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 그 첫 번째
2. 소모전의 가능성은? ― 두 번째 시나리오
3. 세 번째 시나리오: 러시아의 내부 붕괴 가능성은 낮다
4.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패권에 불리하다
들어가며
근세 이래 국제질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전을 통해 결정됐다. 두말할 필요 없이 1, 2차 세계대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인류가 핵무기를 보유하고부터는 외교전이나 경제 전과 같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식을 통해서도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같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인류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버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1)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 그 첫 번째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말은 이하 3가지 중의 하나이다.
첫째, 러시아가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
둘째,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과 지구전 내지 소모전으로 가는 경우.
셋째,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로 그렇잖아도 안 좋은 러시아 경제가 끝내 붕괴하고 푸틴 정권이 무너지는 경우.
이들 중 어떤 가능성이 높은지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처음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객관 전력상 우위에 있는 러시아군이 개전 며칠 만에 수도를 점령하고 전격적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측했다. 지금 이 예측은 빗나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군이 단기간에 승리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쟁 개시 보름이 지난 지금 러시아군의 작전 의도는 비교적 분명해졌다.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포위를 통해 우크라이나 정부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3면에서 큰 포위망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서쪽(폴란드, 루마니아) 방향의 연계도 차단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각 주요 거점의 우크라이나 군대를 각개 격파함으로써 그 무장 역량을 하나씩 제거해 가겠다는 계획이다. 만약 이 같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러시아는 정면 승부든 아니면 평화 협상을 통하든 단기전으로 끝내는 것이 가능하다.
러시아의 작전 성공 가능성은 어디에서 올까?
첫째, 전쟁 개시 전 기동훈련을 통해 우크라이나 북부, 동부, 남부 세 방면에서 대규모 병력과 장비 이동을 끝마쳐 러시아군이 ‘전략’ 상의 우위를 확립한 점이다.
병법에 적을 얕보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측 저항 의지를 얕잡아 보고,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내는데 급급해 수도 키예프에만 병력을 집결시켰더라면 지금쯤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군과 키예프 시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방에서 수도를 향해 지원군이 올 수도 있고, 나토 회원국들의 다방면에서의 물자 지원도 용이하다. 러시아군이 이것들을 모두 통제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비록 키예프 포위에 성공하더라도, 우크라이나 군과 시민들의 저항은 극대화된다. 좁은 지점에 양측 병력이 집결될 경우, 공격하는 측의 병력과 장비 상의 우세는 감소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보여주었듯이 이 같은 상황에서 대도시를 점령하기는 힘들다.
또 그때 가서 작전을 바꿔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진공으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동 과정에서 갖가지 예상치 못한 저항을 만날 수 있으며, 포위한 러시아군이 역포위를 당할 수도 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기에 초조해진 러시아군이 공격을 서두르다 보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가전으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군은 점차 인내심을 잃게 될 것이고, 무차별 포격으로 대도시를 초토화시킴으로써 두고두고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싸움은 이겨도 진 싸움이 된다.
이상의 사정을 감안하면, 전쟁 개시 전 기동훈련을 통해 각 요소에 병력을 전개한 것은 러시아군 참모부가 오랫동안 작전을 연구한 결과라 보인다. 이로써 러시아군은 승리의 절반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했다는 점이다.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장악은 승리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것이 있어야만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적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수 있으며, 아군 병력과 물자의 자유로운 기동도 보장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러시아군의 병력 배치의 우세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다. 전투 과정에서 소모되는 물자와 인력을 계속해서 보충할 수 있으며, 필요 시엔 작전 변경도 이룰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제공권이 있기에 가능하다. 지금까지 러시아군의 병력과 물자 이동이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제공권이 러시아 쪽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듯 공군의 활용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러시아 공군의 활약은 전문가들 예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군사전문가들 사이의 평가가 엇갈린다. 푸틴의 표현을 빌면 우크라이나군의 ‘군사 인프라’를 제거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즉 러시아 공군을 위협하는 S300 지대공 미사일, 레이다 기지, 군 지휘소, 비행장, 무기고, 통신시설 등을 먼저 무력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3월 9일 까지 러시아군은 2258개 우크라이나군 시설을 무력화 시켰다고 발표했다. 푸틴 자신도 “이 작업이 거의 완료됐다", "우크라이나 작전은 (러시아군) 총참모부가 설정한 계획과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는 현재까지 공군력보단 지상군 위주의 작전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는 나토 측에 공군 지원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계속해서 미국과 나토에게 자국 상공에 ‘비행 금지구역’을 설정해 줄 것을 요청 중이다.
러시아군이 이처럼 공군력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핵 시설’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는 모두 5 군데의 핵발전소가 있는데, 이들 중 하나라도 사고가 나면 큰 재앙이다.
▲자료: 동아일보
이 밖에도 어떤 분석가는 러시아 공군이 ‘정밀유도 미사일’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무기 없이 함부로 공중폭격을 감행할 경우 시설과 인명 피해가 늘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현재까지 러시아군은 공군을 이용한 공중폭격을 자제하는 편이다. 참고로 코소보 전쟁 기간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은 1999년 3월 24일부터 1999년 6월 10일까지 무려 78일간이나 이어졌다.
셋째, 러시아의 단기전 성공 가능성은 러시아가 미국과 나토의 직접 개입을 견제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 관건은 바로 나토 공군의 개입을 저지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핵 공갈’을 주로 사용했다. “핵무기는 원래 실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겁주기 위한 것”이란 말이 있는데, 푸틴은 이 말의 이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나토가 개입할 경우 곧 ‘3차 세계대전’을 의미한다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다. 이 덕택에 미국과 나토는 리비아에서처럼 ‘비행 금지구역’을 설정하는 일을 주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애초 열세인 우크라이나 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종의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있다.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통한 육지 보급로가 있긴 하지만, 산악이 적고 평지가 많은 우크라이나에선 엄폐물을 찾기가 힘들다. 또 이들 국가들이 러시아의 보복을 무시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서방 측 무기를 제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부 외신은 3월 초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 측에 자국이 보유한 미그기를 넘길 경우 미국은 F16을 자국에 제공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작 폴란드 정부는 3월 6일 트위터를 통해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보내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자국 공항 이용을 허용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많은 분야에서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우리가 서방의 언론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앞서 푸틴이 ‘인프라 공격’이 거의 완료됐다고 했듯이, 우크라이나 내 활주로는 이미 대부분 파괴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크라이나 공군기지를 국경 밖에 둘 수밖에 없고, 만약 이런 식으로 공군 지원이 실행된다면 러시아는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점점 현실화 되는 것이다.
흑해를 통한 남쪽으로부터의 원조물자를 조달 역시 만만치 않다. 수도 키예프까지의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원래 몇 개 되지 않은 우크라이나 측 항구도시들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3월 2일 오데사와 가까운 군사 요충지인 헤르손이 러시아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로써 최대 항구인 오데사도 러시아군의 직접적인 공격 사정권 안에 들게 되었다. 헤르손의 인접 도시 마우리폴은 동쪽 돈바스 지역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풍전등화 상태
에 놓여 있다. 오데사와 마우리폴 두 도시가 함락되면 우크라이나의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는 완전히 차단되게 되며, 키예프는 3면 포위 상태가 된다.
자료: 우크라니아 주요 항구도시 (CNN)
이렇듯 넓게 병력을 전개하면서 각지의 우크라이나 군을 각개 격파하고, 최종적으로 키예프 포위를 완성하려는 러시아군의 전략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전쟁은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사면이 포위되어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면, 아무리 시민들의 결사항전 의지가 높다고 한들 300만의 인구를 가진 수도 키예프는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식수, 전기 등을 어떻게 공급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때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도 900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라도가 호수’를 통한 외부와의 보급로를 마지막까지 지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처럼 러시아 군의 작전이 계속해서 순조롭게 전개된다면, 다른 한편 무력에 의한 전쟁 종식뿐만 아니라 ‘평화 협상’의 가능성도 높여준다. 양국은 지금 전투를 하는 중에도 협상을 병행하고 있는데, 지난 2월 28일 벨라루스에서 1차 회담을 개최한데 이어 지금까지 모두 3차례 회담을 가졌다. 아직 까진 구체적 성과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동부의 분리주의 영토를 언급한 점에 주목했다. 뉴스위크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막대한 군사 규모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똘똘 뭉친 우크라인들을 압도할 수 있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으로서는 협상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우크라이나 내 주민의 20%~40%가 러시아계이다. 이 때문에 전체 우크라이나인을 아프간처럼 모두 반러시아의 목표 하에 단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전쟁의 명분이 일정 부분은 러시아 측에도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나토의 동진에 맞선 ‘방어 전쟁’이며, 최종적으로 ‘점령’이 아닌 우크라이나 ‘중립화’를 목표를 한다고 본다. 현재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 나토 가입 포기를 위한 헌법 수정 ▲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 ▲ 분리주의 지역인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공화국의 독립 인정 3가지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경우 '특별 군사작전'을 중단하겠다는 협상 조건을 내걸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