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회 지음 _ 커피집을 하시겠습니까
최고의 커피가 있는 곳
- 부에노스 디아스, 쿠바
쿠바 혁명의 영웅이자 이상주의자들의 아이콘, 체 게바라. 그 굵기만큼 구수하고 무거운 연기, 시가cigar. 한때 잊혀졌지만 다시 부활해 전설이 되어버린 음악가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쿠바인에게는 공기이자 소금과도 같은 춤, 살사. 서방의 경제봉쇄가 만들어낸 명물, 올드 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아이들의 놀이터, 말레콘, 군복보다 아디다스 체육복이 잘 어울리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까지. 쿠바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여기에 나는 ‘사람 향기’를 더하고 싶다.
멕시코 칸쿤을 출발한 비행기는 한 시간 사십오 분 만에 쿠바 아바나 공항에 닿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쿠바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현대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태운 택시도 푸조 신형이었다. 그러나 아바나 도심으로 진입하자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다. 전력 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보니 꼭 필요한 시설이 아니면 소등을 한다고 했다. 덕분에 숙소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택시 기사 또한 내가 예약한 숙소의 위치를 몰라 지나가는 행인과 잡화점 상인에게 물어 겨우 찾았다. 그렇지만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불야성 도심을 마주했다면, 나는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저녁이나 먹을까 싶어 숙소를 나와 식당을 찾는데, 거리가 어두워 통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골목으로 들어가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주점이 나왔다. 메뉴판을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옆 테이블에 있는 음식과 같은 것을 달라고 한 뒤 모히토 한 잔을 주문했다. 알고 보니 그 음식은 잘게 저민 소고기와 쌀로 만든 ‘파카티이요’였다.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맛을 느낄 틈도 없이 허겁지겁 접시를 비웠다.
모히토를 반쯤 들이켰을 때, 손님들은 음악에 맞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녀가 짝을 이뤄 살사를 추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내게 한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멕시코 오악사카에서 한 살사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예상치 못한 나의 적극성에 손님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아, 여기가 쿠바구나.’ 나의 쿠바 신고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 담배를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쿠바에 오기 전까지는 쿠바에 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풍만한 쿠바 여성이 후텁지근한 날씨 아래서 땀이 송송 맺힌 구릿빛 허벅지에 대고 말아준다는 세계 최고급 시가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그저 그런 것 말고, 최고급 시가로 잠시나마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시가 공장과 판매점을 겸한 ‘파르타가스 partagas’였다. 점포 안쪽에는 손님들이 구입한 시가를 피울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최고급 코히바 6.55인치 시가를 입에 물고 살살 돌려가며 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반대편에 앉은 초로의 두 신사와 숙녀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띠고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한 신사는 난생처음 담배를 피운다는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내가 피우는 6.55인치는 비기너에게는 너무 과하다고 했다. 그동안 담배를 피워보지는 않았지만, 시가는 궐련과는 달리 속까지 깊이 들이마시지 않고 입안에서 즐기는 담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3분의 1쯤 피웠을 때, 순간 연기가 목에 탁 걸렸다. 콜록콜록 거친 기침이 났고, 눈물을 쏙 빼고 말았다. 세 사람은 깔깔대고 웃었다. 역시 시가는 그 굵기만큼이나 구수했으나, 매섭고 무거운 연기였다.
주소 Fábrica de Tabaco Partagas, Calle Industria, La Habana, 쿠바 |
쿠바에서 50원이면 로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저렴하다고 맛까지 그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쿠바는 명실상부한 커피나무가 자라는 커피 산지이다. 구형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멋스러운 레버식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신선한 원두를 이제 막 추출한 진하디 진한 커피에는 크레마가 맛나게 앉았다.
커피 한 잔을 비우고, 아바나클럽 아네호 에스페시알 럼을 한 잔 주문했다. 각성된 정신은 럼의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면서 살짝 눌렸다. 다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설탕을 한 스푼 넣고 휘휘 저은 후 단숨에 들이켰다. 입안에 남은 럼의 잔향과 커피 향이 섞이면서 오묘한 맛을 냈다. 설탕의 단맛으로 마무리. 10여 분 만에 각성과 몽환의 두 세계를 경험했다. 뭐든지 지나친 것보다는 조금 서운한 듯해야 다시 찾게 된다.
시엔푸에고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곳은 한때 스페인 식민지였던 곳으로 지금도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 정부 건물, 공원 등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들렀기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광장으로 나가 숙소를 찾았다. 외관이 깨끗하고 발코니에 관리가 잘된 화분이 여러 개 놓인 숙소를 발견해 하룻밤 묵기로 했다.
이곳의 주인인 레오와 아르만도 부부는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의 걸음걸이가 다른 두 고양이와 달라 물어보니 늙어서 눈이 안 보여 그렇다고 했다. 나이를 물으니 스물세 살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 꼬모의 사진을 보여주자 아르만도는 “보니또(귀여운) 보니또” 하고 탄성을 연발하고는 놀러온 친구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르만도는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레오가 서재에서 공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내 이름과 주소를 받아 적고는 내가 이곳을 방문한 두번째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환영의 의미로 체 게바라 펜던트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아바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를 위해 일했으며 젊을 때 체 게바라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1928년생이니까 레오와는 5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으니 그가 답했다.
"As you know."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르만도는 활짝 웃는 얼굴로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내가 이제까지 만나본 할머니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분이었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부엌 식탁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나는 두 번 놀랐다. 먼저, 방금 구운 듯 따뜻한 빵, 잔 받침까지 데운 뜨겁고 진한 커피, 그리고 다양한 열대과일 등 정성이 깃든 풍성한 식탁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때문이었다.
“아르만도, 이 음악이 뭐예요?”
“쿠바 클래식 음악이에요.”
아니, 쿠바에도 클래식 음악이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장난삼아 “아르만도, 이 곡 피아노로 칠 수 있어요?”라고 묻자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아마도”라고 답했다. 아르만도는 아바나 음대에서 피아노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했다. 이 음반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는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 내가 아쉬워하자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의 남편에게 갔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나에게 아르만도는 CD 두 장을 내밀었다. 식사 때 들은 쿠바 클래식 음악 CD를 복사한 것이었다. CD에는 ‘엔리케 치아 피아노 1, 2집’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르만도와 나는 가볍게 포옹한 후 볼 키스를 나눴다. 그녀는 오늘부터 한국인 아들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나 역시 아르만도를 엄마처럼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더 묵고 싶었으나, 예약이 꽉 차 빈방이 없는 관계로 레오가 소개한 다른 숙소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가끔 쿠바를 생각한다. 엔리케 치아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면서, 2009년 11월 23일 아침을 추억한다. 특히 나에게 또 다른 쿠바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 향기 가득한 레오와 아르만도, 두 분을.
최고의 커피가 있는 곳
- 콜롬비아 살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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