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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우보천리(牛步千里)처럼 느긋하게 일어나 먹고 마시고, 오늘 못 가면 내일로 미루고, 그것도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다가 한 달 후 혹은 몇 년 지난 후 다시 걸으면 된다.”라는 식으로 ▶동해안 해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 시코쿠 순례길, ▶프랑스 파리 시내 나들길, ▶강화나들길, ▶제주올레길 등 연간 2,000km 이상씩 국내외 명품 걷기코스를 홀로 걸으며 또 다른 사유의 세계를 체험한 한 사회학자의 『걷기의 유혹 - 걷기가 이끄는 삶』이 도서출판 JMG(자료원, 메세나, 그래그래)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길은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길에는 임자가 없다. 걷는 사람이 주인이다. 무슨 돈을 주고 걷는 길도 아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원하는 곳, 좋은 곳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길에는 모든 게 있다. 이미지가 있고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기쁨이 있다. 그래서 홀로 걸어도 좋다. 걸으면서 어제와 다른 새로움을 찾는 게 걷기의 즐거움이요 매력”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목차
저자의 말 : 길에서 길을 묻다 / 5
1. 걷기의 유혹과 매력 / 15
걷기의 매력
걷기와 철학적 사유
2. 왜 걷기인가: 호모비아토르 / 35
정적인 삶에서 동적인 삶으로
걷는 인간(호모비아토르)
걷기의 르네상스인가?
3. 스페인 산티아고 길 걷기가 주는 위로와 거대한 기쁨 / 51
800km, 165만 보의 걸음을 시작하다
만물을 잉태한 피레네산맥에 빠지다
메세타에서 고독감이 밀려왔다
오세브로의 팔로자는 원시적이다
마지막 종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델라에 도착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당을 향해 걷는 길이다
4. 일본 시코쿠 순례길 걷기 / 105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다
첫 번째 절 료겐지로부터 시작하다
자연 만물과 신성이 잠긴 곳으로
조어쿠지(상락사)에서 보는 부처
절간문 처마 밑에서 노숙하다
힘든 길에서 만나는 따뜻한 사람들
신의 나라: 부처의 나라인가, 신도(神道)의 나라인가?
5. 예술, 소비, 욕망의 도시 파리 / 145
혁명의 도시 파리
예술 소비 욕망의 도시는 아름다웠다
산책자로서의 어슬렁거림의 기쁨
파리지앵인가?
요리를 예술로 여기는 사람들
6. 동해 해파랑길 걷기의 미학 / 171
부산 하늘길로부터 시작하다
전통과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축복의 땅
모든 관점은 달리해 삶의 현상을 본다
길에서 길을 묻다
실향민정착촌 아바이마을은 굳세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돌아가도 후회할 것이다
두 발로 세상을 오르내리고
이승만 별장, 김일성 별장이 주는 아픈 역사
통일전망대: 걸었다, 해냈다, 감격했다.
7. 지리산 둘레길 / 219
지리산은 어떤 산인가?
날것과의 만남은 아름답다
다랑이길, 산자의 길(빨치산루트)에서 민족의 아픔을 본다
무속인들의 신선 세계는 조용하다
8. 추억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 강화나들길 / 263
강화 도심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피난살이 아픔이 서린 볼음도길
전쟁과 평화의 최전선 교동도에서 갈 수 없는 고향을 본다
9. 제주올레길 걷기의 서사 / 295
제주올레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왜 제주올레길을 즐겨 걷는가?
길 위의 즐거움은 선물이다
최근 걷기의 트랜드가 보인다
10. 걷기의 미래 / 321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다
포스트모던니즘 사회에서 걷기란 무엇인가?
걷기는 행복의 블루오션이다
11. 에필로그 / 337
참고자료 / 344
저자 소개
저 : 우정
1944년 황해도에서 출생했으며, 정보사회포럼 대표 및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한양대 대학원 겸임교수, 미국 유타대 사회과학대학 연구원을 지냈다. 은퇴 후는 하고 싶은 일만 한다는 집념 속에 제주에 칩거하며 노년의 문제를 다루는 노년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성공적인 노화와 관련된 이론과 방법론을, 그리고 건강을 돌보는 걷기. 숲철학에 대한 글쓰기와 강의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휴미락의 탄생: 쉬고(休), 먹고(味), 즐김(樂)의 인문학 수업』(2020),『죽음의 인문학적 이해』(2018),『인문학에 노년의 길을 묻다』(2015)『북한 사회의 성과 권력』(2012), 『9988의 꿈과 자전거 원리』(2010),『정보경영론』(2008), 『정보소비의 이해』(2009), 『북한사회구성론』(2000),『분단시대의 민족주의』(1996) 등이 있다. 기타 블로그로 《네이버: 우정의 어모털 세상 읽기》를 통해 노년사회의 문제, 경험적인 걷기철학, 숲과 야생의 위로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1. 걷기의 유혹과 매력
나는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우보천리(牛步千里)처럼 느긋하게 일어나 먹고 마시고, “오늘 못 가면 내일로 미루고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다가 한 달 후 혹은 몇 년 지난 후 걸으면 된다.”라는 식이다. 내가 이렇게 걸은 해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산티아고 순례길, 강화나들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한 유일한 질문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걷기가 나를 지키는 삶의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문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걷기 위해 어디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걷는 자체기 삶의 활력이 된다. 그러니 멀리 한눈을 팔며 걸어보자. 섰다 가다 하며 걸어보자. 그때 삶의 방향과 의미가 보일 것이다.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자존감이 아닌가. 저 들판을 지나가면 누가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걸어가야 한다. 동네 길이라고 해서 쓸모없는 걸음일까. 쓸모없는 걸음 속에 쓸모 있는 걸음은 ‘나’ 찾기가 될 것 같다. 자주 가고 싶은 곳을 걸으면 된다. 걷기의 참뜻은 다른 문화의 끝에서 홀로 느껴보는 경험이다. 그리고 뭔가 발견해 내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다.
□ 걷기의 매력이 넘쳐나다
세상의 모든 길은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길에는 임자가 없다. 걷는 사람이 주인이다. 무슨 돈을 주고 걷는 길도 아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원하는 곳, 좋은 곳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길에는 모든 게 있다. 이미지가 있고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기쁨이 있다. 그래서 홀로 걸어도 좋다. 걸으면서 어제와 다른 새로움을 찾는 게 걷기의 즐거움이요 매력이다.
걷는 것은 즐기는 것이다. 나에게는 ‘걷기의 삼락(三樂)’이 있다.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주요한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즐기는 방식이다. 그것은 첫째, 남이 보지 못하는 숨겨진 풍광을 내 눈으로 보고 즐기는 일이다. 두 번째는 마음의 눈으로 보며 깊이 만물을 사유하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걸을 때 지적 근육이 붙고 동기부여의 기회가 된다. 세 번째는 미지의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걸으면서 미지의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즐겁게 걸을 수 있다. 이런 삶이 곧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나는 걷는 바보이다. 걸으며 노는 사람이다. 젊어서는 목표까지 쫓기듯이 달려갔지만 이제는 걸어가야 할 곳은 많고 나 자신을 찾는 길이니 천천히 즐기며 걷는 것이다. 나의 걷기 철학은 별것이 없다. 다만 심혈 관계, 근육 유지, 스트레스 해소 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걸을 때 가벼운 몸이 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정신적 치유 자유의 조건도 역시 걷기다.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걸으면서 어제와 다른 새로움을 찾는 게 걷기의 즐거움이요 매력이다. 그러면 걷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걷기가 당신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인생은 걷기의 삶이다
인류는 지난 350만 년 전부터, 즉 수렵 채취시대부터 걷기를 했다. 걷기는 생명의 바탕이 되었다. 걷기는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걷기는 인생 무대 자체이다. 걷기는 또한 마지막에 대지로 돌아가려는 출발이다. 걷기는 유효기간이 없다. 두 발로 걸으면 된다. 그래서 걷기는 인류의 미래다. 걷다 보면 공존의 철학도 느낀다.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희망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걷기는 하나의 철학이다
걸을 때 자주 떠 올리는 질문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늙음의 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삶의 의미는 뭔가? 이런 질문은 나만이 아니라 옛 선지자 철학자들의 질문이다. 걸을 때, 눈을 감을 때 더 선명해지는 내 삶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내가 걷기를 계속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더 가까이 가려는 것이다. 어디로 더 걸어서 머무를지, 걸으면서 자연히 뭔가 덜어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걷기는 빼기 중심의 삶이다. 힘들지만 먼길을 떠나는 것은 내가 걷는 길 너머의 무엇을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상상력이다. 걷기를 끝내니 감동 같은 것이 짝 밀려온다. 그게 뭐랄까? 그것은 아마도 종교가 아닐까? 이성으로 알아차리기 어렵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세상에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걷는 자의 철학이다.
걷지 않으면 생각하는 일도 없다
생각이 바뀌는 걷기의 즐거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길 위에 있다. 그러니 걸어보자.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길은 세속의 삶을 씻어 버리기에 좋은 곳이다. 잡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로 채우는 곳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그것은 눈이 아니라 머리가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럴 때 생각의 깊이가 더해진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죽을 때까지 많이 사용해 봐야 7∼15%라고 한다. 85∼93%는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걷지 않으면 사람들이 둔해지고 뇌도 자연스럽게 돌아가지 않는다. 길은 우리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걷기와 고독은 늘 같이 있다
혼자 걸으면 고독할 때가 더 많다. 소울메이트와 같이 걸으면 좋으련만 동행자 없이 걸을 때 외로움은 더 커질 수 있다. 고독하니 걸으면서 묵언에 빠진다고 할까. 주위에서 보면 실제로 혼자서 걷는 사람이 많다. 둘레길이나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고독을 즐기며 홀로 걷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3명 중에 한 사람은 혼자 걷는다. 이유인즉 혼자 걸을 때 자유로움과 혼자만의 시간 소유, 잠자리, 식사 등의 자유로운 자기 결정 등을 꼽는다. 니체, 소로우, 루소 모두가 혼자 걸으며 자유를 느꼈다. 그들은 깊은 사유에 빠지며 글을 썼다. 혼자 걸어도 자신과의 대화, 자연과의 만남 때문에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걷기는 동행이다
걷기는 때때로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게 된다. 걷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 경력, 가족 관계, 자존감, 어떤 집에 사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지식 지혜를 말하고 문화를 교환하며 놀라운 삶을 공유하며 걷는 것이다. 온갖 어려운 일을 당해도 동행 속에 협력 공감을 유지하며 놀라운 동행자가 된다. 또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그래서 동행 협력은 세계로 이어진다. 걷다가 길동무를 만나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혼자 여행하거나 걷는 혼행(혼자 여행)으로 떠나 왔지만 막상 현지에서는 동행자를 만날 기회가 많아진다. 걷기를 같이 하는 사람은 겸손하고 소박하며 때로는 시크(chic) 해서 좋다.
걷기는 치유수단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당신의 건강을 위해 두 다리를 준 것인지 모르겠다. 걷기는 밖에서 안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걷기의 본질은 기(氣)를 살리는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Stevenson, 1850∼1894)은《보물섬》에서 “위대한 바깥”이 치유해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기분 좋게 하루에 30분 만이라도 걸으며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그것이 삶의 교양수업이요 건강 유지의 비결이다. 걸으면 다리 근육도 좋아지지만 지적 근육도 좋아진다. 건강을 찾는 즐거움이다. 기쁨 호르몬(도파민)도 넘칠 것이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걷기에서 오는 건강은 자기 자신을 우아하게 완숙하게 해준다. 걸을 때 우리 몸을 이루는 200여 개의 뼈와 600개 이상의 근육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모든 세포를 깨우기 때문이다. 건강의 척도는 걷는 시간 길이에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걷기는 놀이다
놀이로서의 걷기는 마음을 이완시키고 행복감을 느끼는 자기초월감으로 인도한다. 열정적으로 걸으면 일상의 신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미국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존 핀레이(John Finlay, 1863∼1940)는 ‘걷기광(步行狂)’으로 불린다. 그는 뉴욕 맨해튼 전체 섬을 매년 한 번씩 걸으며 자신의 학문체계와 건강을 챙겼다. 그는 “내가 혼자 하는 놀이는 매일 걸으면서 그 거리만큼 지구상의 어딘가를 걷는 놀이다.”라고 했다. 걷기에 몰입하면 자연히 성과를 높일 수 있다. 인간은 탐험 같은 길을 걸어볼 때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런 점에서 걷기는 당신을 보다 건강하게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아이디어가 솟아나게 할 것이다.
걷기를 통한 쉼, 안식을 얻는다
쉼의 인문학이 있듯이 걷기는 힘든 길이지만 ‘안식’을 전제로 한다. 안식이란 편히 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혹자는 “힘들게 걷는데 무슨 안식?”이냐고 투덜거릴 것이다. 그러나 걸을 때 몸은 피곤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휴식시간이다. 먼길 위에서 혹은 산속에 안겨보라. 거기서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이런 것이 쉼이다. 말을 바꿔서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만성피로에 가까운 육체적인 것보다 뇌가 지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걷기는 단순히 건강 유지가 아니라 더 건강한 몸을 만들고 더 깊은 명상, 사유하기 위해서다. 걷는 사람의 대부분이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걷는다는 전문가들의 연구보고서가 있다.
흔히 누구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나의 경우는 노년기에 들어와서 ’걷기공부‘가 나의 ’위기지학‘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 바보인지 모른다. 속상해서 나온 길이라도 그것을 풀어놓고 걷는 바보,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걷는 바보, 험한 길을 마다하고 걸어가는 바보, 그래서 나는 걷기 바보다. 누구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걷기의 즐거움이다. 걷는 바보들이 서로 토닥이며 위로하며 멀고도 먼 험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위기지학을 즐기는 마니아들이다.
어쨌든 인생은 물 흐르듯 지나가는 것이다. 데이비드 소로스는 인생은 야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런 야생의 들과 산을 그냥 힘을 빼고 걸으면 된다. 걸을 때는 춤을 추듯 바람에 맡기고 무의 감정으로 걸어갈 때 삶의 시간은 채워지는 법이다. 걸으면서 자연풍광을 보게 되지만 결국 나를 보게 된다. 걷기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지만 많은 경험을 하는 순간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삶이 괜찮은지를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걷는다는 것은 몸에 좋은 보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 걷기와 철학적 사유
걷기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다. 걷기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프랑스 소설가 올리비에 블레이즈(Olivier Bleys)가 쓴 책 《내가 걸어서 여행하는 이유》(2017)에서는 먼 거리를 걸으면 본능이 되살아난다고 했다. 마주치는 것마다 입체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하게 오래 살아가려는 욕망, 영생을 얻으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빌딩 숲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걸으면 건강은 물론 상상지능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걷기는 인간에게 활력을 넣어주는 촉진제다. 걷기는 길 위에서 자기 능력껏 걸어가는 능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다. 걷기를 통해 인간 됨을 배워가는 것이다.
인류 지성에 영향을 크게 미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니체, 루소, 다윈, 찰스 디킨스, 스티브 잡스 등은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걸었을까. 그들은 자주 걸으면서 인류사회를 관통하는 정의, 사회계약, 인간 의지, 국민주권, 자유와 평등, 사랑?등 근대사회 근본이념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이들은 걷기와 사유, 명상을 거듭하면서 자신들의 사상 신념체계를 확립했다. 철학자, 문학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걷기는 자연과 세상을 바로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걷기의 예찬은 끝이 없는 듯하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 가운데 최고의 약은 바로 걷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늘 아고라(광장)를 서성거리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허약했지만 회랑을 돌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산책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학파라고 했는데 여기서 ‘소요’는 그리스어로 ‘산책하다’는 뜻의 동사 페리파테오(peripateo)에서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철학자는 걸어 다니면서 생각하기를 즐겼고 사색을 통해 삶과 인간, 자연, 우주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Edith Hall, 2018)
시사적이지만 니체, 칸트, 루소가 위대해진 것은 7할이 걷기였다. 그들은 걷기에 철학을 입힌, 철학이 깃든 걷기를 통해 위대한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좋은 자연을 찾아다닌 방랑자들이다. 수많은 사상가들과 문학가들은 걷는 동안이 사유와 명상의 시간이었고, 걷기를 반복적으로 하며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걷기에 기반한 삶(life based walking)’이다.
이런 반복의 걷기로 생겨난 ‘철학자의 길’?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도보여행을 하면서 걸어본 길이지만 독일의 고성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philsophenweg)’이 그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철학자들로서 헤겔, 괴테,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이 시간 나는 대로 거닐며 사색하던 길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일본 교토(京都)의 은각사와 연결된 곳에도 ‘철학자의 길(哲學の道)’이 마련돼 있다. 일본 근대철학의 대가인 니시다기타로(西田畿多郞)가 자주 걷던 정원 같이 느껴지는 산책길이다.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표지석들이 있지만 산책을 위해 정원같이 꾸며진 산책길이 미학적 고려대상이 되면서 철학자들의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비슷한 예로 뉴욕 맨해튼 섬에는 교육자 존 핀레이가 자주 걸었던 길을 ‘핀레이 워크(John Finley Walk)’로 조성해 많은 사람들이 걷도록 했다.
이러한 길들은 고독과 영광의 혼이 담겨 있다. 길을 가는 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달콤한 맛도 느끼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고행의 걷기를 하지 않는가. 걷기가 힘들지만 욕망과 일탈, 낮은 자세로 변화되는 신체의 행위다. 많이 걸으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고통의 치유를 얻는다. 장기도보여행 혹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깨닫는 순간들이다. 이름을 날린 천재들은 대부분 산책자가 아니던가? 그것은 걷기를 통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 자신이 깨지기 위해서다. 종종 예술가나 시인들은 가장 한가하게 보일 때 가장 일에 몰두하는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걷기는 자연주의, 사실주의 같은 것에다가 환상, 상상력을 넣는 것이 사유이고 걷기의 효과다. 자연이 모든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어디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느낄 줄 알 때만이 가르쳐 준다. 내면의 공허함은 아름다운 풍광 사색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니체(1844∼1900)는 자신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곳을 피해서 자기 생리와 어울리는 곳을 찾아서 걸었다. 니체는 좋은 자연과 나쁜 자연으로 나눠서 좀 더 좋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니체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병으로 인해 자신의 거주지를 선택하며 유럽지역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마을(Sils-Maria)을 중심으로 하루 8시간까지 아니면 생모리츠 엥가딘(Engadine)의 고산들을 자주 걸으며 자연과 자신의 원소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다. “걷는 동안 참 좋은 생각을 한다. 혹은 걷는 것만으로
도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우상의 황혼) 그리고 니체는 발로 글을 쓴다고 했다. “발로 쓴다. 나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항상 글을 쓰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내 발은 확고하고 자유롭고 용감하게 들판을 달린다.”라고 했을 정도다. 육체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온화한 기후의 좋은 자연을 찾아다니며 방랑자가 되었다.(Solnit, 2001)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Rousseau, 1712∼1778)는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고백록으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Reveries of a Solitary Walker, 1782)을 썼다. 루소는 ‘첫째 산책’에서 산책의 의미 목적을 제시했다. ‘둘째 산책’에서 산책이 주는 즐거움을 말한다. ‘셋째 산책’에서 도덕과 종교에 대한 명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인간의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매일 아침 생제르맹이나 불로뉴 숲을 찾았다. 그는 걷고 일하고 뭔가를 발견한다. 고독하고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걷기에서 숲 소리, 겨울 햇살, 짐승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는데 행복감을 느꼈다. 루소에게 최초의 걷기는 행복하고 빛나며 중요한 긴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는 돈도 없었지만 원래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안시에서 토리노까지, 졸로투론에서 파리까지, 그리고 파리에서 리옹까지, 마지막으로 리옹에서 샹베리까지 엄청나게 먼 거리를 걸었다.(Gros, 2015) 이렇게 루소는 하루 종일 걸으면서 문화와 교육 예술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자연, 즉 루소는 진짜 여행을 하려면 걸어서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칸트(1724∼1804)에 있어서도 걷기 습관은 좋은 실천적 경험이었다. 철학 없는 걷기는 헛된 일이고 걷기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고 여겼다. 걷기와 명상을 통해서 육신의 쾌락을 통제하며 우울증을 치유했다. 그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매일 걸었다. 여름에는 땀이 많이 난다면서 천천히 주로 정원에서 걸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생활에 엄격해서 일정 시간에 일어나서 커피 마시기, 글쓰기, 강의하기, 식사하기 그리고 오후 3시경부터는 걷기를 즐겼다. 무척이나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오늘날에도 그가 걸었던 길을 ‘칸트길(Kant’s Path)’로 정해서 그를 기리고 있다.
괴테(1749∼1832)는 체코와 독일 국경에 있는 리조트타운 테플리체(Teplice)를 걸으며 작품 구상을 했다. 괴테는 사색하는 삶을 살았다. 걸으면서 자연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기뻐하면서 가장 높은 산 Kickelhan에서는 ‘방랑자의 밤’(여행자의 밤 노래)을 썼고 이어 80세까지 끊임없이 걸으면서 ‘파우스트’를 썼다. 그는 걷기를 찬양하면서 “걸어서 갔던 데만이 진짜 갔던 곳이다(Only where you were walking you have really been)”라고 외쳤다.
유명한 에세이 ‘월든(Walden)’의 저자인 미국의 문학가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걷지 않는 다리는 여위고 만다. 반면 숲을 걷는 영혼은 풍성해진다. 무작정 걷노라면 자연이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라고 했다. 월든 호숫가에서 손수 오두막집을 집고 살았던 소로우는 황야의 야성이 인류 번영의 필수요소라며 “숲과 황야에서 인류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나온다.” 하며 “이른 아침 산책은 그날 하루의 축복”이라고 했다.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은 22세 나이에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엔나 주변의 숲길을 습관적으로 매일 걸었다. 그에게 걷기는 ‘일상의 의식(daily rituals)’이고 휴식시간이었다. 특히 그는 점심 식사 후에 숲길을 홀로 걸으면서 음악적인 영감을 얻었다. 걷다가 그는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길다.”라며 감탄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교향곡들은 자연을 즐기고 숲길을 걸으면서 건져낸 결과물이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6번인 ‘전원교향곡(Pastoral Symphony)’은 자연의 소리를 담은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는 걷기 중독자였다. 엄청나게 걸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런던에 살면서 로체스터와 켄트의 시골길을 밤낮으로 걸으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밤에는 하룻밤 사이에도 런던의 어두운 거리를 25km나 걸을 정도였다. 그는 어디에 갈 목표를 세우고 걸은 것이 아니라 산책하는 식으로 걷기(vagabond)를 즐겼다. 그는 자연 풍광을 보기보다는 그 뒤의 숨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도시여행자이자 시골 여행자이며 항상 길 위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걷기를 즐겼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 역시 걷기를 즐겼다. 그는 매일 사무실이 있는 팔로알토(Palo Alto) 지역을 걸었다. 청바지에 검은색 목 폴라를 입고 걸으면서 묵상하고 문제 해결의 아이디어를 찾았다. 잡스뿐만 아니라 역사상 이름을 남긴 창조적 천재들은 거의가 다 하루에 3∼4시간씩 걸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 문학예술 창작에 힘썼다.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아이디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걷지만 이야기가 있는 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걷기, 즐거운 나눔이 있는 걷기를 원한다. 걷기를 하면서 사회적 신분 등의 이야기보다는 서로 걷기가 필요한 이유, 어디로 걷는가, 어떻게 걷는가, 하루에 몇 시간 걷는가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걷기를 통해 ‘나다움’을 찾는 것, 곧 ‘자기다움’을 세워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걷기는?전 생애 과정의 보약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걷기는 삶의 과정에서 ‘마법의 약’이 된다.
걷기의 효과는 매우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릴 오페초와 다니엘 슈워츠(Marily Oppezzo/Daniel Schwartz, 2014)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앉아 있을 때보다 걸어 다닐 때 81% 이상의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서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서 일한다고 할 때 심장병 당뇨병 등 수많은 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세계를 바꾸고 나를 바꾸는 원초적 힘은 가장 힘든 길을 걸을 때 나온다. 미국의 여성환경전문가 플로렌스 월리엄스(Florence William, 2017)는 자연의 힘이 더 행복하게 더 건강하게 창의적으로 만든다고 하면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생태치료가 스트레스와 혈압을 낮추고 정신 건강을 치유하는데 강력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걷기는 사유와 명상의 시간이었다. 특히 창조적인 천재, 철학자들은 걸으면서 영원성, 영혼의 문제, 존재의 신비, 고독, 시간과 공간의 의미 등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걷기는 자유이지만 고독한 길이다. 걷는 데서 자유를 느끼지만 동시에 인간은 자유가 주는 고독감, 외로움, 소외감을 피할 수 없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갖는 정체성, 자율성, 내가 선택한 삶 등 생존 조건이 보장된 것 같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따뜻한 사랑, 어떤 소속감(직장, 가정, 그룹)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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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길에서 길을 묻다
무엇이 나를 먼길로 이끌어가는 것일까? 늙음의 길에서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걷는가?”라는 촌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걷기 자체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요 의식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익한 중독이다.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되기 쉬운 동물이다. 걷는 것이 버릇이 되고 걷는 바보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술이나 담배, 마약, 게임, 사랑에 중독되지만 나는 걷기중독에 빠진 듯하다. 몸이 지쳐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정신만은 맑고 충만해지는 기분, 이것이 걷기의 중독이다. 걷기 마니아들이 그렇다. 문제는 중독은 뭔가 결핍돼 있다는 말과 상통하는데 걷기는 어딘가 채우는 계시가 되고 걷기 자체가 동기부여가 된다. 걷기만 자주 해도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고 늙음을 막을 수 있다.
우리는 걷기 위해 떠난다. 길 따라 이야기 따라 걷는다. 어디로 더 걸어서 머무를지 모르지만 도시 생활 속에 박제해 두었던 영혼을 깨워 낯설은 길, 숲속으로 들어간다. 많은 사람이 외로워서, 슬퍼서, 인생이 허무해서, 혹은 모험 삼아 몇 날 며칠을 걸어보면 답답한 마음에 희망이 새로운 힘도 솟아난다. 젊은이들은 사랑을 찾아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특별히 60∼70대 세대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걸으면서 혼자 걷고 묵언(默言) 자세로 걸으면 진실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내가 힘들게 걸어가서 만날 장소는 지친 내 영혼을 받아주는 세상일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나는 은퇴 후 제주에 거처를 정한 후 제주 한라산, 올레길에서부터 주요 명산은 물론 동해 해파랑길(770km), 지리산 둘레길(274km), 강화 나들길(310km), 제주올레길(2회 완주, 800km)을 걷었다. 매일 아침 1∼2시간씩 습관적으로 걷는다. 그리고 걷기의 발견은 계속되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800km), 프랑스 파리 시내 산책, 시코쿠 순례길(300km)을 걷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어느 해는 일 년에 2,000km 이상을 걸었다.
이렇게 노년기에 수백 킬로미터씩 걷는 것은 나에게 거대한 도전이었다. 더 늙기 전에 “떠나자. 야생의 숲으로”. 나는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걷는 동안 지름길이든 우횟길이든 부지런히 걷고 쉬고 하며 걸었다. 시속 8∼9km로 걷는 스피드 워킹이다. 도보 여행자에게는 어디를 가다가 쉬는 곳이 꽃자리다. 걷다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허름한 바에서 칵테일 한 잔은 방랑자의 즐거움이다. 늙었다고 멍청한 화석 인간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집 밖의 세상은 넓고 아름다웠다. 먼 장거리 도보여행 걷기 자체를 위한 걷기 즐거움을 얻기 위한 걷기, 예방의학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걷기.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걷기였다.
지금은 바야흐로 걷기의 시대이다. 걷기의 르네상스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보헤미안일까. 방랑자라고 할까. 길에 나서면 많은 사람이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못 이룬 최선, 뭔가 잘못 살아온 것 같은, 아니면 패배로 끝나는 내 삶을 짊어지고 먼길, 험한 길, 골목길을 걸어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 행위와 같다.
먼길을 걷는 자의 여정은 영적인 싸움 과정이다. 그래서 걷기는 깨달음의 길이다. 나는 넓은 길을 찾기보다는 때 묻지 않은 원시적인 좁은 길, 골목길을 더 좋아한다. 이미 난 길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길, 그런 길 위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걷는 것은 인간다움이요 자기다움이다.
게다가 우리가 걸으면서 만나는 자연은 짜인 각본이 아니다. 삶의 과정은 자연과정이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죽는 것, 모두가 자연의 논리다. 자연을 따라 걸으면 마음도 평안해진다. 정신 자본이 축적된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어서 걸어 봐. 저 들판 계곡 숲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 느끼며 걸어 봐. 당신의 하루가 아름다울 거야.” 하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걷는 자가 길의 주인이 된다. 걷기는 길 위에서 경험하는 삶의 현장이다. 걷기의 재미, 길거리에서도 맛볼 수 있는 미쉐린(Michelin) 음식을 즐길 때 살맛이 난다. 내가 걷는 이 길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지만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간직한 역사이며 종교이며 정신이 아닐까. 산천은 우리의 사상이고 어머니의 자궁이다. 이런 곳을 따라가며 확인하고 느끼는 것이 걷기의 묘미다.
이 책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잡았다. 내가 그동안 걸었던 길을 기억하며 몸의 글로 옮겼다. 걷기의 인문학이라고 할까? 미련할 만큼 걷기에 미쳤다고 할까? 걸을 때 몸은 녹초가 되지만 마음은 분홍빛으로 빛나던 경험을 다시 꺼내서 옮겨 놓은 것이다. 걷기 전도사가 아닌 걷기 바보로서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몸과 정신을 위해서 자주 걸으라는 것이다. 걷는 것이 곧 건강이요 웰빙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0명 중 99명은 아파서 못 걷는 게 아니라 걷지 않아서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늘 변해야 한다. 생각은 언젠가 변하겠지만 걷기가 꼭 힘든 것은 아니다. 힘든 길을 안고 걷기를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산 따라 물 따라 걸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국내의 동해 해파랑길을 비롯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 등 7개소를 걸은 경험 중에 몇 개 코스만을 선택해 일부만 소개한 것이다. 책 구성은 걷기의 유혹과 매력으로부터 걷기와 철학적 사유, 왜 걷는 인간인가를 살펴보고 이어 내가 힘들게 걸은 걷기의 명품 코스 7개를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현시대의 화두인 AI 시대에 걷기의 미래를 제시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70대 중반에 내가 왜 홀로 먼거리 도보여행을 떠났을까? 기쁘게 걸었을까, 아니면 지루하게 힘든 걷기는 아니었을까?” 하는 걷기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여 “더 늙기 전에 꼭 걷고 싶은 길은 어딜까?” 하고 헤아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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