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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실감 영상관2]
디지털 실감 영상관2로 들어가는 입구다.
VR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미리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먼저 해야 이용할 수 있다.
VR 콘덴츠는 총 4가지가 있다.
1. 보존과학실 VR : 보존과학실에서 직접 문화재를 수리해보세요. 말 탄 사람 토기(국보 91호)의 보존처리와 분석
체험 소요시간 15분
2. 박물관 수장고 VR : 박물관 수장고를 다니며 소장품을 확인합니다. 수장고 안은 어떤 모습일까?
체험 소요시간 20분
3. 감은사 사리장엄 VR : 감은사 사리장엄구의 세부 조각을 살펴보고 감은사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체험 소요시간 20분
4. 청자에 담긴 세상 VR : 청자 상감 동화 포도 동자 무늬 조롱박 모양 주전자 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표 청자를 살펴보며 무늬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체험 소요시간 20분
물론 무료로 이용한다.
현장 예약은 안내데스크에 문의하면 된다.
나는 두번째 박물관 수장고 VR체험을 신청했다.
아직 전시 준비중인 수장고의 유물들을 먼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물론 다양한 수장고의 유물들을 살펴보고 설명도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수장고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유물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미리 준비된 유물들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VR체험을 하는 누구나 똑같은 유물들만 볼 수 있다.
1. 2번은 수동적인 VR이고 3. 4번은 조금 능동적인 VR이라고 한다.
예약은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4번 방문해서 모두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너무 예쁜 정원의 모습이었다.
잠시 앉아서 쉬워갈 수 있는 좋은 휴식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예약해서 VR체험도 하고 중간에 좋은 휴식도 가져볼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공간적으로 1층부터 3층까지 관람할 때 딱 그 반인 2충 중간에 디지털 실감 영상관2가 자리하고 있다.
실은 기획전시실의 특별전시 <어느 수집가의 초대>의 관람을 예상했던 50분을 20분이나 초과하는 바람에...
오전11시 VR체험 예약에 늦어서 뛰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오전 11시 15분 많이 늦었지만 다행히 VR체험을 허락해 주셔서 무사히 체험을 마칠 수 있었다.
체험예약은 관람시간을 고려해 조금 여유롭게 잡아야 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는 디지털 실감 영상관2를 가장 먼저 체험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 박물관 관람을 시작하였으나
공간적으로 이동경로에 맞춰서 소개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소개를 중간에 넣었다.
[이홍근]
<분청사기 연꽃넝쿨무늬 병> 분청사기 상감연화당초문 병((粉靑沙器象嵌蓮唐草紋甁), 조선 15세기, 보물 제1067호
약간 벌어진 병 입구에서부터 좁은 목을 타고 내려와 펑퍼짐한 몸체를 지나
굽까지 내려오는 선이 넉넉하고 안정적인 분청사기 병이다.
병의 형태와 문양 구성이 잘 조화되어 짜임새 있으며, 정성스럽게 새겨 넣은 장식에서 단정함이 느껴진다.
문양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몸통 중앙 부분 세 곳에 연꽃이 배치되어 있고
각 연꽃은 줄기가 원을 그리듯 연결되어 있다.
또한 연꽃과 연잎 내부를 흑상감하여 강조하고 여백은 백상감으로 점을 찍어 채웠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왕실 의례용 술을 담았던 항아리
항아리에 그려진 용의 표현은 다소 둔중하나 여의주를 쫓는 모습이 흥미롭다.
하늘을 호령하는 용이 그려진 항아리
화염을 뿜는 여의주,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사이로 굽이치는 용의 모습이 역동적이다.
우윳빛의 유색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수(壽)', '복(福)', ' 강(康)', '녕(寧)'이라는 글자를 항아리 어깨에 배치하고
그 주위에 매화, 난초, 풀벌레 등을 그려 넣었다.
격식 있는 자리에 꽃을 꽂아 장식하다.
이 항아리처럼 철화 안료로 용을 표현한 왕실용 고급 용준은 매우 드물다.
높이가 50cm 넘는 크고 당당한 몸체에 역동적인 자세의 용은 도화서 화원이 격식에 따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왕실 행사 때 꽃을 꽂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증문화재]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이 청동투구는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가 기증한 것으로, 서구 유물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보물 제904호)이다.
이 투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코린트에서 제작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제전 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올림피아에서 발굴된 이 투구는 실제로 썼을 때
눈과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완전히 가려지는 형태로,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기념비에 새겨진 무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처럼 완벽한 원형을 유지한 예는 거의 없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 우승자에게 이 고대 투구를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다”는 올림픽 규정으로 인해 이 투구는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될 수 없었고,
이후 투구는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그 후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 정부는 옛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게 이 투구를 전달하였고,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손기정 선수의 뜻에 따라 이 청동투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금으로 만든 굵은고리 귀걸이> 삼국시대 金製太環耳飾, 금제 태환 이식, 굵은고리 금귀걸이 증8141
<금으로 만든 가는고리 귀걸이> 삼국시대 金製太環耳飾, 금제 태환 이식, 굵은고리 금귀걸이 증8142
<금으로 만든 가는고리 귀걸이> 삼국시대 金製太環耳飾, 금제 태환 이식, 가는고리 금귀걸이 증8143
[김종학]
사찰이나 불전의 문 또는 불상 등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
흔히 금강역사·이왕(二王)·이천왕(二天王)·집금강신(執金剛神)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왕이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신(약사신 등)을 불교에서 수용하여 인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지키고 막는 이미지가 아니라 어서옵셔의 분위기... 호객하는 인왕상?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나 혼자 뿐일까?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법고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좌이다.
이 사자상은 느티나무를 통으로 깎아 얼굴과 몸체를 만들었으며, 다리와 꼬리는 별도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몸체 곳곳에는 채색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
[유강열]
빗, *빗치개, 장식용 뒤꽂이, 비녀 등을 담아두는 함으로 주로 신분이 높은 부녀자들이 사용하였다.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4개의 서랍이 달려 있다.
전면에는 화조문 등을 나전 기법으로 장식하였고, 측면과 뒷면은 한지를 오려 붙여 문양을 꾸몄다.
*빗치개: 가르마를 타는 도구
[최영도]
한 쌍으로 기증된 오리모양토기다. 회청색으로 단단하게 잘 구워졌지만 전체적으로 유약이 흘러내렸다.
오리의 시선은 약간 아래쪽을 향하고 있으며 몸통은 유선형이다.
꼬리 부분은 구멍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몸통 가운데에도 위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은 나팔 모양이고 긴 네모 모양의 창이 4개 뚫려 있다. 주로 신라나 가야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형태이다.
원통 모양의 그릇받침으로 완전한 형태이다.
옅은 황회색이며 단단하게 만들어졌으나 구운 상태가 좋지 않고 기포가 많아 표면이 부풀어 오른 곳이 많다.
단지를 올리는 윗부분은 넓게 밖으로 벌어져 있으며 원통형 몸통 윗부분에는 공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아랫부분은 장고처럼 넓게 만들어졌고 긴 네모 모양의 창 세 줄을 엇갈리게 뚫었다.
몸통 윗부분에는 긴 네모 모양의 창과 둥근 구멍을 뚫었다. 전형적인 금관가야의 그릇받침이다.
[박병래]
<백자 청화 꽃무늬 조롱박 모양 병> 조선 18세기, 보물 제 1058호
위아래의 꾸밈새가 다른 조롱박 모양 병이다.
여덟 면으로 깎은 항아리 위에 목이 긴 병을 얹은 형태의 병은 조선 백자에서는 매우 드물다.
아래 항아리에는 청화 안료로 난초와 패랭이꽃을, 위쪽 병에는 칠보무늬를 그려 넣었다.
청초하고 단아한 정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네코 가즈시게(金子量重)]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는 불상 제작이 성행하여 불상이 다양한 조형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 불두(佛頭)는 건칠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통통하고 둥근 얼굴이 미얀마 북부의 특색을 나타낸다.
건칠기법은 나무나 흙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천을 씌운 뒤 칠을 반복적으로 도포하여 불상을 만드는 기법이다.
머리 위로는 1,000여개의 작은 나발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고, 정수리 부분에 과일 열매 모양의 원추형 나발이 붙어 있다.
현재는 얼굴 주위로 약간의 금박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 얼굴 전면이 황금빛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이 불두는 16세기 미얀마의 아봐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건칠 불상으로, 높이가 116cm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제 3층으로 올라가 조각,공예관과 세계문화관을 만나보기로 한다.
[조각,공예관]
<백자 청화 복숭아무늬 병>
세 개의 열매 가운데 꽃이 있고 주변에 꽃봉오리와 이파리로 이뤄진 복숭아를 그린 병이다.
복숭아 무늬는 도교의 신 가운데 서왕모의 장생을 약속하는 복숭아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데,
다른 부가적인 소재 없이 장수의 상징으로서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백자 청화 십장생무늬 팔각병>
중국 청나라의 자기 영향을 받은 형태에 면마다 다채로운 무늬로 빈틈없이 장식한 팔각병이다.
십장생의 장면을 배경으로 하강하는 이룡(螭龍)의 모습을 함께 꾸민 점이 특징이다.
이밖에 구름과 용, 산수, 보상화넝쿨 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해 왕실에서 사용한 병으로 여겨진다.
<백자 양각 십장생무늬 청채,동채 병>
십장생 무늬를 양각으로 장식해 청화 안료로 칠하고, 무늬의 주변은 동화 안료로 채색한 병이다.
십장생의 구성은 열 가지의 사물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기도 한데, 여기에는 해와 대나무가 장식된 점이 특징이다.
<백자 청화 장생무늬 주자>
항아리 형태에 주구와 손잡이가 부착된 주자이다.
한 쌍의 사슴과 소나무의 구성에 구름과 영지가 묘사되었다.
맞은편에는 구름 속의 해, 혹은 달을 중심으로 쌍학과 물결 위의 거북을 그려 회화적인 장면으로 장식했다.
몸체에 공간감을 살려 십장생 소재를 그림처럼 표현한 청화백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백자 청화 문자무늬 사발>
여러 가지 길상적 의미의 글자를 장식한 사발이다.
각각 ‘길상(吉祥)’‧‘여의(如意)’‧‘장낙(長樂)’‧‘만사(萬事)’‧‘약춘(若春)’‧‘부귀(富貴)’‧‘다남(多男)’‧‘다복(多福)’‧‘다수(多壽)’를 써넣었고,
이중 ‘다수’는 무병장수의 염원을 강조한 것이다.
<백자 청화 수복강녕무늬 대발>
사발 측면에 청화 안료를 사용해 ‘수(壽)’ ‧ ‘복(福)’ ‧ ‘강(康)’‧ ‘녕(寧)’의 글자를 도안화된 서체로 장식했다.
각각은 장수, 행복, 건강, 평안을 의미해 건강하고 평안하게 장수와 행복을 누리려는 의미를 담았다.
<백자 청화 장생무늬 접시>
십장생의 대상을 단독으로 살려 장식한 청화백자 접시로, 구름 사이의 학과 바위틈의 영지를 표현했다.
청화백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된 십장생 무늬의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백자 청화 장생무늬 접시>
십장생의 대상을 단독으로 살려 장식한 청화백자 접시로, 바위 ‧ 물 ‧ 산을 배경으로 거북과 구름을 표현했다.
청화백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된 십장생 무늬의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백자 청화 장생무늬 접시>
십장생의 대상을 단독으로 살려 장식한 청화백자 접시로, 도안화된 구름 사이에 대칭된 쌍학을 표현했다.
청화백자의 장식 소재로 애용된 십장생 무늬의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백자 청화 십장생무늬 병>
중국 청나라 자기의 영향을 받은 형태에 십장생 무늬를 청화 안료로 장식한 병이다.
십장생 가운데 거북 ‧ 사슴 ‧ 학 ‧ 소나무를 부각시키고, 주변으로 구름 ‧ 영지 ‧ 산 ‧ 바위 등을 배치했다.
열 가지 사물을 한꺼번에 표현하기보다 일부를 강조해 장식한 점이 특징이다.
<백자 청화 십장생무늬 사발>
십장생 중 거북, 사슴, 학을 한 쌍씩 배치하고, 주변으로 구름, 소나무, 영지를 장식한 사발이다.
십장생은 궁중장식화와 민화의 소재로 쓰였는데, 백자에는 일부 대상을 강조해 도안화된 무늬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백자 청화 십장생무늬 접시>
편평한 접시 내면에 사슴과 학, 대나무와 소나무, 구름과 바위가 어우러진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십장생의 주요한 대상을 부각시켜 무늬의 의미와 구성을 잘 살린 작품이다.
<백자 동채 삼층 합>
3단을 이루는 백자 합으로, 가운데는 술과 같은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병,
아래 위는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완과 뚜껑을 갖춘 구조다. 중국 단색유(單色釉) 자기의 영향을 받아 동화 안료로 채색했다.
<백자 동채 생황모양 연적>
관악기인 생황의 형태를 본떠 만든 백자 연적으로, 몸체 전면에 동화 안료를 사용해 채색 기법으로 장식했다.
생황은 길이가 다른 대나무 관을 통에 끼워 둥글게 이어 만든 악기로,
궁중의 의례와 연회용 아악(雅樂)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풍류문화와 서민들의 음악에도 쓰였다.
<백자 청화 물고기 파도무늬 병>
물고기 · 게 · 새우, 오리 등이 어우러진 물속의 모습을 표현한 청화백자 병으로, 다산과 풍요의 의미를 담고 있다.
19세기에 들어 유행한 청화백자 장식 소재로, 당시 민화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병의 형태는 중국 자기의 영향으로 19세기에 정착한 기형이다.
<백자 청화 연꽃 물고기 새무늬 접시>
연꽃을 중심에 두고 물고기와 새우 등으로 이루어진 어해무늬를 배치한 청화백자 접시로,
이는 해마다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연년유여(連年有餘)’를 상징한다.
여기에 연밥의 연씨를 쪼아 먹는 까치를 추가해 과거시험의 연이은 합격을 바라는 ‘희득연과(喜得連科)’의 의미를 더했다.
한국의 정서와 멋, 보름달 같은 '백자 항아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제작한 높이 40cm의 백자 항아리다.
몸체의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1의 비율을 이루는 둥그스름한 형태에 유백색을 띤 항아리의 모습이
보름달을 연상시켜 ‘달항아리’라고 불린다.
반원형의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 제작해 중심에 접합 흔적이 남고 전체적으로 이지러진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으로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자 달항아리는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후기 백자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 무렵에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 특히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높이가 40cm에 이르는 큰 항아리이기 때문에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위아래로 잇대어 붙여 만들었다.
이에 따라 항아리 중앙쯤에 붙여 만든 흔적이 확인되며 좌우 대칭이 완벽하지 않고 살짝 이지러져 있다.
커다란 백자 항아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문을 열었던 미술사학자 고유섭,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서양화가 김환기,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우리 문화재와 관련하여 주옥같은 글들을 발표했던 최순우 등
당대 저명한 문화인들의 애호를 듬뿍 받았던 이 항아리는
맑은 흰 빛과 너그러운 둥근 선으로 형상화되어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잘생긴 항아리로 손꼽힌다.
최근 서울 종묘, 병기 제조 등을 관장했던 군기시 터 등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어
왕실 및 중앙관청에서 저장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 항아리는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미의식과 정서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풍만한 양감과 유려한 곡선이 만들어 낸 조형미가 조선 전기에 제작된 백자 병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병의 잘록한 목을 휘감고 내려오는 끈 한 가닥의 거침없는 모습이 풍류와 멋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이 지은 시 가운데
“술병에 푸른 실을 묶어 술 사러 보낸 동자는 왜 이리 늦는가”라는 구절을 구현한 것과 같은 이 병은
굽 안바닥에서 ‘니ᄂᆞ히’ , 혹은 '니가히'로 읽을 수 있는 한글이 확인되어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무늬가 없는 순백자나 푸른색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가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철화 안료를 사용해 간결하면서 단순한 끈 무늬를 장식한 백자 병은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거침없이 그어 내린 힘찬 선은 장인의 숙련된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절제되면서도 과감한 표현과 구성은
현대적인 미감과도 맞닿아 있다.
<백자 청화 학 공작 괴석무늬 항아리>
둥근 몸체에 굵은 음각 선을 4곳에 넣어 굴곡을 살리고,
능화 형태의 창 안에 괴석과 모란, 한 쌍의 학이나 공작, 구름을 함께 장식한 청화백자 항아리다.
주변은 마름모 형태로 ‘壽(수)’ ‘福(복)’· ‘康(강)’· ‘寜(녕)’의 문자 무늬로 꾸몄다.
길상적인 의미의 여러 도안을 화려하게 장식해 왕실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자 청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
좌측에서 두번째
용과 구름무늬를 장식한 청화백자 용준으로, 용의 모습은 다소 둔중하나 여의주를 쫓아가는 장면을 숙련된 필치로 그렸다.
몸체의 어깨와 아랫부분은 여의두무늬로 마무리했다. 왕실 행사 때 술을 담는 주준(酒樽)의 용도로 사용했다.
좌측에서 세번째
17세기 후반 이후 청화 안료의 수입이 가능하게 되면서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례용 청화백자 용준을 다시 제작했다.
높이 50cm가 넘는 크고 당당한 몸체에 다소 비대하지만 역동적인 자세의 용을 장식했다.
이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간행한『산릉도감의궤』의 청룡과 유사해 일정한 격식으로
도화서 화원이 용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행사 때 꽃을 꽂는 데 사용한 화준으로 여겨진다.
좌측에서 네번째
여의주를 쫓는 용의 모습을 세밀한 필선으로 장식한 청화백자 용준이다.
다른 용준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17세기에 들어 대개 철화 안료로 제작한 용준과 달리 청화백자로 만든 희소한 사례다.
왕실의 의례 때 술을 담는 주준의 용도로 추정된다.
<백자 철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 좌측에서 다섯번째
조선 전기의 항아리 형태에 철화 안료를 사용해 용의 당당한 기세와 촘촘한 비늘로 이뤄진 몸통을 능숙하게 그렸다.
구름무늬는 형식화된 ‘卍만’자 형태이고, 어깨는 장식화된 꽃잎 무늬를, 아래쪽은 파도 무늬로 꾸몄다.
왕실의 의례 가운데 흉례(凶禮) 때 술을 담는 주준(酒樽)으로 추정된다.
<백자 철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 좌측에서 여섯번째
17세기 들어 청화 안료의 부족으로 왕실 의례용 청화백자 용준(龍樽)을 대신해
철화 안료인 석간주(石間朱)로 제작한 용준이다.
기형은 어깨가 벌어지면서 아랫부분이 좁아드는 형태로 이전 시기 매병 형태의 항아리가 변화한 모습이며,
용과 구름의 표현은 둔탁한 편이다.
연꽃 봉오리 모양의 꼭지를 갖춘 뚜껑에 매화가지와 대나무 무늬를 장식한 점이 이채롭다.
왕실 의례 때 술을 담는 주준(酒樽)으로 여겨진다.
조선 15-16세기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항아리이다.
매화나무 위 한쌍의 새와 들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마치 한 폭의 화조화처럼 운치있게 그려냈다.
처음에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이 컸지만, 차츰 이 항아리와 같이 조선의 정서와 미감이 담긴 청화백자로 발전했다.
<물고기무늬 장군>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무늬 장군'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하얀 백토인 ‘분(粉)’을 발라 장식한 도자기라는 뜻이다.
도자기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나 무늬는 각 시대가 추구했던 미감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잘 드러나 있다.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한 분청사기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미안이 구현되어 있는데,
특히 어두운 바탕흙과 분장한 백토의 절묘한 대비와 친근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한 무늬가 돋보인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다른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만의 자연스러움이 넘치는 공예미가 아주 매력적이다.
가로로 길쭉한 원통형 몸체 위에 주둥이를 단 장군은
흐르기 쉬운 액체를 담아 저장하거나 이동할 때 편리하도록 만든 그릇이다.
이 장군을 장식한 조화 기법은 백토를 바른 그릇 표면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한쪽 면에는 수초를 물고 여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묘사하고
반대쪽 면에는 모란 잎 무늬를 생동감 넘치는 모양으로 장식했다.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아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중국에서는 물고기 글자 발음이 ‘넉넉함’을 뜻하는 글자의 발음과 같아서 좋은 의미를 담아 공예품 무늬로 애용했다.
철화 안료로 무늬를 나타낸 분청사기는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 계룡산 일대의 가마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계룡산 분청’이라고도 부른다. 이 항아리는 짙은 갈색을 띠는 철화 안료로 넝쿨무늬를 나타냈다.
끊어질 듯 유연하게 이어지는 힘찬 붓놀림은 매우 예술적이다.
<분청사기 박지 철채 모란무늬 자라병>
모습이 자라를 닮아 있어 자라병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끈을 매어 휴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로 옹기로 만들었던 생활 용기이므로 분청사기나 백자로 된 것은 많지 않다.
이 자라병은 몸체의 바탕 위에 백토를 씌워 본바탕을 희게 분장한 후,
모란 무늬를 그리고 무늬 외에 바탕을 칼로 긁어내어 그 무늬가 도드라지도록 표현하였다.
긁어낸 바탕은 철분이 많은 안료顔料를 붓으로 덧발라 구웠기 때문에
바탕색이 검은빛을 내어 모란꽃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시각적 효과까지 높였다.
대담하고 활발한 모란의 구성과 여백을 메꾼 흑갈색의 철채 장식 등이 어우러져
다른 분청사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같은 시대 백자에도 이런 자라병이 간혹 보이지만,
이 병처럼 높이가 낮고 원형의 두 면을 위아래로 맞붙여 완성한 형태는 흔하지 않다.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제작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당당한 부피감과 풍만함이 돋보이는 대형 항아리다.
어깨에는 여의주무늬, 중간에는 용무늬, 아래에는 연꽃잎무늬를 상감하고 인화무늬를 적절히 사용했다.
무늬, 구도, 제작 기법 등에 중국 원나라와 명나라 청화백자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자유분방하고 대담성을 지닌 조선 도자기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S자로 날렵하게 빠진 병의 중앙에 물고기를 새긴 매병이다.
물고기 말고도 도자기 전체에 촘촘하게 무늬를 넣었다. 그래서 도자기 바탕색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도자기의 거친 바탕과 색을 감추고자 많은 무늬를 활용한 점이 바로 분청사기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매병의 모양은 고려 말의 상감 청자에 가깝지만
무늬 표현에서는 분청사기의 중요한 특징인 흰 흙으로 꾸미는 비중이 점점 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란 버들 갈대무늬 매병> 고려시대에 만든 백자 '모란 버들 갈대무늬 매병'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공예를 대표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다.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벽돌가마[塼築窯]에서 백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후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인 부안이나 강진 등의 가마터에서도 백자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의 각종 백자는 청자의 형태나 문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상감청자가 유행했던 시기에는 상감청자의 영향을 받은 백자도 제작되었다. 이 백자매병이 대표적인 예이다.
몸체를 참외모양으로 여섯 등분하여 골을 만들고, 각 면마다 마름모모양으로 상감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청자 태토로 면상감(面象嵌) 하였다. 여기에 모란, 갈대, 버드나무 등을 흑백상감해서 넣었다.
청자 태토로 상감하여 고려청자와 백자를 하나의 그릇에 응용한 것이다.
백자에 청자 태토를 상감해 넣고 다시 그 안에 상감하여 무늬를 나타낸 것은
백자와 청자를 능숙하게 만들었던 중국에서도 잘 볼 수 없다.
굽는 과정에서 병의 아래쪽이 약간 주저앉아 찌그러졌지만,
광택이 좋을뿐더러 고려백자와 청자가 혼합된 고려 장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철화 청자의 특징인 대담한 무늬와 구도가 돋보이는 버드나무무늬의 통 모양 병이다.
산화철 성분의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청자 유약을 입힌 뒤 구워서 흑갈색의 무늬를 표현하는 것이 청자의 철화 기법이다.
이러한 철화 기법으로 처리한 무늬는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이 병은 다른 철화 청자에 비해 무늬가 간결하지만 버드나무무늬를 재구성하여
다른 차원의 세련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붉은 무늬가 돋보이는 '모란무늬 매병'
모란꽃이 화사하게 표현된 매병이다. 모란은 여느 꽃보다 빛깔이 곱고 듬직하여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이 매병의 몸체에는 모란 가지 세 개를 흑백 상감으로 묘사한 뒤 꽃잎에 동화 기법으로 붉은색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다.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뒤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나타나는 동화 기법을 이용하여
고려청자의 무늬를 나타낸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처럼 매병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예는 더욱 찾기 어렵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이 매병에는 마침 꿈 속 정원을 거닐 듯,
대나무와 매화가 어우러진 신비로운 공간이 잔잔히 펼쳐지고 그 사이에 학들이 날거나 쉬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 있다.
이처럼 넓고 시원한 무늬 배치과 정밀한 새김 수법을 가진 상감 청자는 전북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모란무늬 매병> 청자 음각 모란문 매병, 고려 12-13세기, 1916년 입수, 보물 제342호
모란꽃이 화사하게 표현된 매병이다. 모란은 여느 꽃보다 빛깔이 곱고 듬직하여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이 매병의 몸체에는 모란 가지 세 개를 흑백 상감으로 묘사한 뒤 꽃잎에 동화 기법으로 붉은색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다.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뒤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나타나는 동화 기법을 이용하여
고려청자의 무늬를 나타낸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처럼 매병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예는 더욱 찾기 어렵다.
<구름 학무늬 매병>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고려 12-13세기, 1910년 구입, 보물 제1869호
고려 장인은 도자기에 하나의 완성된 세상을 조화롭게 담아냈다.
한껏 부푼 어깨와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 떨어지는 이 매병의 곡선미는 감탄할 지경이다.
또한 매병의 몸체에는 맑은 청잣빛 하늘을 배경으로 학이 날고 있다.
고고함과 장수의 상징인 학은 고려 상감 청자를 상징하는 무늬이다.
특히 상감 청자에 표현된 학은 한 마리가 올라가면 또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상감 청자는 제한된 공간에 학을 여러 마리 표현하더라도 어지럽지 않고 조화롭고 여유 있어 보인다.
청자 가운데 같은 시대에 사용된 동기를 그대로 청자로 옮겨 만든 것이 많다.
이 청자 항아리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며, 양쪽에 달린 동물모양 손잡이는 동기의 의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몸체 양면에 모란꽃을 상감하였는데 백상감된 모란꽃의 꽃술과 꽃잎 둘레를 매우 가는 흑선으로 처리하였고
음각선으로 세밀하게 꽃맥을 표현하였다.
정병은 맑은 물을 담아두는 병으로, 본래 승려가 지녀야 할 열 여덟 가지 물건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불전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의식을 할 때 쇄수게(灑水偈)를 행하면서 의식을 인도하는 승려가 솔가지로 감로수를 뿌림으로써
모든 마귀와 번뇌를 물리치도록 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정병은 대체로 몸체가 계란형이며, 매끈하게 빠진 긴 목 위로 뚜껑 형태의 둥근 테가 놓인다.
그 위로 다시 대롱형의 물을 넣고 빼는 첨대(尖臺)가 솟아 있으며,
몸체 한쪽에는 중간을 잘록하게 좁힌 비녀처럼 생긴 귀때[注口]가 튀어나와 있다.
정병은 물가의 풍경을 담아냈는데,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물 위로 노를 저어가는 어부와 낚시꾼 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 모든 풍광이 표면에 홈을 파서 은선을 두드려 박는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병의 긴 목에는 구름무늬, 동체의 어깨와 굽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文], 귀때에는 풀무늬[草文]가 입사되었다.
은을 돌린 굽은 지금은 파랗게 녹슨 몸체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청동제의 병에 은상감을 한 예는 적지 않으며, 이러한 기법이 고려청자에도 통용되어 주목된다.
담녹색을 머금은 비취색의 청자 색깔이 돋보이는 석류 모양 주자다.
세 개의 석류 위에 또 하나의 석류를 올려서 안정된 삼각형 구도의 몸체를 만들었다.
특히 흰 흙으로 점을 찍어 마치 석류가 잘 익어 터진 것처럼 입체감을 살린 점이 이 주자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와 같이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예술적으로 표현된 상형 청자는
정교하고 세심한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려의 상형 청자가 지닌 고유한 형태와 빛깔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청자 어룡형 주전자 (靑磁 魚龍形 注子)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다.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중앙부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다.
손잡이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청자 투각칠보문뚜껑향로는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명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향로는 향이 빠져나가는 뚜껑과 향을 태우는 몸통,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받침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다른 모양을 기능적으로 결합하여 완성된 조형물로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음각, 양각, 투각, 퇴화(堆花), 상감, 첩화(貼花)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롭게 이용되어 조화와 균형을 두루 갖추었다.
각 부분에 서로 다른 장식기법을 사용하여 세부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뚜껑 위에는 다복(多福)·다수(多壽)·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전보(錢寶)를 투각 장식하여 둥그렇게 올렸고,
이를 통해 연기가 피어오르도록 하였다.
연꽃 받침 위에 앉은 거북이 모습의 주자다.
거북이의 머리와 목은 고려 시대 비석의 귀부에서 볼 수 있는 용머리처럼 생겼고,
등에 새겨진 거북이등갑무늬 안에는 각각 ‘王’(왕)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주자는 전라남도 강진의 사당리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비색과 세련된 조형이 잘 어우러진 사자 모양 향로는 향을 피우는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자의 몸통 안쪽이 비어 있어서 향을 피우면 사자 입으로 연기가 흘러나온다.
특히 이 향로는 1123년 송나라 사신 일행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언급된
사자 향로와 연관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향로는 서긍이 보았던 그 향로와 다소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12세기 청자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된 베개다.
송나라 때 흔히 보이는 형태의 베개이지만,
베개의 모양과 색, 정교한 장식에서 고려청자 특유의 세련미와 우아함이 돋보인다.
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돋을새김·뚫어새김·새김의 여러 기법을 골고루 써서 연꽃무늬와 모란무늬를 화사하게 꾸몄다.
고려 시대에는 그릇을 비롯한 식기류뿐만 아니라 베개와 의자 같은 일상생활 용품, 건축물을 장식하는 기와 등
다양한 청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청자의 비색 빛이 오묘하고도 신비한 죽순 모양의 주자다.
이 주자는 죽순 모양의 몸체에 댓가지를 본뜬 손잡이와 귀때를 붙였으며 뚜껑도 솟아나는 죽순의 형태로 되어 있다.
죽순의 윤곽선은 반돋을새김으로, 잎맥은 가는 선으로 정성껏 새겼다.
특히 주자의 모양은 어떤 일이 한꺼번에 우르르 일어남을 이르는 ‘우후죽순’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죽순은 비 온 뒤에 50센티미터 이상 자랄 만큼 성장이 왕성하다고 하다.
그래서 죽순은 자손의 번성이나 기원·축하를 의미한다.
0.5MM 굴기의 은실로 버드나무와 갈대, 오리 등 물가풍경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정병이다.
몸체의 앞, 뒤에는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갈대가 솟은 섬과 오리, 기리거, 배를 타거나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은입사로 표현되었는데, 푸른 녹과 어우러져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향을 사르는 향로 중 높은 굽과 넓은 전이 달린 향로를 향완이라 한다.
이 향완이 제작된 진주 청곡사는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의 원찰로,
1397년에 돌아가신 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만들어졌다.
청동 바탕 위에 무늬대로 홈을 판 후 은실을 끼워 장식하는 입사 기법으로
뇌문, 연꽃넝쿨, 연판, 여의두, 구름, 범자 문양이 유려하게 장식되었다.
통일신라 동종을 계승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종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보주를 물고 있는 용과 제작 연대를 새긴 위패 모양의 틀은 고려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다.
위패 모양의 틀에는 요나라 통화(統和) 28년(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있다.
‘성거산천흥사종명통화이십팔년경술이월일(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 기록되어 있어
1010년(현종 1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음구>
범음은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하며,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범음구라 한다.
범음구에는 종을 비롯해 큰 북인 법고,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 구름 모양의 운판이 있는데 이를 불교사물이라 한다.
이외에 불교의식이나 공양 때 치는 쇠북이 있다.
<동종> 고려 13세기, 1911년 구입
이성계(1335-1408)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부인 강씨, 승려 월암 등과 함께 발원해 금강산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장엄구다.
백자 발(鉢) 4점과 백자 향료, 청동 발(鉢), 은제 도금 사리기(舍利器) 2점과 유리제 사리기, 은제 귀이개로 구성되었다.
백자에 새겨진 명문으로 제작 시기와 생산지(방산, 方山), 제작자(사기장 심룡, 沈竜)를 알 수 있다.
1996년 감은사 동 삼층석탑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것으로 수정사리병-내함-외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리함은 사천왕이 배치된 최초의 사리구이며 탑을 든 북방 다문천왕을 중심으로 방위를 결정한다.
내함의 기단 위에는 화염보주 주위로 사천왕 및 승려상이 있고, 기단에는 사자왕이 배치되어 있다.
높이 74.5cm의 금동 소탑으로 불전 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탑은 사각형의 기단과 11층의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한쪽에 계단을 놓아 탑으로 연결하고 있다.
초층탑신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부착하였다.
받침은 연잎, 몸체는 연꽃, 손잡이는 연꽃가지 모양으로 만든 향로다.
연꽃가지 모양 향로는 요나라에서 가장 먼저 제작해서 사용했으며, 고려에서는 11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로 받침에 음각으로 ‘大康三年’(태강삼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077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화장품 그릇, 거울걸이 등 다양한 공예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감산사 미륵보살 아미타불> 남북국시대(통일신라), 화강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만든 '감산사 미륵보살 아미타불'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미륵보살>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짓고,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 있다.
연대가 확실하여 통일신라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작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가 크고 편평하다. 넓적한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나 있다.
오른손은 들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밑으로 늘어뜨렸다.
법의(法衣)는 얇아서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 있다. 옷주름은 가슴에 U자 모양의 주름이 물결치듯 밑으로 흘러내려 있으며,
두 다리에 다시 평행 U자 모양 주름이 흘러내려 있다.
광배는 거신광에 두광과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금동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이 함축된 '반가사유상'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의 반가사유상이다.
이러한 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덧없음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상을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 하였다.
반가사유상은 이 상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도 만들어졌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있는 미소, 살아 숨쉬는 듯한 얼굴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된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일본 고류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모습이 비슷하여 영향 관계가 주목되는 상이기도 하다.
<수종사 부처와 보살> 조선시대, 금동
조선 왕실에서 만든 소박하고 인간적인 소형 불상 '수종사 부처와 보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수종사(水鐘寺)의 금당 옆에는 아담한 팔각오층석탑이 서 있다.
1957년 이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안에서 무려 30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전시된 불상과 보살상은 1628년(인조 6년) 인목대비가 소원을 빌며 석탑 안에 넣은 것이다.
불상 한 구 한 구 조금씩 다른 손 모양과 장식(裝飾)을 하고 있어 여러 구를 모아서 보면 율동감이 느껴진다.
대형 불상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귀여움이 얼굴에 가득하다.
불상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크고 동그란 반면 하체는 좁고 납작하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얼굴은 앞으로 튀어나와, 고려시대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각 내부에서 행하는 의례가 많아지면서 불단(佛壇)이 뒤로 물러나고 높이도 높아졌는데,
고려시대와 달라진 조선 불상의 모습은 높이 봉안한 불상을 가까운 거리에서 예배해야 했던
건축상의 변화에 따라 조정된 것으로 해석된다.
조각공예관 관람을 마치고 세계문화관 관람을 하기전 잠깐 쉬어가기로...
앉아 쉬면서 화면으로 유물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볼 수 있어서... 미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세계문화관]
영국의 유명한 도자기 디자인 중 "윌로(Willow, 버드나무) 패턴"에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관료의 딸과 그의 부하가 서로 사랑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을 세력가 대공에게 시집 보내려 했고,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작은 섬으로 도망가 조용히 산다.
그러나 결국 대공에게 들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두 사람을 가엽게 여긴 신이 새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버드나무 위 한 쌍의 새는 이 두 사람을 의미한다.
이 접시의 그림은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기계식 장식법인 전사기법이 사용되었다.
아무리 복잡한 디자인이라도 단시간에 많은 양의 자기를 똑같이 꾸밀 수 있었다.
유럽 최초의 자기, 마이센 자기의 탄생
연도별 마이센(Meissen) 자기의 마크 변화도 인상적이었다.
중국 자기는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인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크락(Kraak Craak) 자기
크락은 중국 청화백자를 싣고 온 포르투갈의 배 카라카(Caracca)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장항대운하를 따라 칭위안(지금의 닝보)에 중국 가지의 물산이 모여들고... 이렇게 포장되어 유럽으로 건너갔다.
행운을 빈다는 대길(大吉)이라는 한자가 흥미롭다. 깨지기 쉬우니까 운이 좋아야 한다는 뜻인가?
제일 오른쪽에 있는 <백자 병>은 중국 북송시대의 작품이다.
이 백자는 아백색(牙白色)이라고 불리는 상아색의 부드럽고 섬세한 최고의 장식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흰색 끈으로 엮은 도마루 갑옷>
도마루는 갑옷 몸통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오른쪽 옆구리에서 묶는 방식으로 입기에 편하다.
또 허리와 넓적다리를 가리는 구사즈리(草摺)가 다섯 개 이상으로 나뉘어 있어 다리를 움직이기 쉽다.
가죽이나 쇠로 된 작은 직사각형 조각을 ‘고자네(小札)’라고 하는데,
몸통과 허리, 어깨를 덮는 부분은 이 고자네를 얽어매어 만들었다.
비늘 모양으로 가죽이나 쇳조각을 얽어매는 것을 ‘오도시(威)’라고 하는데, 이 도마루에는 흰 실로 오도시를 했다.
<여러 색 끈으로 엮은 도세구소쿠 갑옷>
18세기에 일본 무사들이 입었던 갑옷이다. 일본 무사들의 갑옷은 조그만 가죽을 색실로 이어 만들어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입기 불편하고 무거워 전투에서 좀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16세기에 갑옷을 새로 만들었다.
이 갑옷은 몸통 부분을 판 하나로 만들고, 재료도 철로 바꾸어 적의 공격을 더 잘 막아낼 수 있게 했다.
어깨와 허리 부분을 덮는 보호구는 빨간색, 흰색, 남색 실로 엮었고, 몸통 가운데 부분과 금색 투구는 용무늬로 꾸몄다.
얼굴을 보호하는 가면은 마치 무사의 얼굴 같다.
<보라색 끈으로 엮은 니마이도 갑옷>
몸통을 앞뒤로 나누고 한쪽을 경첩으로 고정하여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갑옷이다.
몸통 부분이 두 장으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니마이도(二枚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갑옷은 연한 보라색 실로 고자네(小札)와 구사즈리(草摺), 몸통 부분을 엮었다.
그냥 영화 명량이 생각날 뿐이고...
영화 러브레터가 연상되는 공간구성을 해 놓았다. "오뎅끼 데스까~~"
노 가면 가와즈, 노 가면 아야카시
노 가면 하나코부 아쿠조
노 가면 고히메, 노 가면 조온나, 노 가면 우바
노 가면 한냐, 노 가면 하시히메
노 가면 와카오토코
노 가면 시카미, 노 가면 코베시미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겐지모노가타리 화첩'
11세기 초 헤이안(平安) 시대의 여성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그림으로 나타낸 화첩이다.
이 소설은 히카루 겐지(光源氏)라는 출중한 외모에 재능은 물론 높은 신분까지 두루 갖춘 귀족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헤이안 시대 귀족 생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일본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
화첩을 그린 것으로 전하는 도사 미츠오키는 일본 특유의 채색 회화인 야마토에(大和繪)의 전통을 계승한
도사파(土佐派)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에도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헤이안 시대 귀족의 이미지를 알 수 있으며,
일본 고유의 문자인 히라가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19세기 일본에서 마키에 기법으로 만든 가마다.
마키에 기법은 검은 옻칠 위에 금이나 은가루를 뿌리고 무늬를 그려 넣은 일본 고유의 칠공예를 말한다.
가마는 신분이 높은 무사 계급 가문의 여성이 혼례를 올릴 때 타고 갔다.
신부를 축복하기 위해 장수 같은 좋은 의미를 담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 가마는 벗풀과 덩굴무늬로 꾸몄다.
벗풀 무늬는 지금의 일본 히로시마 지역을 다스렸던 무사 모리(毛利) 가문의 상징이었으므로
이 가문의 여성이 이용했던 가마로 보인다.
가마 안쪽에는 금색 바탕 위에 꽃과 새를 그리고 화려한 색깔을 입혔다.
천장도 조그만 사각형으로 칸을 나눠 다양한 꽃 그림으로 장식했다.
<광원비약>
고대의 인물이 사냥을 떠나는 기마상이다.
둥근 능선이 겹친 산의 모습을 한 받침대 위로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가는 말은
두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기세 좋게 장애물을 뛰어 넘고 있다.
말 위의 남자는 상반신을 말 머리에 닿을 만큼 깊이 숙이고 고삐를 세게 쥐어 엄청난 말의 속도를 견디며 앞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장신구와 마구는 화려하게 채색했다.
작가인 나이토 신은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일본 목조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평안노모>
일본 근대 조각가 히라쿠시 덴추가 만든 목조 조각상이다.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에 지금도 있는 서예용품 가게의 주인이 어머니의 13주기를 기리며 주문한 작품이다.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미술관이 이 작품을 구입하겠다고 하자
조각가는 똑같은 조각상을 하나 더 만들어 이왕가미술관에 보냈다.
1969년에 이왕가미술관에 있던 작품이 국립박물관에 이전되어 이 조각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매우 사실적인 얼굴 표정과 섬세하게 표현된 옷 주름이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서예용품 가게 주인은 고요한 표정의 노모 조각상을 보고 어머니가 실제로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기예천>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 다카무라 고운이 만년에 제작한 불교조각 <기예천>이다.
기예천은 모든 기예技藝를 관장하고 복을 가져오는 불교의 천부天部 중 하나로,
이와 관련된 밀교 수법修法에서 화려한 장식을 몸에 걸치고 오른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왼손에는 천화天華를 들고 등장한다.
고운의 기예천은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쥐는 대신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왼손에는 꽃이 가득 담긴 그릇을 받쳐 들어 천화의 존재를 강조하였다.
작은 크기이지만 형태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노련한 기술로 완성한 세부 표현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상이다.
<훈염>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가는 몸체를 세워 턱을 위로 향하고 두 눈은 살짝 감았다.
하늘을 향한 얼굴 위로 나부끼는 날개옷 표현이 경쾌하다. 양손은 향로를 받쳐 들었다.
‘훈염’이란 본래 ‘향기가 스며들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변하여 ‘좋은 감화를 받다’라는 뜻이 되었다.
만든 이인 고토 세이치는 쇼와 시대(昭和時代, 1926~1989) 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1852~1934)에게 목조를 배웠다.
‘훈염’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인 <마야부인과 천인상>의 천인상(天人像)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혼례도구
노 가면 한냐를 모형을 만들어 놓아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래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야 할 듯한 분위기의 중국집...
중국식 전통 정원에서 보던 원형문인 Moon Gate가 중국스러운 분위기를 잡고...
당대에 차 마시는 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자기 문화도 함께 발전하였다.
남족지방의 월요 청자, 북쪽지방의 형요 백자를 중심으로 '남청북백'이라는 지역적 특징이 형성되어
자기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였다.
<꽃 과일무늬 주전자> 중국 송나라
매혹적인 청화백자 '꽃 과일무늬 주전자'
이 주전자는 반구(盤口)형의 입을 가졌고 몸통은 원형에 가깝다.
어깨와 입둘레와 사이에 두 개의 귀가 달려 있으며 주둥이[注口]는 몸통에 비해 긴 편이며
뀌때 밑에 줄을 묶어 놓은 듯한 무늬[結繩文]를 세 개의 원형으로 그려 넣어 꽃을 겹쳐 놓은 것처럼 표현했다.
손잡이는 짧은 편이고 몸통은 오이 모양의 형태에 여섯 줄의 선이 둘러져 있다.
바닥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옥벽저형(玉璧底形)이다.
유약은 회백색으로 고르게 발랐으나 표면의 상태는 좋지 않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인 조상비가 등장하였다.
조상비의 기본 형태는 네모난 돌에 불상과 명문을 새긴 것으로
특정 인물의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중국의 전통적인 비(碑)에 종교적 숭배대상인 불상이 더해진 형식이다.
중국의 비가 상류층 또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면
조상비 제작에는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발원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상비는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으며,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전시된 네 점의 중국 불비상은 북위와 당나라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과 함께 삼존 혹은 오존이 묘사되어 있고,
일부에는 공양자상과 조상기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조상비는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에 발원자의 염원을 담아
이들의 신앙과 바람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했던것이다.
한대에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는 풍속이 유행하여 무덤 에도 다양한 껴묻거리를 매장하였다.
그 가운데는 주택, 부엌, 축사, 방앗간, 화장실 등 망자를 위한 건축 모형도 있는데
이는 죽은 이가 사후세계에서도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누각 모형은 신선사상과 관련하여 망자의 사후 영생을 기원하는 관념적 건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말, 낙타, 무덤을 지키는 괴수(당, 1923년 구입), 무덤을 지키는 괴수 한쌍(남북조, 2005년 구입), 소(당, 1920년 구입)
<문관과 무사> 남북조(420-589), 1918년 구입
<말 탄 여인> 당나라(618-907), 1920년 구입
<호인> 당나라
<매를 든 인물> 당나라(618-907), 2013년 구입
손에 매를 들고 사냥하는 인물 모습의 도용이다.
<남성과 여성> 서한
왼쪽부터 가네샤(크메르 10세기 후반), 비슈누(크메르, 12세기), 락슈미(크메르, 12세기), 우마(크메르, 13세기)
<보관을 쓴 부처> 팔라시대, 10-11세기
보관을 쓴 모습의 부처는 6세기경부터 등장하여 10세기 이후 보편적인 도상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비롯하여 목걸이, 귀걸이와 같은 여러 장신구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금욕주의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높은 가치, 보편성을 상징한다. 균형감과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처의 생애를 새긴 비상> 10세기
인도 동북부에 위치한 비하르주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의 불좌상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석가모니 생애의 중요한 7가지 사건
(탄생, 녹야원에서의 첫 설법, 도리천에서의 강하, 열반, 성난 코끼리를 다스림, 사위성신변, 원후봉밀)이 묘사되어 있다.
광배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연기법송(緣起法頌)과 더불어 발원, 시주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불상의 시작, 간다라 지역 '보살'
‘보살’은 원래 깨달음을 얻기 전의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대승불교가 흥성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다른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로 그 의미가 넓어졌다.
따라서 보살은 세속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차림새를 한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보살은 ‘도티’라는 치마를 걸치고 상반신에는 숄을 두르고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이 보살상은 사실적인 묘사와 품위 있는 모습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여신>
사암으로 만든 이 부조의 중앙에는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인이 있고 여러 명의 아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육감적인 몸을 지닌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모습은
불교의 하리티, 자이나교의 암비카 같은 여신상의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인은 왼팔로 무릎 위에 앉은 아이를 감싸고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한 아이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다.
굽타 전성기의 절제미는 다소 부족하지만,
여신의 온화한 얼굴과 자연스러운 신체 묘사 그리고 장신구와 손발의 섬세한 처리가 돋보이는 조각이다.
<미투나, 사랑을 나누는 남녀>
인도 미술에서 많은 신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종종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기준에서는 세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사람 몸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형체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여겼던 당시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성스러운 남녀가 즐겁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축복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남녀 또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뜻하는 ‘미투나’는
인도 미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로 풍요와 길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바와 파르바티>
이 상은 굽타 시대 이후 북인도에서 유행한 시바상 중 하나로 시바 사원 외벽의 독립된 성소에 모셔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에는 시바와 그의 부인 파르바티가 황소 난디 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시바는 삼지창과 연꽃과 뱀을, 파르바티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거울을 들고 있다.
기단 양쪽에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인 가네샤와 카르티케야가 앉아 있고,
윗부분에는 브라흐마와 비슈누 그리고 브라흐마니를 비롯한 일곱 명의 모신(母神)이 있다.
이 상은 시바와 파르바티가 서로를 향해 친밀감이 느껴지는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서원화1>
‘베제클리크’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굴은 열다섯 가지 주제로 이루어진 서원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석굴 내부는 엄숙하고 위엄이 흐르는 듯하다.
이것은 제15굴 서원화의 일부분으로 꽃을 들고 있는 우아한 자태의 손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에는 과거불의 광배 일부가 있으며 꽃을 든 인물의 광배 일부도 확인된다.
서원화 위쪽에는 명문을 써 넣기 위해 마련된 흰색 띠의 일부가 보인다.
배경은 흐린 갈색을 띠지만 원래는 푸른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원화2>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의 제33굴 오른쪽 벽면을 장식했던 그림으로,
위구르 지배기에 즐겨 그렸던 주제인 서원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이다.
화려한 쟁반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개성 있는 얼굴과 복장에서
실크로드를 오가며 활약하던 상인의 모습이 연상된다.
벽화 왼쪽 끝에는 과거불의 광배, 발, 옷자락 일부가 보인다.
이 벽화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제20굴 서원도의 명문에는 석가모니가 상인이었을 때
코끼리, 말, 황금, 여인, 보물, 진주를 여섯 명의 승자(勝者)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그림 역시 석가모니가 전생에 상인으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중 하나인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담 벽화의 단편이다.
1911년 오타니 탐험대가 실크로드의 고대 도시 미란의 제5사지 스투파 회랑 벽에서 수집한 것이다.
비슈반타라 왕자는 비를 내리게 하는 영적인 능력을 지닌 코끼리를 적국에게 건네주어 국외로 추방당한 뒤에도
자신이 타던 마차와 말, 두 아들, 부인까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다.
보시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 이야기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
이 벽화는 왕자가 흰 코끼리를 선도하는 장면의 일부로
인물의 큰 이목구비와 강한 음영법의 사용에서 헬레니즘과 로마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창조신 복희와 여와> 섬유 마
중앙아시아 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창조신 복희와 여와'
투루판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 유적인 아스타나 무덤에서 발견된 이 그림은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두 신이 서로 마주본 자세로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이 여신인 여와, 오른쪽이 남신인 복희이다.
두 신은 각각 컴퍼스(規)와 구부러진 자(曲尺)를 들고 있다.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사람의 모습을 한 상반신과는 달리 하반신은 뱀과 형상으로 꼬여 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그림을 천정에 걸 때 못을 박았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림을 그린 천은 실을 여러 번 꼰 후 짠 마로, 근래에 보는 마보다 두툼한 느낌을 준다.
두 폭을 가로로 이어 직사각형의 화면을 마련했으며,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 부분에도 이은 부분이 있다.
바탕천은 원래 파란색이었으나, 현재는 가장자리를 제외한 대부분이 초록색으로 바래있다.
복희와 여와의 모습은 강한 묵선으로 윤곽선을 그린 후 붉은색과 흰색 안료를 두껍게 발라 완성했다.
배경에는 해와 달,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재현하고 있다.
그림의 세부 표현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색채가 선명하고 구도가 균형 잡혀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요소가 혼합된 투루판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투루판 지역은 일찍이 한족(漢族) 문화가 소개된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된 부장품에서는 중국적인 소재나 특징이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얼굴과 손에 보이는 음영 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등에는 중앙아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연등불수기 벽화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청년 수행자였을 때 부처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당시의 부처인 연등불에게 공양하여,
그 부처로부터 미래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다.
일본 교토의 니시혼간지 주지 오타니 고즈이가 1902년 9월부터 1914년까지 중앙아시아로 세 차례 탐험대를 보내
도굴해온 유물들을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오타니 수집품의 일부는 우여곡절을 거쳐 191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됐고,
해방 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됐다.
오타니 컬렉션은 석굴에서 절취한 벽화 등 종교미술과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 등에서 출토한 <복희여와도>(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창조신 '복희여와도‘)와 같은 고분 발굴품, 토기·인형·연장 등 생활용품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소장품은 작은 벽화 파편들까지 합쳐 1500여 점에 이른다.
왕에게 예의를 표하고 조공을 바치러온 외국사신들의 모습을 담았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아주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이 특히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이유는
제일 오른쪽 두명의 인물은 모자에 깃털이 달린 조우관이라는 모자를 쓰고 환두대도라고 하는 고리가 동그란 칼을 차고 있다.
바로 삼국시대 고구려 사람의 모습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람시간이 오래 걸렸다.
규모가 엄청 커서 하루에 다 돌아보는 건 어쩌면 욕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많이 걷고 힘들고 지쳤지만 뿌듯함이 함께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용사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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