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만 말했다 (daum.net)
단 한 번만 말했다 (pressian.com)
단 한 번만 말했다
1
대남방송과 북한군의 사격훈련 총소리가 들리던 곳
지금도 제 보이는 북한 쪽 오성산에서 상시 관측이 가능한 곳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대마리처럼
북한에서는 최남단
남한에서는 최북단
영해박씨 집성촌으로 김씨와 이씨 등 타성바지가 스무나문 가구 섞였어도
500여 호가 겹사돈 아니면
누구는 왕고모 딸이고 누구는 오촌 당숙
서로 일가붙이였는데
38선 이북이라 광복 후엔 공산 치하
마을이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로 일부 갈렸어도
나머지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모르고 농사나 참하게 짓고 살았는데
6·25가 터지자 전세에 따라 이쪽저쪽 엄한 백성들이 전국에서 죽어 나갔듯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원산으로 치달을 때
누가 알았으랴 사각지대로 남은 사곡리를 인민군 패잔병과 열성당원과 중공군이 연합하여 기습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반공 활동을 펼쳤던 화랑공작대원과 그 가족을 색출하고 얼결에 지목된 무고한 주민까지 70명을 무참히 살해할 줄을
자다 말고 끌려 나온 열댓 명의 아이들에게도 여지없이 총구가 겨눠질 줄을
1950년 11월 20일 그 새벽부터 피난민들의 시간은 더디 흘러
휴전되고 이러구러 수복 이주 마무리된 1955년에야 분묘 조성되었으니
피 흘리며 포개포개 구덩이에 던져진 시신들의 처참함을 어찌 눈감고 상상할 수 있었으랴
1984년이 되어서야 합동순의비가 제막되니
그들의 원혼을 어찌 달랠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이제 와 전쟁의 참상을 어찌 상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가해자가 피해자 되고
엎치락뒤치락
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도 하던 세상
빨갱이가 제일 무서운 말이었는데
김화 화강이 흘러
한탄강 지나 임진강 지나
한강에서 서해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죄에 연루되지 않았으나
이웃과 친인척에 연루되어
원망도 분노도 복수도 삼켜버린 채
나는 그때 옌병을 앓아 아무것도 몰랐어요*
옌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빨갱이라는 아직도 살아있는 그 말이 너무 무서워
화강은 태평양까지 툭 터놓고 흘러가기가 여전히 요원한데
지정학상 수십수백의 민간인학살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철원을 통틀어
『철원군지』에 실린 단 한 건의 학살 관련 사료!
단 하나의 김화지구 합동순의비!
밤에 뺏고 아침에 뺏기던 백마고지전투의 이 첨예한 철원에서
정말
인민군과 중공군, 국군과 유엔군에 의한 제2, 제3의 민간인학살이 없었을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2023년 2월 6일 사곡리 원주민 김대식(1936년생, 사곡리 집단학살 당시 14세) 씨와 인터뷰 중 ‘집단학살 당한 이웃 중 기억나는 분이 계세요?’에 대한 답변(‘옌병’은 염병의 방언). 전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유학한 분으로 사곡리 유래와 전쟁 복구 및 이후의 정치 상황에 대한 활달한 기억력에 비해 집단학살과 관련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기존 사료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답을 듣지 못함. 자료 제공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영규 소장이 동행했다.
<시작 노트>
‘김화지구 합동순의비’가 우뚝 선 곳은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당고개 기슭이다. 사곡리 산137번지. 며칠 전 내려 쌓인 눈을 밟고 묘역으로 가는 계단을 먼저 올라간 발자국이 두엇 찍혀 있다. 계단 옆 안내문을 읽는다.
“김화 지역은 38선 북쪽에 있어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공산 치하에 놓여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렸고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탈출한 김화 주민들은 ‘화랑공작대’를 결성하여 김화 지역 일원에 반공 활동 거점을 구축하고 반공 투쟁을 감행하였다. 1950년 11월 20일 새벽 인민군 패잔병과 중공군이 대거 기습으로 포위하여 미처 탈출하지 못한 치안대원, 공작대원, 반공인사와 가족 78명이 연행되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1955년 4월 20일 수복 지구 입주와 동시에 희생자 유골을 합장하고 분묘를 마련하여 간소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1955년 9월 30일 처음으로 위령제를 기행하였고, 1984년 6월 6일 김화지구 합동순의비가 건립되었다.”
탑의 정면에는 제단과 분향제단이 있고, 뒤쪽으로 돌아가면 ‘연혁’과 ‘이곳에 합장된 분’이란 제하에 78명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돌판이 붙어있다. 개중에는 인 씨, 김 씨 등 성만 있는 희생자도 여럿이었는데 아마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이었으리라. 안내문의 행간을 넓혀서 ‘이곳’이 암시하는 바를 구체화하면, 합동순의비 바로 밑에는 당시 무고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를 포함하여 70명이 합장되었고, 참사 이전에 피살된 화랑공작대원 1명과 반공인사 7명도 이 명단에 있다. 남자가 56명, 여자가 22명, 그중 15명이 아이들이다.
38선 이북인 철원 지역을 통틀어 민간인학살과 관련해서는 ‘김화지구 합동순의비’를 둘러싼 사료가 유일하다. 이상하다. 정말 이 지역에서 인민군과 중공군, 국군과 유엔군에 의한 제2, 제3의 민간인학살이 없었을까. 철원군청을 탈탈 털어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의 고발이나 폭로, 하다못해 묵은 옛이야기 속에서도 전해지는 게 없다. 전후 70여 년을 넘긴 철원 군민의 무의식에 레드 콤플렉스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반어가, 혹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