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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함석헌
慈 · 儉 · 不敢爲天下先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호는 11,12 두 달 것을 합해 합병호를 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문제가 많습니다.
나는 본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에 장사 셈은 하나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능한 데까지 이제라도 내 할 의무를 다하다가 죽자는 생각에서 한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실패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저녁 마루턱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의 마음의 평화에 이른 오늘에 있어서도, 그 생각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렇게만 살자던 것이 아닌데……”하는 생각의 넘어가는 해 옆의 조각구름처럼 내 마음의 수평선 위에 떠 있 습니다.
그러나 낙망은 아니 합니다. 그것이 아직도 꿈지럭이는 까닭입니다. 조그마하나마, 좀 찌그러졌을망정, 동그라미는 그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야 어찌됐던 이치가 서로 가닿는(나와 대적 사이에) 소리를 해 보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속에 살므로, 처음 얼마동안을 지난 후에는, 독자로써 제 비용이 가려지지 못하는 잡지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소리는, 일하는 사람들이 일향 봉사로 하면서도, 결손입니다. 내 주머니 안의 돈이라야 우물 밑에 괴는 물 같이 내 것이란 것은 한 푼도 없습니다. 그저 사방에서, 그렇지요, 세계 끝의 씨알로 부터 고여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푼이라도 있는 때까지는 계속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주머니에 고여드는 돈은, 말하자면 포위되어 몰살을 당하게 된 부대에 대한 보급 노선입니다. 자유정신이 말라 죽어 가는 것을 건지기 위해 자기들의 마음을 짜서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다섯 여섯 해가 되어도 제 비용을 담당 못하는 잡지에 넣어도 좋은거냐? 말을 바꾸어서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곧 나라를 살리는 일이 되리만 한 그런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이론으로는 허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록 이 나라는 사람의 책임이 문제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저 한 사람만 살려야 된다 하고 판단을 내릴 때에, 그 판단 내리는 그 일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만일 내가 사람을 잘못봤다 한다면, 나는 큰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게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순결이고 또 하나는 지혜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내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내게 부치려는 마음, 돈으로나, 권력으로나, 명예로나, 혈육 또는 공사 인간관계에 대한 인정으로 뿐 아니라, 무해한 취미로까지 라도,내게 좋게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인데,내가 과연 그러하냐? 또 그담은 내가 의식적으로는 비록 아니 그런다 가정을 하더라도,내가 과연 복잡한 개인적, 단체적, 정치적, 역사적 얽흐러진 현상을 뚫고 진실을 보아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이론으로는 마음이 정결하기만 하면 지혜도 열린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점은 옛날의 위대한 성현들도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은 자기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는 이루다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무한한 힘들의 합작으로 되기 때문에, 종교에서 말하는 지극히 높으신 이로부터 오는〈은혜〉가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한을 향해 올라가려고 애타게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인사(人事)를 다해서도 허락이 안 되해야 것을 달게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걱정해 주는 고마운 마음들이 “앞으로 잡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의론을 해 올 때마다 내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어느 가까운 친구도 말을 못하면서, 언제나 늘 쓰는, 반드시 비겁해서만도, 회피하기 위해서만도, 상처가 너무 아파 눈을 돌리려는 어린애 같은 약함에서만도 아닌, 방패인 “글쎄”로 받아 두던 말을, 이 시간 처음으로 털어놓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말한다면 이유는 있지 없지 않습니다. 시국이 이렇게만 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자기 믿는 바를, 반드신 완전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로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씨의 소리도 상당히 발전을 했을 줄 믿습니다.
흉년이 들면, 부득이 긴 앞을 생각하여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다 주지 못하는 가장 모양으로, 참고 아니하는 말이 많습니다. 왜요? 사람은 긴 세월의 공동 경험에 의하여서, 폭풍우가 며칠 몇 달도 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운명을 같이 하면서 영원한 의무를 같이 지기로 하늘이 작정해 내준 그 가족이 그 한 때 고통 때문에 영원한 의를 잊고 그 집을 나간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간다야, 천하에 온 흉년인 이상, 어딜 가도 뻔한 것입니다. 역시 어디 가도 굶주리고 추움을 겪던지, 그렇지 않으려면 부자집에 종살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때에 내 가슴에 오는 자책이 있습니다. 과연 그 가장은 책임이 없느냐? 그가 무능했던 것은 아니냐? 모든 책임을 다 제도를 이용하여서 뺏아가는 부자에게만 돌릴거냐? 부자에게는 인간성이 최후의 가는 한 가닥까지도 다 없어지고 정말 짐승만이 남았느냐? 그 가장은 이제라도 그 부자를 설득시켜 선심을 쓰게 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없겠느냐? 가지가지 문제가 꼬리를 물고 나옵니다.
나는 내 지금의 태도만은 밝힐 수 있습니다. 나는 흉년이 아무리 심해도 목숨을 이어갈 자신은 있습니다. 아무리 고생이 스러워도 집을 흐트지는 않습니다. 설혹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집은 지킬 것입니다. 집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믿습니다. 이날까지 내가 부 자의 잘못을 지적해 온 것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도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당하는 천재가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은 그 책임이 부자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를 나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나의 책망에서 내가 미워하는 감정을 완전히 빼지못했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이 앞으로는 그런 감정은 아니 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누가 벌었던간 부는 사회의 공유라는 것, 따라서 부를 독점하는 것은 죄악이란 것을 충고하기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의 육체보다 그의 혼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능을 나무라고 이 집을 나가는 가족에 대하여서는 말할 수 없는 애탐이 있습니다. 될 수 있다면 돌아와 이 육신의 고통 속에서 영을 길러가는 영양소를 같이 씹어내 주기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집을 놓고 그를 따라 헤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집은 언제나 열려 있어 돌아오는 그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또 합병호로라도 내기를 결정한 것입니다.
내 우물에 물이 마른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아니 마를 줄 믿습니다. 내가 향락을 하자는 것 아니기만,하나님이 계신 한,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구 위에 씨알의 종자가 마르지 않는 한, 내 우물의 캄캄한 바닥이 드러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 다.
그러나 그 물을 마시려고 찾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할까? 제 인격을 팔아 얻은 부자집의 불의의 양식으로 살이 피둥피둥 쪄서 죄를 짖기보다는, 차라리 옛날의 안연(顏淵) 모양으로, 나물에 물만 마셔 파리한 뼈를 하늘 땅 사이에 버티고 서서 그 꼭대기에 명철을 아는 골통 하나만을 받들고 서자는 사람이 그래 하나도 없을까?
그럴 경우 나는 나를 죄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에 맑음을 찾는 마음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고 지구의 살 밑을 스며 고여드는 물이 맑지 않을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수가 곧 천상수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은 정욕의 모든 오염을 뛰어넘으리만큼 생명의 심부층에까지 파들어 가지 못한 내게 있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요새 내일은 나와 역사의 바닥을 더 파들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절대 승리법이 거기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것이 1976년으로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혹은 아주 영원한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13일부터 우리의 제2심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오거나, 설혹 그 기계가 되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했다는 가엾이 여김을 받으리만큼 잘못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알고 받기 위해 끝까지 힘쓸 것입니다.
그럼 다시 기회 없을 줄로 알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영원히 마지막 선물이라 해도 나무랄 데 없는 참 귀한 보배입니다. 30년전 老子에게서 받을 때에 老子 “자신도 보배로 여겨 지니고 있는 것이로라”하면서 주었던 것입니다(我有三寶,寶而다之).
一 曰慈,첫째는 혜가림, 불쌍히 여김입니다.
二 曰儉, 둘째는 졸라맴, 수수하게 함입니다.
三 曰不敢爲天下先,셋째는 감히 남보다 앞장을 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굳세기를 원합니다. 다 크기를 원합니다. 다 앞장을 질러 세상에 첫째가 되기를 원합니다. 노자 때에도 이미 그래서, 그 때문에 나라의 뿌리인 씨이 고달프고 희생이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가르쳐준 말입니다. 천하를 지켜 갈 수 있는 보배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사나운 폭력주의로 나가면 나갈수록 씨은 부드럽고 불쌍히 여기고 인자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慈야말로 참으로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왼통 사치에 흐르고 있습니다. 폭력주의의 불에 기름을 대는 것이 사치입니다. 씨은 가진 폭력과 속임으로 하는 착취에서도 견디어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졸라매고, 허풍선의 문화주의 집어치우고 그저 간소, 그저 수수한 속의 살림을 해야 합니다. 정말 크고 정말 넓은 것은 천하로 더불어 같이함인데, 그것은 儉에서만 나옵니다. 전쟁이 죄악인줄 안다면 그보다 먼저 사치가 죄악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서 났던 강자들이 잘못 알고 인생을 경쟁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됐습니다. 생명의 근본원리는 和에 있습니다. 同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하나되어 사는 데서 일단 보다 높은 생명의 단계가 나옵니다.
그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하나로 사신 것이 모든 어진이들의 유산 입니다.
그러면 다음은 새 하늘 새 땅에서!
씨알의 소리 1976. 11,12 59호
저작집; 9- 101
전집; 8-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