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후서 11장 5-9절. 충성스런 봉사의 자세 ②
5절.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consider myself not in the least inferior to the most eminent apostles.
λογίζομαι γὰρ μηδὲν ὑστερηκέναι τῶν ὑπερλίαν ἀποστόλων.
I consider for in nothing to have been inferior to those most eminent apostles
직역하면 ‘왜냐하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내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에서 동사(ὑστερηκέναι)는 완료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been inferior) 이미 부족한 것을 가리키고, ‘생각하노라’(λογίζο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consider) 현재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 엘리콧(Ellicott)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갈 2:9)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문맥상 맞지 않습니다. (The whole tone of the passage ought to have made it impossible for any commentator to imagine that the words referred to Peter and James and John as the pillars of the Church of Jerusalem (Galatians 2:9).
바울은 자기와 바나바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교제의 악수를 한 것을 기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쓴 후로 몇 달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가 시킨 대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행 21:26. ( He is glad to remember how they gave to him and Barnabas the right hand of fellowship. He presents himself at Jerusalem a few months after writing these words, and almost submissively follows the counsel which James gives him (Acts 21:26).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지극히 큰 사도’라고 비꼬면서 말한 대상이 베드로의 수사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나간 말입니다. (It is, accordingly, simply the insanity of controversy to imagine that these words have any bearing on the question of the primacy of St. Peter).
바울이 비꼬는 투로 말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란 말은 ‘극히 초월적인 사도’란 뜻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Those whom he holds up to scorn with an almost withering irony, as “apostles-extraordinary” (he coins a word which literally means, “these extra-special or over-extra apostles”), are the false teachers, claiming to stand in a special relation to Christ, to be His Apostles).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사람들로서 그 이름이 두 가지로 겹친 이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11장 13절(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에 더 완벽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perhaps, also, to have a double title to the name, as delegates of the Church of Jerusalem. Of these he speaks more fully in 2Corinthians 11:13.)
반스(Barnse)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사도로서 하나님이 파송하신 좋은 증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적들을 행했고, 수고도 많이 했고, 나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거짓 사도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사도로서 존중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거짓 사도들이 나를 밀어내고 너희들의 사랑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이 내가 가르친 교리들을 너희에게서 빼앗도록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I think that I gave as good evidence that I was commissioned by God as the most eminent of the apostles. In the miracles which I performed; in the abundance of my labors, and in my success, I suppose that I did not fall behind any of them. If so, I ought to be regarded and treated as an apostle; and if so, then the false teachers should not be allowed to supplant me in your affections, or to seduce you from the doctrines which I have taught.)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권리는 거짓 사도들보다 더 뛰어나다. (My claim is superior to that of the false teachers)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변형되심과 겟세마네의 고통의 증인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모든 사도들보다 자기를 높게 평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맥상 바울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자기를 비교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단지 자기와 거짓 사도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the very chiefest apostles—James, Peter, and John, the witnesses of Christ's transfiguration and agony in Gethsemane, rather, "those overmuch apostles," those surpassers of the apostles in their own esteem. This sense is proved by the fact that the context contains no comparison between him and the apostles, but only between him and the false teachers;)
매튜폴(Matthew Poole)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그 보다 더 먼저 된 사른 사도들을 높이 평가하고 바울보다 더 존경함으로써 바울은 비방하는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that false teachers used to vilify Paul, was by magnifying some others of the apostles above him, and preferring them before him;)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노라’는 말은 바울 사도가 온화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거만하게 자기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하기는 은사와 은혜와 유용성에 있어서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This is very modestly expressed by the apostle; for he does not assert, and in a haughty and confident way affirm, but only supposes, or thinks that this might be admitted, that he was not inferior to, or did not come short of, in gifts, grace, and usefulness,)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살아계실 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대하셨던 뛰어나고 기둥 같이 보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such as Peter, James, and John; who seemed to be pillars, were eminent apostles, of great note among them, and such as Christ, in the days of his flesh, took particular notice of.)
이것은 바울이 자기를 높이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를 바울보다 더 높이는 얼마나 분별력 없는 짓인가를 보여주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들의 은사와 학식과 웅변술과 유용성을 매우 자랑하고 자기들을 모든 사도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높이는 거짓 사도들을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비꼬는 투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This he says, not to exalt himself, but to show, how weakly and injudiciously the Corinthians acted in setting up the false apostle above him; or else these words are spoken ironically, and design the false teachers, who vaunted so much of their gifts, learning, eloquence, and usefulness; and extolled themselves at such a rate, as if they were , "greatly above the apostles"; and therefore he jeeringly calls them).
2. 여기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을 <지극히 큰 사도>라고 자랑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말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추천서를 가진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거짓 사도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추천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물도 잘생겼고, 설교도 잘한다고 자랑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이런 추천서도 없고, 못생겼고, 설교도 잘못하고, 자기 병도 고치지 못하고, 환상도 보지 못했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말씀한 대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참 사도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로부터 떳떳하게 사례비를 받지만, 바울은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방했습니다.
3. 그러자 바울은 자기가 <지극히 큰 사도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음 6절에서 자신이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은 자기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9절에 말씀한 대로 다른 교회 즉 빌립보 교회 같은 곳에서는 선교비를 받았던 것입니다.
4. 그리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설립한 교회에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고생한 고난의 목록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바울의 고난의 목록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볼 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참 사도로서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들을 당했던 것입니다.
5. 그리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은 환상을 많이 보았으나 바울은 환상을 보지 못했다고 비방한 데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4절에서 삼층천에 갔다 온 체험을 3인칭으로 말했습니다.
6. 그리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선교헌금을 도둑질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하자,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6-18절에서 자신이나 디도가 도무지 구제 헌금을 탈취한 적이 없다고 변호했습니다.
7. 그러면서 바울은 오히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군이요, 사단의 일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서 “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서는 “사탄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 말했습니다.
8.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지극히 크다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줄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모릅니다.
정말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바울 사도를 당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무시하고 멸시했다니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들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육신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바울 사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도, 가까이서 육신을 보면 위대한 인물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 생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영안이 열린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9.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수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셨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고, 단순히 사람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이 신성 모독했다고 처형을 했던 것입니다.
10. 우리 교회에도 역사적인 인물들이 몇 분 계십니다.
육신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라보고 무시하지만, 정말 역사적인 인물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기도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교회가 여러 가지 시험 풍파 속에서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저는 우리하고 교단이 다르지만 조용기 목사님도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몰라보는 사람들은 몰라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나라 최고의 직분자들이 알게 될 것이며, 전 세계 지도자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를 세월이 지나자 위대한 사도로 알게 되었듯이, 오늘날도 역사적인 인물들을 역사가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분들과 목숨 걸고 기도하시는 분들과 진정으로 충성하시는 분들을 알아주고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님들은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even if I am unskilled in speech, yet I am not so in knowledge; in fact, in every way we have made this evident to you in all things.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εἰ δὲ καὶ ἰδιώτης τῷ λόγῳ,
if however even unpolished man in the speech
‘부족하나’(ἰδιώτης)는 명사로서 ‘능숙하지 못한 사람, 아마추어, 비전문가, 평범한 사람, 은사가 없는 사람’(unskilled person, an amateur, an unprofessional man, a layman; an ungifted person)을 가리킵니다.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ἀλλ’ οὐ τῇ γνώσει,
but not in the knowledge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ἀλλ’ ἐν παντὶ φανερώσαντες ἐν πᾶσιν εἰς ὑμᾶς.
but in all being made manifest in all to you
‘나타내었노라’(φανερώ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being made manifest) 과거에 확실히 나타낸 것을 가리킵니다.
1. 엘리콧(Ellicott)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에 부족하다’는 단어는 고린도전서 14장 23-24절에 말씀한 것같이 ‘배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때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문맥상 분명한 것은 바울을 빈정대는 적대자들이 소위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는 유대주의 교사들(Judaising teachers)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랍비적 궤변술, 랍비들의 비유적인 해석을 버렸기 때문에, 바울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The word for “rude” is the same as that translated as “unlearned” in 1Corinthians 14:23-24. This, then, had also been said of him by some at Corinth. The context, however, makes it clear that the opponents now under the lash are the Judaising teachers, the “apostles-extraordinary.” They apparently affected to despise him because he had abandoned, or had never mastered, the subtleties of Rabbinic casuistry, the wild allegories of Rabbinic interpretation.)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에는 부족하나’란 말은 고린도후서 10장 10절(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하다’란 말((ἰδιώτης)은 공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즉 평민이나 문맹이나 학문이 없는 사람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거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는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4장 16절에는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의 언어는 배움이 없는 평범한 사람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를 비난하려고 한 말이었으나 바울은 그 말의 진의를 부분적으로 시인한 셈입니다. ( 2 Corinthians 10:10. The word rendered "rude" here (ἰδιώτης idiōtēs) means properly a private citizen, in opposition to one in a public station; then a plebeian, or one unlettered or unlearned, in opposition to one of more elevated rank, or one who is learned; see the Acts 4:13 note; 1 Corinthians 14:16 note. The idea is, my language is that of a plain unlettered person. This was doubtless charged upon him by his enemies, and it may be that he designed in part to admit the truth of the charge.)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란 말은 바울이 자기가 가르치고 고백하는 신앙에 대해서 무식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무식하다고 비난한 적은 없었습니다. (Yet not in knowledge - I do not admit that I am ignorant of the religion which I profess to teach. I claim to be acquainted with the doctrines of Christianity. It does not appear that they charged him with ignorance.)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내었노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철저히 알게 될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나는 내 말과 지식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을 너희가 익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You have known all about me. I have concealed nothing from you, and you have had ample oppotunity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me. The meaning is, "I need not dwell on this. I need speak no more of my manner of speech or knowledge. With all that you are well acquainted.")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에는 부족하나’란 것은 언어 구사에 유능하지 않다는 것인데, 고린도전서 2장 2-4절과 13절,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나와 있는 대로, 그의 글은 무게가 있으나, 그의 말은 웅변적인 기술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러나 내가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고후 12:1-5, 엡 3:1-5). (a "laic"; not rhetorically trained; unskilled in finish of diction. 1Co 2:1-4, 13; 2Co 10:10, 11, shows his words were not without weight, though his "speech" was deficient in oratorical artifice. "Yet I am not so in my knowledge" (2Co 12:1-5; Eph 3:1-5).
헬라어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란 말이 맞는데, 그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진리를 너희 유익을 위해서 나타내었다’는 뜻입니다. ( The Greek rather favors the translation, "among all men"; the sense then is, we have manifested the whole truth among all men with a view to your benefit [Alford])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에는 비록 부족하나’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유명한 사람들처럼 말을 우아하게 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대적자들이 비판한 것을 수긍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식하거나 말을 바보처럼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반대인 것을 그의 편지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 전도하거나 설교할 때, 수사학적 용어나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거나 인간적인 지혜로 부풀려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좀 더 평범하고 쉬운 말로, 편리하고 통속적인 말로 전도했으며,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철학자나 높은 관리들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주로 일반 백성들을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 랍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중적인 말로 전도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말로 전도하고 설교했습니다. (Which might be objected to him, setting himself upon a level with men so famous for their diction, and elegance of style; and to this he answers, not by owning he was so, but granting it to be so; for the Apostle Paul was not an unlearned man, an idiot in speech, unskilful in language, his writings testify the contrary; he did not indeed, in his public ministry, dress his sermons with the flowers of rhetoric, or adorn his discourses with the words of human wisdom, with bombast, and great swelling words of vanity; he chose a plainer and easier style, more accommodated to the vulgar, to the capacities of the people he was concerned with; for he had not to do with philosophers and senators, but with the common people chiefly; with persons of every sex, age, and condition of life: in this sense indeed he acted as an idiot, a plebeian, a private person; he used a popular style, or, as the Jews say of several of their Rabbins (s), he , "preached", or explained "in the common language" of people; which the common people used, and not the learned, and to which reference may be had here:)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란 말은 바울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데는 아주 재주가 뛰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의 교리들을 아는 지식에서 아주 유능했고, 이것은 그의 모든 담화들과 설교들과 편지들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skilful in the mysteries of the Gospel; he was well learned in the knowledge of Christ, and in the doctrines of grace, as all his discourses, sermons, and letters testified;)
‘우리가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로 나타냈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과 삶의 모습이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잘 알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은혜의 신비에 대한 바울의 지식을 나타냈고, 영원한 복음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지식을 나타냈고,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인공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잘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알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에 대한 진실성을 그들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을 덮고 그들의 행동과 교리를 덮으려고 한 위장과 속임수를 바울이 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his faith and doctrine, as well as manner of life, were well known unto them; he had not shunned to declare the whole counsel of God unto them: his knowledge in the mystery of Christ's person and grace, and in all the parts of the everlasting Gospel, was no secret to them; he had used no artful methods to hide himself, or conceal the truth; but by manifestation of it, had commended himself to every man's conscience in the sight of God; and by observing this, as he had witnesses now among them of the truth of it, so he strikes at the hypocrisy and deceitful methods the false teachers took to cover themselves, their practices, and principles.)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2. 바울 사도는 말을 잘하는 웅변술과 수사학에 약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말을 더듬는 약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약점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에게 있어서 말을 더듬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와 한때 신학교에서 같이 교수를 했던 목사님(오**)은 말을 더듬어서 교회에서 목사로 초빙을 받지 못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만 했습니다.
3. 말의 웅변술이나 말의 지혜로 전도하지 않았고, 오직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처럼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했고, 또한 철학이나 도덕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실제로 복음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런 표적들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말로만 전도하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병을 고쳐주면, 전도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4. 제가 신유 은사를 가진 목사님을 만나서 경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만나자고 해도 만나기 어려운 고관들이 병을 치료해준다고 하면 서로 만나보려고 야단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목사님만 대동하면, 아무리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도 다 환자로서 겸손하지, 의사 앞에서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5. 그렇기 때문에 제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전도하면서 반드시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전도하려 보내실 때,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2.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가복음 16:15-18.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6. 이처럼 바울 사도는 말에는 부족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해서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 하니>
1. 바울은 능숙한 말솜씨는 갖추지 못했으나, 지식에는 풍부했습니다.
실지로 바울은 유대인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 대학을 나왔고, 박학다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서 아테네 전도시에는 바울이 헬라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쓴 바울 서신들은 다른 사도들의 성경과 비교해볼 때, 유식한 문장으로 쓰여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나 요한이 기록한 글들은 아주 쉽고 단순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바울의 지식은 이런 세상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풍성했음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구약성경 말씀에 대해서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바울이 쓴 성경이 절반가량이나 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1. 바울이 말에는 부족하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그동안 복음 전도를 통해서 바울이 말에는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해서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설립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식에는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방인에게 전도할 때 나타내었고, 또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 24절에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들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전해줌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아 부흥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5절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들도 말에는 비록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힘있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대로 복음 전도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7-1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전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말에는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해서 많은 결실을 맺은 것처럼,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많은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 자녀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7절.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r did I commit a sin in humbling myself so that you might be exalted, because I preached the gospel of God to you without charge?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죄를 지었느냐
Ἢ ἁμαρτίαν ἐποίησα, ἐμαυτὸν ταπεινῶν, ἵνα ὑμεῖς ὑψωθῆτε,
or sin did I commit, myself humbling, so that you you might be exalted
직역하면 ‘너희가 높아지게 하려고 나를 낮추므로 내가 죄를 범했느냐’는 뜻입니다.
‘너희가’(ὑμεῖς: 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높이려고’ (ὑψωθῆτε)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ou might be exalted) 확실히 높아지게 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낮추어’(ταπεινῶν)는 현재분사로서(humbling) 현재 낮추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죄를 지었느냐’에서 동사(ἐποίησα)는 부정과거로서(did I commit) 확실히 죄지었냐고 묻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ὅτι δωρεὰν τὸ τοῦ Θεοῦ εὐαγγέλιον εὐηγγελισάμην ὑμῖν;
because freely the of the God gospel I preached to you ?
‘전함으로’(εὐηγγελισάμην)는 부정과거로서(I preached) 단호하게 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1.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과거에 물질적 후원(선교비)을 받았으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곳(마게도냐 교회 예컨대 빌립보교회)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물질적 후원(사례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다른 교인들이 바울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he had received a support, but that it had come from others, a support which they had furnished because the Corinthians had neglected to do it.)
이처럼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 받은 것이 죄를 지은 것이냐고 비뚤어서 물은 것입니다. (Have I committed an offence)
‘나를 낮추어’란 말은 ‘내 손으로 일함으로써’, ‘내가 스스로 가난하게 됨으로써, 사례비를 달라고 합리적으로 주장하지 않음으로써’란 뜻입니다. (In abasing myself - By laboring with my own hands; by submitting to voluntary poverty, and by neglecting to urge my reasonable claims for a support.)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낮추어’란 말씀은 사례비를 청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내 손으로 수고하여 생계비를 버는 것을 가리킵니다. (]abasing myself—in my mode of living, waiving my right of maintenance, and earning it by manual labor (Ac 18:3; Php 4:12).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나를 낮춤으로 죄를 범한 것이냐’-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처음 전도할 때 매우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전하고, 두렵고 떨림을 갖고 아무런 자존심이나 거만함 없이, 그들에 대한 권위와 권세를 갖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천막 장사를 하여 자기 손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 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가 죄 지은 것이 아니고,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라는 것이고, 이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리 생각해달라는 것이나 그가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란 뜻입니다. (Have I committed an offence in abasing myself,.... Either by behaving among them, when he was first with them, in a very modest and humble manner, in much fear and trembling, without pride and haughtiness, or affectation of power and authority over them; or by using a popular style, suited to the capacity of the common people; or by labouring with his own hands, exercising his trade of tent making among them, that he might provide food for himself, and not be chargeable to them; and which he suggests was so far from being criminal in him, that he ought rather to be commended for it; since it could not be thought to be with any view to himself, and his own advantage, but purely for their good:)
‘너희를 높이려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장애나 편견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쉽게 듣고, 복음을 알고, 받아들이도록 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여 높아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과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영광과 위엄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고, 인간의 자녀들보다 더 좋은 이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고,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는 권리와 이름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that you might be exalted; that nothing might lie in their way of receiving the Gospel of Christ, or prejudice them against it; that they might the more easily be brought to listen to it, come to the knowledge of it, and embrace it, and so be exalted, as they were, to a participation of the grace of Christ; to fellowship with him; to the honour and dignity of being a church of Christ; to an enjoyment of the privileges of God's house; to have a name better than that of sons and daughters, and to have a right and title to the heavenly glory: )
‘내가 값없이 복음을 전함으로 너희에게 죄를 지었느냐’는 것은 바울이 처음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아무런 비용을 받지 않고, 거저 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비록 바울은 합법적으로 비용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지워주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일하여 자기의 필요를 채워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물질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고,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무보수로 복음을 전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바울이 복음 전도의 비용을 받지 않은 것이 사례비를 받는 거짓 사도들을 높이 평가하고, 복음을 값없이 그들에게 전한 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을 멸시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his he preached "freely" to the Corinthians at his first coming among them, without putting them to any expense, or receiving anything from them; which though he might lawfully have done, yet he judged it most advisable, at that time, to minister to his own necessities, by working with his hands, lest he should be burdensome to them; and this be an objection to the Gospel he preached, that he sought rather theirs than them; and for so doing he was not to be blamed, but to be praised: and yet such was the weakness of many at least in this church, that they highly valued the false apostles, who made merchandise of them, and treated with contempt this excellent servant of Christ, who had freely imparted the Gospel to them.)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1. 바울 사도는 교인들 위에 자기를 높여서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도의 직분은 교회에서 최고의 직분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최고로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도 시대 이후로 교회의 감독만 되어도 얼마나 대단한 권한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즉 감독은 그 지방의 모든 교역자들의 인사 문제를 총괄했고, 교회의 모든 재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 후로 천주교의 교황은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르듯 높았습니다.
특히 교황은 당시에 군왕들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존경과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감리교의 감독직만 해도 교역자 임명권과 재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독이나 교황보다도 더 높은 사도는 얼마나 높은 존경과 권한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2.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도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종의 위치로 낮추어서 교인들을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목숨까지 희생하시며 종노릇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종노릇 하는 모습을 친히 보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우리들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분인 사도의 직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어서 고린도 교인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높은 사도가 교인들을 섬겼으면 고린도 교인들은 너무도 황송해서 바울 사도를 주님처럼 존경하고 섬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를 존경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특히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방하는 말에 동조했던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방하기를 바울이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넘어가 바울을 거짓 사도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은 사도로서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아까지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1.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고 아무런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 예를 들면 빌립보 교회 같은 곳에서는 바울에게 너무도 감사해서 당장 선교헌금을 몇 번이나 보냈습니다.
빌립보서 4:15-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그렇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해주었어도, 바울 사도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방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죄악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악행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사례비조차 받지 않은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라고 비방했으니,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이처럼 초대교회인 고린도 교인들은 있을 수 없는 악행을 바울 사도에게 했던 것입니다.
2.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해주었으면, 고린도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도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실제로 소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주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5장 18절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3. 이처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고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6-11.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가 사례비를 받는다고 ‘삯꾼 목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 장로(나**)는 제직회상에서 교역자의 품삯은 사례비이기 때문에 주어도 되고 안 주어도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라는 말은 품삯에 대한 말을 높여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례비는 반드시 주어야 하는 것이지, 주어도 되고 안 주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12-15.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4.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사례비 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은 복음 전도에 아무리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3.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사례비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이처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5.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사례비를 받았으면, 바울을 생각하여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 사도를 모함하여, 바울은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기들은 참 사도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사례비를 받는다고 악한 주장을 했습니다.
6.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바울이 진짜 사도라면 복음 전하는 자의 당연한 권리로서 사례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권리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사례비를 받는 사도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은 바울이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먹힌 것은 당시 헬라 사회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즉 당시 헬라 사람들은 선생님들이 돈을 받고 가르치는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말에 고린도 교인들이 잘 넘어갔던 것입니다.
7. 그러나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에 따라서 살아갔기 때문에,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희생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 된 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사례비를 바울이 받고 있지 않으므로, 사례비를 받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입장이 불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 사도를 모략한 것입니다.
8. 그러나 바울 사도는 참으로 희생적인 사역자였고, 성도들을 사랑한 참된 목자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목자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오히려 나쁜 사도로 모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혹시 자신이 지나친 희생 때문이라면 용서해주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진심을 이해해 달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 사도는 너무도 희생적이고 훌륭한 사도였습니다.
너무도 존경해야 할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희생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을 오해하지 마시고, 오히려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 희생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robbed other churches by taking wages from them to serve you;
(다른 여러 교회에서) 탈취한 것이라.
ἄλλας ἐκκλησίας ἐσύλησα,
other churches I robbed,
‘탈취한 것이라’(ἐσύλησα)는 부정과거로서(I robbed) 과거에 확실히 탈취한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비용을 받은 것은
λαβὼν ὀψώνιον πρὸς τὴν ὑμῶν διακονίαν,
having received wages for the toward you service
직역하면 ‘너희를 향한 봉사를 위해서 비용들을 받음으로’란 뜻입니다.
‘받은 것은’(λαβὼν)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received) 과거에 확실히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본 절이 한글 새번역에는 “나는 여러분을 섬기기 위하여 삯을 다른 여러 교회에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교회에서 빼앗아 낸 셈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용’이란 단어는 엄격한 의미에서 돈이라기 보다는 휴대용(보급용) ‘식량’(rations, provisions)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3:14에는 ‘급료’, 로마서 6장 23절에는 ‘삯’, 고린도전서 9장 7절에는 ‘비용’. (The word for wages—strictly rations, or wages in kind, rather than in money—is found in Luke 3:14; Romans 6:23; 1Corinthians 9:7).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교회들에서 탈취한 것이다’란 말씀은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워준 것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회를 가리킬 것입니다(빌 4:15-16). 빌립보 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도 바울을 더 많이 후원했습니다. ‘탈취했다’란 단어는 바울이 폭력적인 방법이나 불법적으로 무엇을 탈취했다는 뜻이 아니고, 또 빌립보 교회가 자원해서 준 것이 아니란 뜻도 아닙니다.(I robbed other churches - The churches of Macedonia and elsewhere, which had ministered to his needs. Probably he refers especially to the church at Philippi (see Philippians 4:15-16), which seems to have done more than almost any other church for his support. By the use of the word "robbed" here Paul does not mean that he had obtained anything from them in a violent or unlawful manner, or anything which they did not give voluntarily.)
원래 이 단어는 ‘약탈했다, 노략했다, 도적질했다’란 뜻이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준 것과 동등하게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쓴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 일하는데도 바울에게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한 정복군은 점령지 백성에게서 탈취한 것과 동등한 무엇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약탈했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해야 마땅하다’는 바울의 일반적인 원리를 말한 것이고, 사람은 자기가 섬기고 일해주는 사람에게서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고전 9:7-14). 그러나 이 경우에 바울은 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일을 고린도 교회에서 하고 보수는 빌립보 교회에서 받았기 때문에, ‘탈취한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The word (ἐσύλησα esulēsa) means properly, "I spoiled, plundered, robbed," but the idea of Paul here is, that he, as it were, robbed them, because he did not render an equivalent for what they gave him. They supported him when he was laboring for another people. A conqueror who plunders a country gives no equivalent for what he takes. In this sense only could Paul say that he had plundered the church at Philippi. His general principle was, that "the laborer was worthy of his hire," and that a man was to receive his support from the people for whom he labored (see 1 Corinthians 9:7-14), but this rule he had not observed in this case.)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교회들에게서 탈취한 것이다’란 의미는 마게도냐 교회들에게서 선교비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선교비는 강제로 약탈한 것이나 그들의 물질을 탈취한 것이 아니고, 마치 군인들이 정복민들에게 강압한 것처럼 마게도냐 교인들의 의지에 반해서 우려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받은 것은 다음절에 본 대로 강압이 아닌 자유의지로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I robbed other churches,.... Meaning the churches of Macedonia; not that what he had of them was by force and rapine, or by plundering of them, and spoiling of their substance, and living upon them against their wills, as soldiers use a conquered people, though the allusion is to such a custom; for what he had of theirs was freely communicated to him; as appears from the following verse:)
비록 마게도냐 교회들이 자원해서 선교비를 바울에게 주었지만,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에서 받은 선교비가 부유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마게도냐 교회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but because these churches from whom he received were poor, and the Corinthians whom he served were rich, he calls it a robbing of the former, though there was no injury in the case, for it was voluntary, because it was expended for the service of the latter:)
‘너희를 섬기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비용을 받은 것’에서, 바울은 비유를 계속 말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전쟁을 위해서 급료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인데, 복음 전도자들도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비용으로 전쟁에 나가지 않고, 자기가 섬기는 자들에게서 비용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바울 사도가 그 당시에 바울이 봉사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용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 바람직하지 않았더라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일하는 비용을 그 대신에 마게도냐 교회에서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The apostle continues the metaphor, taken from soldiers, to whom wages are due for their warfare; as are also to the ministers of the Gospel, the good soldiers of Jesus Christ; since no man goes a warfare at his own charges and expense but is for by those in whose service he is: and therefore, though the apostle did not think it advisable to ask for, and insist upon wages from them at that time, for his service among them, yet he took it of others in lieu of it;)
그리고 바울은 한편에서는 자기의 선교 사역에 대해서 비용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에게 신세진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게도냐 교회들이 고린도 교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고린도교인들도 예루살렘 교회에게 봉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and this he mentions, partly to show that wages were due to him for his ministry, and partly to observe to them who they were beholden to for the support of the Gospel at first among them; as also to stir them up to be serviceable to other churches, as others had been to them.)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방하자, 바울은 자신이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아서 고린도 교회에 와서 무료로 시무한 것이 ‘탈취한 행위’라고 자신을 비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선교비는 빌립보 교회에서 받고, 일은 고린도 교회에서 했기 때문에, 실상 빌립보 교회에서 사례비를 ‘탈취한 것’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비를 하려면 빌립보 교인들이 왜 선교비는 우리에게서 받고 시무는 고린도 교회에서 하느냐고 시비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교비를 준 빌립보 교회는 가만있는데, 혜택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사례비 받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2. 이렇게 교회는 말이 많은 곳입니다.
바울 사도 같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가지고, 사례비 시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도 않고 사례비를 받았다면, 문제를 삼을지 몰라도, 바울이 선교비는 빌립보 교회에서 받고, 일은 고린도 교회에서 해주었는데, 막상 시비해야 할 빌립보 교회는 가만있고, 혜택을 본 고린도 교인들이 시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3. 교회에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막상 피해를 본 사람은 가만있는데 옆 사람이 시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구역에서 보험하는 성도가 한 구역 성도에게 보험을 들게 하고, 보험에 든 성도는 돈이 부담되니까, 그만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해 본 사람은 가만있는데, 그 구역의 권사님이 나서서 보험하는 성도를 찾아가서 막 야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손해 본 성도의 남편이 권사님이 야단하고 다니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해 본 성도의 남편이 아내에게 교회를 못 가게 했습니다.
이 경우에 물론 권사님은 일을 잘해보겠다고 그랬지만, 그런 경우에 지혜롭게 해야 했습니다.
우선 권사님은 성도들 간의 시비는 당사자끼리 시비를 가리게 하고, 기도하고 되도록 가만있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사가 보안관이 되어서 성도들 간의 돈 문제를 시시비비 가린다고 시끄럽게 간섭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한 성도만 교회 못 나오도록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손해 본 당사자는 가만있는데, 제삼자가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해서는 일을 더욱 나쁘게 만듭니다.
4.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그랬습니다.
막상 선교비를 보내준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일해도 가만있는데, 혜택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일하고도 사례비를 안 받는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자기가 빌립보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고 고린도 교회에서 일해주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에서 비용을 ‘탈취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5.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일하는 일군이 품삯을 받는 것이 세상 이치로나 성경적으로도 옳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7-11.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이처럼 바울 사도는 사역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6. 그러면 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례비를 받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 했지만, 그 후로 고린도 교회가 4파로 갈라져 싸우면서,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로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전서 1장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 오히려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 받는 것을 보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교회의 원리를 올바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사역자가 사례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두었습니다.
7. 그런데도 바울이 사례비 받지 않는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즉 바울을 반대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사례비 받지 않는 이유를 바울이 거짓 사도이기 때문이라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추천서를 받아온 참 사도이기 때문에 떳떳하게 사례비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뒤로 디도를 통해서 선교헌금이나 구제 헌금을 도둑질해 먹는 도둑놈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8. 이것은 선을 악으로 보는 것이며,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악행이었습니다.
정말 바울은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에서 말씀한 대로, 목숨을 내걸고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믿는 천국 백성이 되게 했고, 또 무보수로 목회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을 천국 백성으로 안내해준 바울 사도에게 절대적으로 감사해야 하고, 또한 무보수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바울 사도에게 얼마나 많이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까?
자녀들도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고, 또한 자기를 길러준 부모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고, 자기들에게 무보수로 하나님 말씀을 전해준 바울 사도를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는 얼마나 마음 아프고 속이 상하겠습니까?
9. 이처럼 바울은 복음 전하면서 밖에서 불신자들에게 핍박받는 것도 서러운데, 안에서 교인들에게 거짓 사도요 도둑놈으로 비난을 받으니, 안팎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복음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의 목록들을 27가지 나열하고서도,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이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밖에 나가서 돈을 버느라고 고생하는 부모가 집에 들어와서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안팎으로 고생을 당하면 불신자는 <내 신세가 왜 이러냐>고 한탄하고, 믿는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도 역대하 20장 12절에서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깊은 굴속에 빠진 예레미야가 저 높은 굴 입구로 보이는 하늘만을 쳐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런 절망 가운데서는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도록 고생해서 천국 백성 되게 해준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하고, 죽도록 고생해서 기른 자식도 부모에게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영원한 반석과 요새와 산성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when I was present with you and was in need, I was not a burden to anyone; for when the brethren came from Macedonia they fully supplied my need, and in everything I kept myself from being a burden to you, and will continue to do so.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καὶ παρὼν πρὸς ὑμᾶς καὶ ὑστερηθεὶς,
and being present with you and having been in need,
직역하면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궁핍한 가운데 있었는데’란 뜻입니다.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서 동사(παρὼν)는 현재분사로서(being present) 계속 함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용이 부족하였으되’(ὑστερηθεὶς)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in need) 과거에 확실히 부족한 가운데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οὐ κατενάρκησα οὐθενός·
not I did burden no one
동사(κατενάρκησα)는 부정과거로서( I did burden) 과거에 부담을 주지 않은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καταναρκάω)은 ‘아래로’(κατά)라는 접두어와 ‘마취시키다’( make numb, stupefy)는 동사(ναρκάω)의 합성어로서 ‘의학용어로 마비시키다, 짐 지우다, 막다’(grow numb properly a medical term: stupefy, burden, encumber )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τὸ γὰρ ὑστέρημά μου προσανεπλήρωσαν οἱ ἀδελφοὶ ἐλθόντες ἀπὸ Μακεδονίας·
that for need of me completely filled up the brothers having come from Macedonia
‘보충하였음이라’(προσανεπλήρωσαν)는 부정과거로서(completely filled up) 과거에 완전히 보충한 것을 가리킵니다.
‘온’(ἐλθόντες)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ome) 과거에 확실히 온 사실을 가리킵니다.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καὶ ἐν παντὶ ἀβαρῆ ἐμαυτὸν ὑμῖν ἐτήρησα
and in everything unburdensome myself to you I kept
‘조심하였고’(ἐτήρησα)는 부정과거로서(I kept) 과거에 확실히 조심한 것을 가리킵니다.
또 조심하리라.
καὶ τηρήσω.
and I will keep
‘조심하리라’(τηρήσω)는 미래형입니다.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를 끼친다’는 단어는 이곳 외에는 신구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히포크라테스의 저서 외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제롬은 이 단어가 길리기아 지방의 토착어라고 했으나 증거는 없습니다. ( The verb (katanarkaô) is not found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nor in the LXX. versions of the Old, nor, indeed, in any known Greek author, except Hippocrates. Jerome describes it as belonging to the patois of Cilicia, which, if true, would be interesting; but he gives no proof of it (Ep. ad Aglaia), and the statement must be treated as unproven.)
이 동사의 명사형은 첫째 무감각이나 무기력이나 진통제라는 말에 사용되고 있고, 둘째 사람의 몸에 닿으면 몸을 마비시키는 물고기의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힙포그라테스와 갈렌이 ‘마취되다, 마취시키다’는 동사로 사용했습니다. ( The history which we are about to trace, tends, however, to confirm it as a probable conjecture. The root of the verb is found in the noun narkè, which is used (1) for “numbness,” or “torpor” (a sense found in our “narcotic”), and (2) as the name of a fish of the torpedo genus, causing numbness by its contact with the human body (Aristotle, Anim. Hist. vi. 10). The verb derived from the noun is accordingly used by Hippocrates and Galen in the sense of “being benumbed,” or causing numbness. (See Foesius, Lexic. Hippocrat. s.v, ναρκὴ.)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마비시킨다는 것은 그를 남김없이 착취하다, 그를 억압하여 생기를 빼앗아버리다, 그를 우려 먹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바울은 ‘나는 저희 재산을 고갈시키지 않았고, 너희를 우려먹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 As used here, it takes its place as a bold figurative expression. To benumb any one, was to exhaust him, to drain him of his vitality by pressing on him, and, as it were, living upon him. St. Paul accordingly means, in using the word, to say, “I didn’t drain you of your resources—did not live upon you.”)
이 말이 현대어로는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서 기생하는 사람’이란 말로 사용되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 붙어서 사는 ‘기생충’을 의미합니다. (Our modern phrase which speaks of one man as “sponging” on another implies a like metaphor. In the word “parasitic” as applied to plants and animals, we have an inverted transfer of the same idea from the incidents of man’s social life to that of lower organisms.)
힙포크라테스를 통해서 이 말이 의학용어임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의사인 누가를 통해서 이 말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향인 다소에는 유명한 의학 학교가 있었는데, 바울은 다소에서 이 말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롬은 이 말이 다소 지방의 지방 언어라고 했습니다. (As a word belonging, through Hippocrates, to the recognised terminology of physicians, it takes its place in the vocabulary which St. Paul may be supposed to have derived from St. Luke (see Introduction to St. Luke’s Gospel, Vol. I., p. 239), and which the fame of Tarsus as a medical school may also have made more or less familiar, as Jerome states, in the conversational idioms of Cilicia.)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함을 보충하였다’는 것은 사도행전에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이 이 사실에 부합합니다. 즉 빌립보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바울에게 두 번이나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이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냈다고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The brethren which came from Macedonia supplied.—Not “which came,” but when they came. The Acts of the Apostles present no record of any such supply, but Philippians 4:15 presents an interesting and confirmatory coincidence. The Philippians had sent supplies to him twice at Thessalonica, and it was a natural sequel to this that they should send to him also at Corinth.)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준 선교비를 기쁨으로 받았을 것이고,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이득을 위해서 전도하지는 않았다는 자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 9:16-18).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한 착한 일에 대해 처음부터 편애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바울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The Apostle may well have accepted what they thus sent, and yet have thought his acceptance perfectly compatible with his boast that he was not preaching at Corinth for the sake of gain (1Corinthians 9:16-18). He was not to be robbed of whatever credit attached to his working for his own livelihood at Corinth and elsewhere, by any sneers which had that acceptance for their starting-point.)
‘또 조심하리라’는 말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전도하려는 원칙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를 막 떠나서 도착한 에베소 교회에서도 이 말을 했고요(행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그가 지금 방문하고 있는 마게도냐 교회들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살후 3: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리고 ‘조심하리라’는 미래형은 바울이 심방하기로 약속한 고린도에서도 똑같이 처신할 것이라는 결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nd so will I keep myself.—It adds to the interest of this declaration to remember that St. Paul had acted on this principle both at Ephesus, which he had just left (Acts 20:34), and in the Macedonian churches which he was now visiting (2Thessalonians 3:8). The future tense obviously points to his resolution to continue to act on the same lines during his promised visit to Corinth.)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대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 하였음은>
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 생활비가 부족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으려고 했나요?
그것은 오늘 말씀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같은 곳에서는 선교헌금을 두 번씩이나 받을 정도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는 두 번이나 선교헌금을 받았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한 번도 사례비를 받지 않았을까요?
네, 빌립보 교회는 마음이 편하고, 고린도 교회는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마음이 편한 부모에게는 돈을 달라고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는 친척에게는 돈을 달란 말을 않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도 마음이 편한 빌립보 교회에서는 선교헌금을 받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일하고 사례비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나요?
네, 고린도 교회는 처음에 바울이 전도해서 설립한 교회였지만, 중간에 4파로 나누어져서 바울파 외에 다른 세 파는 바울을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실상 야고보파)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충동을 받아서 오히려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전서 1장 12절 말씀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4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지도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파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일하고서도 사례비조차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서로 싸우면, 자식들이 집에 들어가 밥을 먹기도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가 싸우면, 교회 가기도 싫고 목사 설교를 듣기도 싫고 교회 봉사도 싫어집니다.
그래서 자연히 교회는 쇠퇴하고 맙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4파로 나누어져 있고, 그리스도파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선동을 받고 있으니까, 바울 사도도 사례비도 받지 않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웠어도 바울은 내색을 하지 않고, 아무 성도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평안하면 목사가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도 기쁩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치 못하면 목사가 성도님들의 도움을 받기가 불편해집니다.
혹시 어떤 성도의 도움을 받았다가 욕을 먹지나 않을까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보다도 평안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되고, 교회는 날로 부흥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1.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란 디모데와 실라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8장 3절에서는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도착해서는 혼자였기 때문에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 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8장 5절에 말씀한 대로, 마게도냐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복음 전도를 힘차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혀 힘차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그동안 천막 장사하던 것을 그만두고, 오로지 복음 전도에 힘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천막 장사를 그만두고 오로지 복음 전도에 전력할 수 있었나요?
네, 그것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선교헌금을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서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함을 보충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1. 과거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반대파들이 바울을 비난했기 때문에,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사례비를 당분간 계속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말씀입니다.
자식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도움받기를 거절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얼마나 고린도 교회가 바울 사도를 마음 아프게 했으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2. 그러면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바울이 이처럼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합니까?
네, 고린도 교회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에게 너무나 몹쓸 짓을 했습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했고, 바울 사도를 도둑놈이라고 비난했고, 설교도 잘 못 한다고 했고, 못생겼다고 인신공격했고, 자기 병도 못 고치고, 심지어 환상도 못 보았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악하다고 이런 인신공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는 사람이 타락하고 악한 마귀가 역사하면,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는다고 했고, 천사가 타락하면 마귀가 된다고 했고, 한번 성령 받고 타락한 사람은 다시는 새롭게 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교회에 와서 교역자를 괴롭힙니까?
이단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악랄한지.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받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고, 어떤 천하장사도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마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어떤 장로(나**)는 새벽기도회에는 안 나오고, 설교 때는 고개 숙이고 있으면서, 당회에서나 제직회에서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목사를 종처럼 부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 교통사고로 하나님께 혼나고, 회개했습니다.
3. 그러나 날마다 기도하고 새벽마다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의 종을 사랑하고, 모든 좋은 것을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6절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아도 힘들게 사역하는 교역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날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잘 협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