표했다. 귀양 죄인이 제주도에 앉아서 외국의 신간 서적을 받아보고 있을 정도로 당시 도서 유통의
속도나 규모는 대단했다.
서적들이 활발히 유통되면서 지식산업 시장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의 서책을 벤치마킹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 경영
이 유행했다. 물적 토대의 변화가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기록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말 위에서 외 무릎을 세우고 빈 공책에 수시로 메모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객관에 들면 그는 매일 많은 시간을 그날 보고 들은 내용을 메모하고 정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환기기(幻戱記)〉 같은 글은 중국서 본 요술 공연을 기록한 것인데, 무려 20가지의 요술 레파토리가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 같으면 캠코더로 촬영하여 온다고나 하지만, 당시 20가지나 되는 레파토리를 하나하나 상세히 묘사해 낸 것을 보면, 공연 현장에서도 그의 눈과 손은 동시에 바빴을 법하다.
홍대용이나 박지원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사신 간 사람들의 필담 기록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온전한 녹취록이다.
두 사람은 양편에 종이를 수북히 쌓아놓고 필담을 시작한다. 대화에 따라 종이가 오가다 보면, 나중에는 내 앞에 있던 종이는 상대에게 가 있고, 상대의 종이는 내 앞에 쌓인다. 대화가 끝나면 서로 적은 것을 맞바꿔 한 벌씩 베껴 적는다. 나눠 가지면 두 벌의 완벽한 녹취록이 완성된다. 그러면 그 기록을 가지고 돌아와서 문답에 맞춰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지금 남아있는 수많은 연행록은 모두 이런 꼼꼼한 기록 정신의 산물이다. 그들이 무슨 기억력의 대가여서 훗날에 기억해낸 것이 아니다.
이전 시기에도 《미암일기(眉巖日記)》나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있었지만, 18세기의 일기문학은 이 시기 잡식성의 지식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만주(兪晩周, 1755-1788)의 《흠영(欽英)》은 21세 나던 1775년부터 죽기 한 해 전인 1787년
까지 13년 간 매일 써내려 간 일기이다. 모두 24책 156권의 거질이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 또한 평생에 걸쳐 쓴 일기로 52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들 일기는 한마디로 18세기 생활사 자료의 보고다. 경제활동과 문화 예술 활동, 독서 편력과 과학사 관련 자료, 시정의
풍습까지 없는 내용이 없다. 유만주는 60년간 일기를 쓸 것으로 생각하여 60부, 1천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다.
그는 일기에 고금아속(古今雅俗)을 막론하고 듣고 보고 느낀 것을 다 적었다. 제사 때 올린 과자와 고기의 종류부터, 아픈
데 쓴 약의 종류, 언제 옷을 갈아입었으며, 당시 곡식의 값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시시콜콜히 다 적었다.
이들은 일기를 단순히 나날의 기록으로 생각하는 대신 한질의 백과전서적 전작으로 인식했다. 18세기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의 실상이 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유만주는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했을만큼 자신의 생애를
걸고 이 일기를 써내려 갔다.
그들은 사소한 일상의 기록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쉴새없이 메모하고, 틈만 나면 정리했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도 말 그대로 듣고 보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적어둔 비망록이다. 나를 거쳐간 생각
과 정보는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편지를 보낼 때도 반드시 부본을 한부씩 남겨 두었다. 이덕무가 세상을 뜬 후, 이서구는
평생 이덕무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글을 한 장 한 장 펴서 배접하여 책으로 만들어 이덕무의 아들에게 보내주었다.
문집에 실린 수십통의 편지는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최근 서울대박물관에서 공개한 연암 박지원의
편지첩은 안의 현감과 면천군수로 있을 때 집에 보낸 30여통의 편지를 날짜 순으로 정리해 둔 것이다.
기록과 정리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다양한 지식 경영 노하우의 축적은 총서(叢書) 편찬 열기로도 이어졌다.
중국에서 《한위총서(漢魏叢書)》나 《소대총서(昭代叢書)》 또는 《설부(說郛)》, 《단궤총서(檀几叢書)》와 같은 총서류 저작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들이 한 일을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
의 발로였다.
박지원은 《삼한총서(三韓叢書)》를 기획했다. 중국과 우리 옛 문헌에서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교섭과 관계된 기록들을
가려 뽑아 한 질의 총서로 만들려 했다. 현재 남아있는 목록에는 모두 178종의 서책이 나열되어 있고, 이는 당초 계획의
10분의 1,2에 불과한 분량이다.
이 책이 완성되었더라면 고대로부터 근세까지의 한중교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만주는 《해내총서(海內叢書)》와 《해외총서(海外叢書)》를 동시에 기획하고 그 서목을 정리했다. 중국에는 《한위총서》가 있는데, 문헌의 역사가 천년이 넘는 우리는 그 많은 문헌들이 흩어져 있어 하나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으니, 《해내
총서》를 정리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시대별로 묶어 384종의 목록을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설부》를 본떠 《통
원설부(通園說郛)》를 엮었다. 통원은 그의 호다. 모두 28목(目)으로 구분하여 우리나라의 온갖 기이하고 희한한 이야기를 가려 모았다. 《설부》의 조선 버전을 엮은 것이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소화총서(小華叢書)》를 기획했다. 《삼한총서》와 달리 역사와 문화, 학술을 아우르는
방대한 종합적 총서였다. 우리나라의 저술을 경익(經翼)․별사(別史)․자여(子餘)․재적(載籍)의 4부로 나누어 경전 해석과
관련된 저술, 역사와 관련된 것, 그밖에 경세실용서들을 망라하고자 했다. 체재는 《한위총서》를 본뜬 것이었다.
애초에 이같은 방대한 총서의 기획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모은 방대한 장서와 의욕적인 독서, 주변 동지들의 협조를 믿고 이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모두 힘에 부쳐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이들의 고양된 문화적 자신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18세기를 위하여
정조 대의 천재적 천문학자 김영(金泳)은 《중성기(中星記)》와 《역상계몽(易象啓蒙)》등 수많은 천문학과 역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구면기하학의 원리를 꿰뚫어 황도와 백도 상의 해와 달의 운행 각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었던
그의 눈에, 평평하고 네모난 땅을 둥근 몇 겹의 하늘이 에워싸고 있다고 믿었던 송나라 주희(朱熹)나 소옹(邵翁) 같은
대학자들의 천문에 관한 장황한 설명은 도대체 터무니가 없었다. 이렇듯 초보적이고 오류투성이의 설명을 금과옥조(金
科玉條)로 알고 배우다가 새로운 지식 체계를 접하게 되면서 성현(聖賢)의 권위는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다.
그는 중국에서 별자리의 방위에 따라 자신의 영토를 분야(分野)로 나누었다면, 우리도 그들이 정해둔 분야에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땅덩어리에 따라 새로 분야를 나누어야 한다고 보아 《동국분야기(東國分野記)》의 집필에 매달렸다.
이때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동북방 한 귀퉁이 기미성(箕尾星)의 분야에 속한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중국의 지리서 《수경(水經)》을 읽다가 정약용은 아예 《대동수경(大東水經)》을 지었다. 《사기(史記)》의 〈화식전
(貨殖傳)〉을 읽다가 이재운(李載運)은 《해동화식전(海東貨殖傳)》을 지었다. 너희가 있는데 우리라고 없겠느냐 하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주체에 대한 각성은 이렇게도 왔다. 교통의 발달과 도로망의 확충은 자연스레 경험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저 음풍영월을 옮겨 적던 여행기가 이제는 여러 가지 알차고 유용한 정보를 담은 기행문학으로 거듭났다.
이른바 국토산하의 재발견 붐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가들도 중국풍의 관념 산수를 던져 버리고 사방의 진경산수를 그리
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북벌(北伐)을 국시(國是)로 알고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치며 자란 지식인들은 중국에 사신 가서 사통팔달로
쭉쭉 뻗은 길과 으리으리한 벽돌집들, 그리고 쉴 새 없이 오가는 우마차를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북벌(北伐)은 어느 순간 문득 북학(北學)으로 대체되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연암이 중국에 가서 본 장관을 꼽으면서, 진짜 장관은 똥덩어리와 벽돌에 있더라고 말할 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물 안에만 있다가 넓은 세상에 나가 상대를 보고 나니 나의 객관 실체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고 지은 소설이 〈허생전〉이다. 경험의 확장이란 이런 것이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각성된 의식은 잠재워
지지 않는 법이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변화 앞에 18세기 조선 사회는 휘청했다. 한쪽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외칠 때, 한쪽에서는 중국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화사치 풍조도 만연했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중국을 배워야 하는 까닭을 설파했지만, 중국제에 환장 들렸다 하여 당벽(唐癖), 당괴(唐魁)의 비난도 동시에 들어야 했다.
18세기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확실히 특별한
세기였다. 지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의 틀도 바뀌었다. 근대의 조짐은 서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역사가들이 ‘거대한 모순의 용트림’이라고 표현하는 18세기의 변화는
전세계적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다발적이다.
18세기 들어 서구 중세의 형이상학적 관념이성은 합리주의적 계몽철학에 자리를 내준다. 이들은 삶과 세계의 질서를 과학
적 질서로 재편하고자 했다. 종교의 속박, 이념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고, 구원의 미명 아래 자행된
온갖 우상과 폭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자리에 주자주의(朱子主義)를 두면 조선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구 계몽주의가 합리적 이성과 함께 정열적(Passion) 인간을 지향할 때, 18세기 조선은 주자학의 세례를 벗어 던지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합리성과 동시에 벽(癖)과 치(癡)의 미친 열정을 옹호했다. 디드로가 《철학적 사고》에서 “사람
들은 왜 정열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모욕하는 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위대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정열뿐이다”라고 투덜댈 때, 박제가는 “세상에 무언가에 미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볼테르가 계몽철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는 《백과사전》을 ‘인간 정신 진보의 기념비’라고 하며, 세상의 모든 사물을 항
목화하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설명할 때, 조선의 지식인들도 백과전서적 성격의 총서 저작에 정열을 쏟았다.
이것은 종교에서 과학을 분리하고, 이념에서 인간의 삶을 해방하는 권력의 재배치 과정이기도 했다.
서양에서, 강요된 경건함과 위선의 세월이 지난 후, 쾌락의 옹호와 관능의 광기가 휩쓸 때, 이곳에서도 웰빙의 미명 아래
온갖 골동품 수집을 비롯하여 호화사치 풍조와 풍속의 타락이 자행되었다. 어디서나 하층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참혹한
것마저 꼭 같았다.
도덕론자들이 볼테르나 디드로, 루소 등을 감옥에 가두고 억압한 것처럼, 박지원과 김려, 이옥 등은 불온한 문체로 불온
한 사상을 전파시킨다 하여 반성문 제출을 요구받고 과거합격이 취소되었으며, 반체제 인물로 낙인 찍혀 음습한 그늘에
묻혀 있어야 했다.
18세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맸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본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서구와 달리, 어째서 우리에게 근대는 여전히 타자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들과 우리가 공유했던 문제의식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미완의 가능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과 조선의 근대에 대한 차이 또한 정조와 메이찌(明治)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보다 근본적이고 면밀한 시야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대한 연구도 가일층 박차를 가해야 한다. 어차피 해답은 거기에 있을 테니까.
18세기 시단과 일상성의 시세계 - 이용휴 시전집 해제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18세기 한문학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다.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롭고도 독특한 작품 세계로 한 시대 문단을 이끌었다. 몰락한 기호남인(畿湖南人) 문학을 대표하
면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당대 문단의 두 축을 이루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우리 문학사상 참으로 난만한 꽃을 피웠다. 고려이래 3백년 간은 송시(宋詩)만 따라 배웠다.
과거 급제의 방이 붙으면, 으레 “금년에도 또 소동파 33명이 나왔구먼”하는 말이 뒤따랐다. 격률의 삼엄함과 용사의 꼼꼼
함이 요구되었다. 선조 때부터는 당시(唐詩)를 배운다고 난리를 떨었다. 하루아침에 소동파․황산곡의 강서시풍은 씻은
듯이 없어졌다.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고, 낭만을 말하고, 눈앞에 없는 아득한 옛날을 노래했다. 가보지도 못한 강남 땅을
동경하여 ‘연밥 따는 아가씨’를 그리고, 그곳 술집에 농탕하게 흘러넘치던 노랫가락을 환청으로 들었다.
오래 계속 하다보니 그것도 싫증이 났다. 누가 해도 한 소리고, 입만 열면 같은 곡조였다. 도무지 눈앞의 삶과는 따로 놀
았다. 게다가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강고하던 의식의 각질도 깨어져 나갔다. 예전 같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던 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해괴망칙하다고 야단날 일이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다. 도시 문화의 생동하는 분위기는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8세기 시단은 이러한 환경 아래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정겹게 포착했다. 시속에 인간의 체취가 스며들고, 그 시대의 풍경
이 떠올랐다. 일그러지면 일그러진대로 진솔했고, 눈물겨우면 겨운대로 고마웠다. 분노를 굳이 감정의 체로 거르지도 않았다. 변치 않을 도(道)는 눈앞의 진(眞)으로 바뀌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무슨 구호처럼 유행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니, 남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두보나 소동파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보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이 새롭고 보니, 실험도 자유로웠다. 듣도 보도 못한 6언시를 다투어 지었다. 7언율시의 삼엄한 형식미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산문투에 가까운 5언절구가 차지했다. 시는 관념적 풍경을 복제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 살아 숨쉬
는 인간들을 관찰했다. 사진사처럼 그 시대의 장면들을 찍어내고, 역사가처럼 꼼꼼한 필치로 재현했다. 추한 것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았다. 겉꾸민 아름다움은 더럽다고 외면했다. 전통적인 형식에는 미련도 없었다. 꼭 해야 할 말이라
면 틀을 깨고라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이 문단 위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용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 “영조 말년에는 이름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되었다. 무릇 탁마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는 자는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았다. 몸은 포의의 반열에 있었으되, 손으로 문원(文苑)의 저울대
를 잡은 것이 30여 년이었으니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고 이용휴의 문학을 높이 기렸다. 재야에서 30년간 문형을 잡았다
하여, 당대 문학이 온통 그의 자장(磁場) 안에 있었음을 특기하였다.
흔히 이용휴의 문학을 두고 기굴첨신(奇崛尖新)을 말하곤 한다. 유만주(兪晩周)는 『흠영(欽英)』에서 “혜환의 시 백 여
편은 살펴볼 만 하다. 이 사람의 문장은 지극히 괴이한데, 산문에서는 지(之)나 이(而) 같은 어조사를 전혀 쓰지 않다가,
시에서는 지(之자)나 이(而)자를 거리낌없이 쓴다. 절대로 다른 사람과는 아주 다르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진실로 하나의
병통이면서 또한 한가지 기이함이라 하겠다. 혜환은 장서가 아주 많은데, 지닌 것마다 기이한 글과 특이한 책이었다.
평범한 것은 한 질도 없었다. 대개 그 기이함은 실로 천성이었다”고 적고 있다.
과연 그의 시문을 살펴보면, 담긴 생각이 비범하여 어느 한편도 의표를 찌르지 않는 것이 없다. 산문을 시처럼 썼고, 시를
산문처럼 썼다. 일상의 일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었다. 이덕무가 『청비록(淸脾錄)』에서 “혜환의 시는 힘써 중국을 따랐다. 압록강 동쪽의 말로 짓기를 부끄러워 했다. 격률이 엄격하고, 수사가 화려하여 별도의 세계를 열었다. 빼어나 곁할 사람이 없었고, 경전을 널리 보아 자구에 근거가 있었다. 한갓되이 달빛․이슬․바람․꽃 따위 쓸모 없는 말은 짓지도 않았다”
고 한 것은, 그의 기이함이 단순히 사람의 이목을 놀래키는 호기(好奇) 취미가 아니라, 학문의 깊은 온축에 바탕을 두고
나온 것임을 주목한 것이다. 또 이덕무는 「우상전(虞裳傳)」에서 “혜환은 평범하고 누추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별도로
신령스러움을 갖추었다. 고금을 꿰뚫었고, 안목은 달빛과 같았다”고 기렸다.
또 박제가는 「회인시(懷人詩)」에서 “혜환은 오묘하여 청신함을 보여주니, 연꽃이 진흙에 물들잖음 흡사해라.
사가(詞家)에 법안(法眼)이 한번 열리고부터, 동방엔 책 읽는 이 아예 없어졌다네.(惠寰超妙出淸新, 譬似蓮花不染塵. 一
自詞家開法眼, 東方無箇讀書人.)”라고 했다. 진흙탕 속에서 고결하게 솟은 연꽃의 봉오리처럼 맑고 새로운 풍격을 열어
보인 것을 찬탄한 것이다. 그가 법안(法眼)을 열어 보이자, 동방에 독서인이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고 했다.
18세기 문단에서 그가 끼친 자취는 참으로 혁혁한 것이었다. 당대 여러 문인들의 한결 같은 기림만으로도 헤아림에 부족
함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의 문학은 이후 까맣게 잊혀졌다. 구슬 같은 작품들은 출판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졌다. 풍문만 있고 실체는 없었다. 근근히 문중에 필사본으로 전해 왔으나 그나마 온전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남아 그 전모를 알 수가 없었다.
아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정조가 ‘진학사(眞學士)’라 부르며 특별한 총애를 내렸던 인물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장이 온 나라에서 으뜸(文章冠一國)’이란 기림을 입었던 그가, 당쟁의 와중에서 천주교의 와주(窩主)로 지목받아 처형
당해 기시(棄市)된 후, 가뜩이나 기울었던 집안은 아예 풍비박산이 되었다. 필사본 『혜환집초』 속에는 이가환이 지은
「노한원묘지명(盧漢原墓誌銘)」 같은 글이 엉뚱하게 이용휴의 글로 잘못 끼어들고 있다. 이러한 착간 현상은 이들 부자의 글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섞인 채 은밀히 회자되던 전후의 정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번 이 책은 이렇듯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혜환 이용휴의 시를 서말 구슬을 꿰듯 하나 하나 주워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과연 그 기이하고 정채로운 광채가 눈을 찌르고 정신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2
이용휴의 시에는 송시(送詩)와 만시(輓詩)가 유난히 많다. 보통 7,8수에 달하는 연작으로 된 이들 작품들은 모두 벼슬을
받아 임지로 떠나는 벗에게 준 증송(贈送)이거나, 세상을 떠난 지인(知人)을 추모하여 지은 작품들이다.
읽다 보면 처음엔 이런 류의 시가 많은 것에 놀라고, 그 다음엔 그 많은 시들이 어느 하나도 비슷한 데가 없는데 놀란다.
송시는 대부분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선정(善政)을 베풀라는 당부이고, 만시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판에 박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편도 같은 것이 없다.
그의 시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한편으로 그의 시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그의 시는 앞서 유만주가 지적한대로, 통상적인 한시의 문법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활달함을 보여준다.
때로 그의 시는 시인지 산문인지조차 분간 못할 정도로 분방하다.
「주부 벼슬을 한 김명장(金命章)에 대한 만사」 첫 수는 이렇다.
음덕은 귀울음에 비할 수 있어
자기는 알아도 남은 모르네.
글에서 일찍이 이 말 듣다가
이제와 그대에게서 이를 보았지.
陰德譬耳鳴 己知人不知
於傳曾聞此 於君今見之
거의 산문에 가깝다. ‘지(知)’가 두 번 나오고, ‘어(於)’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는 것은 시에서는 쓸 수 없는 구법이다.
‘증(曾)’ 같은 부사어나 ‘지(之)’ 따위의 어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하지만, 자기는 들어도 남은 들을 수 없는 이명
(耳鳴)처럼,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했던 망자의 심덕을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의 표현 속에 곡진하게 풀어냈다.
그런가 하면, 「이우상에 대한 만사(李虞裳挽)」제 8수에서는,
그 사람 간담은 박과 같았고
그 사람 눈빛은 달빛 같았지.
그 사람 팔뚝엔 신령이 있고
그 사람 붓끝엔 혀가 달렸네.
其人如瓠膽 其人如眼月
其人腕有靈 其人筆有舌
라 하여, 아예 4구 모두 ‘기인(其人)’을 나란히 놓는 파격도 서슴지 않았다. 정을 펴는데 필요하다면 격률을 허무는 것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 망설임 없이 담대한 행동, 쏘는 듯 반짝이던 눈빛을 지녔던, 팔뚝에 신령이 붙고, 붓에 혀가
달린 것처럼 붓을 잡기만 하면 거침없는 생각을 쏟아내던 우상 이언진에 대한 기억을 눈앞에서 보는 듯이 되살려 냈다.
「직산현감 이만굉에 대한 만사(李稷山萬宏挽)」 첫 수는 또 이렇다.
발로는 고인의 자취를 쫓고
마음엔 고인의 가슴 부쳤네.
몸뚱인 고인의 가운데 두어
자연히 고인과 하나 되었지.
足追古人跡 心寄古人胸
身置古人中 自然古人同
매 구절 같은 위치에 ‘고인(古人)’을 놓고, 그 앞에 ‘족(足)’, ‘심(心)’, ‘신(身)’을 두었다. 또 ‘족(足)’은 ‘적(跡)’과, ‘심(心)’은
‘흉(胸)’과 호응을 이루면서, 행동 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까지 옛사람의 표양을 본받아 옛사람처럼 살다간 고인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이렇듯 이용휴의 시는 그 표현이 매우 일상적이고 또 파격적이다. 너무도 쉬운 일상어로 되어 있고, 산문에 가까운 구법
을 보여준다. 하지만 표현은 산문처럼 설명적이지도, 늘어지지도 않고, 시적으로 단단히 응결되어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강악흠에 대한 만사(挽姜君嶽欽)」의 제 4수는 이렇다.
상자 속에 남겨진 유고가 있어
손님이 찾아와서 보여 달랬지.
그 아비 손 흔들며 거절하기를
“이것이 내 자식을 일찍 죽게 했다오.”
篋中有遺草 客來求見之
其父搖手止 曰是夭吾兒
시만 생각하고 정을 소중히 하던 스물 세 살의 아까운 젊은이가 세상을 버렸다. 남긴 글이나 보자고 청했더니, 아버지는
보여주지 않겠단다. 시 쓰느라 심혈을 다 쏟아 결국 일찍 죽고 말았으니, 아들이 남긴 시고는 아버지에겐 가슴에 박힌
못과 한가지인 셈이다. 또 「진사 신사권에 대한 만사(申進士史權挽)」제 5수에서는 똑같은 상황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 아비 자식이 놀랄까 보아
자식 시신 만지면서 곡을 못하고,
소리 삼켜 벽 향해 드러누우니
뱃속으로 눈물이 뚝뚝 흐른다.
其父恐兒驚 不撫兒屍哭
呑聲臥向壁 肚裡淚蔌蔌
아들이 죽어 꼼짝도 않고 누운 것이 아버지는 차마 믿기지가 않는다. 자식의 시신을 붙들고 곡을 하면, 죽은 자식이 놀라
눈을 감지 못할까 봐 벽을 향해 드러누워 울음을 삼키는 애끊는 부정을 눈물겹게 그려냈다.
3
이용휴의 한시는 의표를 찌르는 표현과 인정의 미묘한 곳을 꼬집어 내는 절묘한 포착으로 독자의 정서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는 일상의 묘사에서 특히 돋보인다.
며느린 앉아서 아이 머리 따는데
등 굽은 늙은인 외양간을 쓰누나.
마당엔 우렁 껍질 잔뜩 쌓였고
부엌엔 마늘 접이 걸리어 있네.
婦坐掐兒頭 翁傴掃牛圈
庭堆田螺殼 廚有野蒜本
「농가(田家)」란 작품이다. 햇살이 빗긴 마루에선 며느리가 딸의 머리를 땋고 있다. 등이 굽은 시아버지는 외양간을
청소한다. 마당에는 알맹이를 다 까먹고 버린 우렁 껍질이 소복히 쌓여 있다. 햇마늘을 말리려고 부엌 한켠엔 마늘 접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한 폭의 나른한 풍경화다. 작품의 주제는 뭘까? 우렁 껍질이 어쨌다는 것이며, 마늘 접은 어떻다는
것인가? 엄마가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며 도란도란 주고받는 대화며, 그 곁에서 묵묵히 집안 일을 감당하는 할아버지,
넉넉하고 푸짐한 먹거리,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삶. 제목대로, 시인은 길가다 흘깃 들여다 본 시골 농가의 행복한
풍경을 부러워 했다.
옥 같은 손끝으로 들어 보이니
동전 두 닢 푸른 실에 꿰어 있구나.
“엿 사먹든 떡 사먹든 맘대로 해라
자꾸 울어 네 어미 속 썩이지 말고.”
玉指尖頭擧示之 銅錢兩个貫靑絲
買飴買餠隨兒願 更勿啼呼惱阿嬭
「미인이 아이를 어루는 그림에 제하여(題美人戱嬰圖)」의 첫 수다. 그림 속 장면을 말로 펼쳐냈다. 눈물이 마르지 않은
꼬맹이는 아예 퍼질러 앉아 발을 동동거리며 악을 쓰고 운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느라 푸른 실에 꿴 동전 두 닢을 그 앞에
들어 보인다. “뚝 그치면 이걸 주지. 엿 사먹든 떡 사먹든 네맘대로 하렴. 뚝 그치면 이걸 주지.” 신기하게 울음을 뚝 그치는 꼬맹이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또 이런 것은 어떤가?
시골 아낙 두 마리 개를 딸리고
광주리에 점심밥을 담아 내간다.
벌레가 국그릇에 뛰어들까봐
호박 잎 따다가 그 위를 덮네.
村婦從兩犬 栲栳盛午饁
或恐虫投羹 覆之以瓠葉
「신광수가 연천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送申使君光洙之任漣川)」의 제 5수다. 농번기에 온 식구는 일손이 바쁘다.
아낙은 점심밥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시장할 식구들 생각이 걸음이 바쁘다. 영문 모르는 강아지들은 그저 나들이가
즐겁다. 시인의 시선이 엉뚱하게 국그릇 위에 덮인 커다란 호박잎에 가서 딱 멎었다. 물론 상상 속의 그림이다. 멀
리 연천 땅으로 고을살이를 떠나는 벗에게, 이렇듯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달라는 당부를 둔
것이다. 그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이 참으로 유연하다.
동전 쥔 계집종이 어부에게 묻는다
“생선 값 흥정하여 파는게 어떠하오?”
늙은 어부 삿갓 쓴 채 뱃 머리에 앉아서
다래끼에 펄펄 뛰는 잉어가 들었다네.
婢把銅錢問老漁 鮮魚論直賣何如
老漁欹笠船頭坐 云有籃中活鯉魚
「서호 소은의 집 벽 위에 기제하다(寄題西湖小隱壁上)」의 제 4수다. 마포 서강의 떠들썩한 물가 풍경이 눈에 선하다.
계집종은 동전을 들어 보이며 늙수구레한 어부를 충동질 한다. 늙은 어부는 삿갓을 삐뚜름하게 쓴 채, 뱃머리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생선 좋은 거 있나요?” 어부는 시큰둥하게 “산 잉어 살테여?” 한다. 계집종은 해산한 주인 마님을 위해 잉어를
사러 나왔던 걸까?
한 시대의 표정이 이런 시들 속에서 되살아 난다. 음화(陰畵)가 인화지 위에서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듯, 2백년도 더 된
옛 풍경이 그의 붓끝에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 그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끄집어 낸다.
4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외안(外眼) 즉 육체의 눈과, 내안(內眼) 곧 마음의 눈이 그것이다. 육체의 눈으로는 사물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는 이치를 본다. 사물 치고 이치 없는 것은 없다. 장차 육체의 눈 때문에 현혹되는 것은 반드시 마음의 눈
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쓰임새가 온전한 것은 마음의 눈에 있다 하겠다. 또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이 교차
되는 지점을 가리워 옮기게 되면, 육체의 눈은 도리어 마음의 눈에 해가 된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처음 장님이었던
상태로 나를 돌려달라고 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정재중(鄭在中)은 올해로 마흔 살이다. 40년 동안 본 것이 적지 않을 터이다. 비록 지금부터 80살이 될 때까지 본다하더라
도 지금까지 보다 많이 보진 못할 것이니, 훗날의 재중이 지금의 재중과 같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다행이 재중은 육체의
눈에 장애가 있어 사물 보는 것을 방해하므로,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만 보게 되었다. 이치를 살핌이 더욱 밝아질 터이니,
훗날의 재중은 반드시 지금의 재중과는 다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눈동자를 찔러 흐릿함을 물리치는 처방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작은 쇠칼로 각막을 도려내 광명을 되찾아 준다고 해도 또한 원하지 않게 되리라.
이용휴의 「정재중에게(贈鄭在中)」란 글이다.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는 시나 산문 할 것 없이 그의 장기다.
나이 40에 갑자기 실명한 정재중을 위로차 해준 말이다. 눈 앞의 모든 것은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육체의 눈은 실수 투성
이다. 사고만 친다. 마음의 눈이 있어 육체의 눈이 흔히 빠지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사고만 치는 육체의 눈이야 있
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어둡게 되면, 보는 것이 많을수록 현혹됨도 커질 터이니 큰 일이라고 했다. 눈이 멀어 마음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오히려 눈 먼 것을 축하하고픈 심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현상의 어지러움 속에서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내가 내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될 때, 사물의 주인도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늘 현혹되고, 끌려 다니고, 사고만 치게 된다.
「환아잠(還我箴)」은 바로 이 ‘나를 찾자!’는 주제를 선언처럼 밝힌 글이다. 그의 문학 정신이 이 한편 글에 다 녹아 있다.
옛날 내 어렸을 땐
천리(天理)가 순수했지.
지각(知覺)이 생기면서
해치는 것 일어났다.
식견이 해가 되고
재능도 해가 됐네.
마음 닦고 일 익히자
얽키설키 풀 길 없네.
다른 사람 떠받드는
아무 씨, 아무개 공
무겁게 추켜세워
멍청이들 놀래켰지.
옛 나를 잃고 나자
참 나도 숨었구나.
일 꾸밈 좋아하여
나를 타고 가 버렸네.
오래 떠나 가고픈 맘
꿈 깨나니 해가 떴다.
번드쳐 몸 돌리니
하마 집에 돌아왔네.
광경은 전과 같고
몸 기운도 편안하다.
잠금 풀고 굴레 벗자
오늘에 새로 난 듯.
눈도 밝기 전과 같고
귀도 밝기 전과 같아,
하늘이 준 총명함이
다만 전과 같아졌다.
많은 성인 그림자일뿐
나는 내게 돌아가리.
어린 아이 다 큰 어른
그 마음은 같은 것을.
신기한 것 없고 보면
딴 생각이 치달리리.
만약 다시 떠난다면
돌아올 기약 다시 없네.
향 살라 머리 숙여
천지신명께 맹세한다.
이 몸이 마치도록
나와 함께 주선하리.
昔我之初 純然天理
逮其有知 害者紛起
見識爲害 才能爲害
習心習事 輾轉難解
復奉別人 某氏某公
援引藉重 以驚群蒙
故我旣失 眞我又隱
有用事者 乘我未返
久離思歸 夢覺日出
飜然轉身 已還于室
光景依舊 體氣淸平
發錮脫機 今日如生
目不加明 耳不加聰
天明天聰 只與故同
千聖過影 我求還我
赤子大人 其心一也
還無新奇 別念易馳
若復離次 永無還期
焚香稽首 盟神誓天
庶幾終身 與我周旋
태어나 순연(純然)하던 하늘 이치가 앎이 생겨나면서부터 흩어져 버렸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나는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모모한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명성에 현혹되고, 달콤한 칭찬에 안주하여 참 나를 잃고 헤매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돌이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몸을 옭죄던 굴레를 벗어던지자 문득 다 달라
졌다. 이제 나는 나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주인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 한눈 팔거나 기웃거리지 않겠다.
그의 ‘나를 찾자’는 주장은 오늘에도 여전히 새롭게 읽힌다. 눈을 잃고 나서 마음의 눈이 떠진 정재중처럼, 지금의 나를
버림으로써 참 나를 되찾자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힘이 있다.
이 집은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다. 이 사람은 나이는 젊고 식견은 높은,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다. 만나보고 싶거든 이 기문에서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쇠신이 다 닳도록 대지를 쏘다녀봐도
마침내 또한 얻지 못하리라.
(此居, 此人居此所也. 此所卽此國此州此里. 此人年少識高, 耆古文奇士也. 如欲求之, 當於此記. 不然, 雖穿盡鐵鞋, 踏遍大
地, 終亦不得也.)
「차거기(此居記)」란 글이다. 불과 53자뿐인 글에서 ‘차(此)’자가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 된다. 그는 어디 있는가?
그의 글 속에 숨어 있다. 쇠신이 다 닳도록 돌아다닐 것 없이, 이 시집을 읽고 또 읽어 그와 만날 수 있다.
다른 곳에는 없고, 이 집 속에 숨어 있다.
그동안 흩어진 구슬처럼 좀체 전모를 드러내지 않던 이용휴의 시가 이렇게 한 자리에 오롯히 모였다. 자료를 찾는 노고와
그것을 정리하고 또 우리말로 옮겨내는 어려움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느낄 기쁨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재기발랄한 산문까지 아울러 명실공히 이용휴 문학전집으로 속히 엮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