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염원예배/ 순천하늘씨앗복음교회> 12.8
성서읽기: 제1복음 마태복음 24, 43
제2복음 구약 시편 1, 1-6
제목: 멸망의 밤에 비치는 빛/ 임의진
3주만에 다시 뵙습니다. 평안을 두루 비나 평안을 잃은 안타까운 시절입니다.
도둑의 침입으로 우리는 지난 며칠 밤들을 뜬 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강탈당한 지금, 우리는 총회가 긴급하게 정한 ‘민주주의 염원 예배’로 드리겠습니다.
오늘 1복음으로 읽은 본문은 도둑과 주인 비유 이야기입니다. 밤 10시 반이 넘어 갑자기 우왁스럽게 생긴 도둑이 들이닥쳤지요. 수십년만의 비상계엄 선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믿고, 거드름을 피우던 우리들, 그러니까 깨어있지 못한 순간에 벼락같은 습격이었습니다. 하마터면 공군 작전권 문제의 30분이 없었다면, 야당 당수와 여당 당수조차 구금되고 친위 쿠데타가 성공할 뻔 했지요. 소수 정예군에 의해 이런 쿠데타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늦은밤 찾아온 도둑을 그나마 대비한 몇몇 예언자들 덕분에, 또 탱크와 군인을 가로막은 시민들 덕분에, 이 나라의 주인들 덕분에 우리는 다시 계엄에서 놓여났습니다만, 여전히 공포와 절망, 나락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식민통치도 아마 그렇게 순식간에, 부지불식간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누누이 선대로부터 국권을 빼앗긴 역사적 배경, 또 가증한 로마제국과 국내 앞잡이들로 인한 도륙의 소식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인권이 어디 있었겠나요. 어린 아이들의 학살극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목숨, 그것도 멀리 이집트쪽 사막으로 피신하여 살아난 목숨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두 번째 성서는 시편입니다. 시편의 이야기는 쫓기던 시인 다윗의 시편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복이란 히브리어로 ‘바라크’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너는 복이 되어라(흐예 베라카)” (창12: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어에선 복을 ‘유로기아’라고 하는데, ‘귀에 듣기 좋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 추도식에 추모 얘기를 ‘eulogy’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영어에선 피와 관련이 있습니다. 피를 뿌려 악귀를 막는다 할 때 피 Blood는 Bless로 발화합니다.
복 ‘바라크’란 ‘무릎을 꿇는다’는 뜻입니다. 상대가 무릎을 꿇는 상태, 그것은 하느님이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릎을 꿇을 때 그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은 한문으로 복 복(福)자가 아니라 엎드리고 복종하다는 복(服)자가 더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왕 맘몬 물신과 가증한 제국왕이 아니라 민중의 하느님, 목동들의 하느님, 산신령 엘로힘과 불기둥 야훼께 복종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복이 없는 결과를 당장 보여줍니다. 왕정 통치, 노예신세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포고령은 바로 복이 없는, 자유를 잃은 노예적 시민으로의 전락에 다름아닙니다. 포식자의 자유, 정글의 사자의 자유를 이야기하던 독재자는 입만 열면 자유 자유를 떠드나, 그 자유의 나라는 바로 포고령에 담긴 그대로입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그들이 내심 바라던 나라는 이 포고령에 담긴 민주 말살의 나라입니다. 우리 시민들은 이런 세상에 도무지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이란 우주적 하느님께 구복하여 인류와 생명의 평화를 입는 행위인데, 우리는 고작 소수 집권자들에게 구복하고 굴종하며 그들 군홧발의 노예로 살아야 할테니 소중했던 복을 강탈 도둑질 당하고 잃어버림이었겠지요. 그시로부터 ‘복 없음’이겠지요.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는 서기관들 곧 정치인들을 향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고발합니다. 사탄, 나라, 집, 강한자 (마가 3:23-27) 이런 낱말은 모두 정치인들을 가리키는데, 집은 성전 곧 그들 집무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성전체제가 결국 무너질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당시 서기관들 눈엔 반국가사범이고, 반체제인사로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이들은 권력유지만을 위해 기를 썼고, 그들은 인민들의 생활고나 형편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팔아먹고도 치렁치렁 서기관복을 입고 다니며 떵떵거리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는 이런 시대를 자주 꾸짖었습니다. ‘레부케’ 곧 '꾸짖다'라는 말을 마가복음에는 9번 나오는데 바람을 꾸짖고 더러운 영을 꾸짖고 사람을 꾸짖습니다. 더러운 영 귀신을 꾸짖는데, 귀신이 주님이신줄 알면서 따르지는 않으니 꾸짖으십니다. 양심을 팔아먹고 헛되고 망할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양심 대로 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미 콜롬비아 출신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 중에 <칠레의 모든 기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르포 형식의 소설은 망명 감독 미겔 리틴이 비밀리에 칠레에 잠입하여 피노체트 군부 독재가 12년째 되던 해를 무려 7천미터가 넘는 필름에 담았어요. 얼굴과 옷 말투까지 바꿔 완전 변장에 위조 여권을 들고 들어가 합법적 신분으로 외국 촬영팀에 섞여 비밀리 6주간 모든 촬영을 한 장본인의 실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가명으로 쓴 이 책에는 살해당한 좌파 아옌데 대통령과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4만명의 사망자, 2천명의 행방불명자, 100만명의 추방자에게 가한 국가폭력을 지우기 위해 반짝반짝 요란한 산티아고의 성탄 트리는, 정말 예수님이 성탄 트리나 세우라고 태어나신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피로 물들었던 산티아고 거리를 밟으면서 주인공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낍니다.
소설 내용엔 이런 구절이 나와요. “우리를 끌고 가던 군인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이런 주장을 하곤 했다. ‘우리는 무조건 중립입니다’라고...”
중립은 어떤 태도일까요. 이는 무관심과 외면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내가 택하고 말고 하는 부분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한 개인이 무관심, 중립을 택하고 말고가 아니라 이건 ‘이기적인 무책임’입니다. 멸망의 밤을 부르는 무게중심에 힘을 싣는 태도입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중립 인사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거부되었습니다. 무관심과 외면은 반국가사범으로 죽어 나가도 누구 하나 눈 깜짝하지 않았고, 신속하게 체포되고 사형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목은 자칭 유대인 민중의 왕, 재야 야권의 수괴라는 것이었지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사 선택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란 말이 있습니다만, 이걸 우리 신자들은 ‘죄로나 위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된다’고 고쳐 새기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는 ‘죄짓지 말고, 위를 탐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만한 자리를 택하면 하느님은 그를 ‘강등’시키실 것입니다.
다시 시편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은 수많은 악인들 속에 외로운 존재로 기도하며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리’ 에 앉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덥석 앉는 쿠데타의 주인공들처럼, 마치 계엄사령관처럼 우리가 탐하는 자리가 그런 것이 아니기를, 우리 인생에 놓고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으로 살지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 복은 주시는 분과 받는 자 둘이만 아는, 실로 신비한 축복일 것입니다.
빛이 비치길 빕니다. 양심의 빛, 신심의 빛이 우리 안에 켜져있길 빕니다. 주님 나라가 속히 오길 빌며, 우리가 바치는 참회 기도와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또한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