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세상
여느 때와 같이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내 앞에 있는 편지 한 통 때문이다. 편지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에게 이런 편지가 오게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늘 그렇듯, 낮 12에 일어난 난 오늘 아침을 뭐 먹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매우 심오한 활동을 한 후, 뇌세포 하나하나의 치열한 협상 끝에 맥도날드 더블 불고기버거를 먹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또다시 바뀌기 전에 식탁에 최근에 받았던 재난지원금 카드를 가지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타려고만하면 다른 층에서 인터셉트해가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집을 나서려는 그때 난 우리 집 우편함에 꽂혀있는 서류 봉투 한 통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냥 휴대폰 요금 고지서 따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제대로 집고 살펴보니 그 서류봉투는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보냈는지, 심지어는 누구에게 가야하는지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말 그대로 그냥 봉투였다. 순간 나에게 온 것이 잘못 온 게 아닌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 따위 누군가의 장난질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난 그 봉투를 뜯어버렸다. 그 봉투에는 편지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서비스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곧 로그아웃 하실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만이 적혀있는 종이가 들어있었고, 그걸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곧바로 난 종이를 북북 찢었다. 왜 내가 그런 돌발 행동을 했는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밥맛이 떨어져, 맥도날드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근처 편의점에 가서 초코바 몇 개를 사온 후, 찹찹 소리를 내며 그것들을 먹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분명 찢어버렸던 종이가 현관 바닥에 멀쩡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곧이어 도착했다. 난 경찰들에게 갑자기 현관에 이런 게 떨어져 있다고 종이를 보여줬고, 경찰들에게 수사를 부탁했다. 하지만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짠 듯이 날 정신병자 취급하며, 무시하고 경찰서로 돌아가려고 했고, 어떤 경찰은 혼잣말로 나에게 쌍욕을 했다. 어안이 벙벙해졌고, 볼을 꼬집어서 꿈인가 생시인가 확인해보려 했지만, 놀랍게도 생생한 고통이 내게 전해졌다. 그리고 지금 난 이 종이를 앞에 두고, 혼자서 소금을 뿌리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내가 악귀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종이에 악귀가 붙어있는 것이 확실하다. “매일 엄마가 교회에 가자고 했을 때, 왜 안갔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순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고, 그리고 내 눈 앞에 가상현실처럼 카운트가 세진다.”10,9,8......2,1“
주마등이 뒤이어 스쳐갔고, 병실에서 일어난 나를 기계옷을 입은 간호사로 보이는 여성과 의사로 보이는 남성이 반겨준다. 그리고 남성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인다.” 대멸종 전의 세상은 어떠셨나요? 다른 분들과 달리 고객님은 돈이 많으시니, 또 여행 시간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시죠. 다음엔 용과 마법이 있는 곳을 준비해드리죠.“
<1497자>
요지: 대멸종 이후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가상현실에 빠져 사는 사람도 생기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그러한 상태가 아닐까?
첫댓글 매우 심오한 주제군요! 이 글을 몇번 읽어본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의 전하고자 하는 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비유하자면, 중생대에서 신생대 사이 암모나이트가 멸종하지만, 그 중에 살아가는 암모나이트가 세상을 발전시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군요. 대멸종 이후 살아남은 인간이 현실에서는 살아갈 의미가 없어서 가상 세계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즐기는 이런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가상체험할 돈 비틱 하시는거죠 정재훈씨?
정말 대단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이 글의 주인공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대멸종 이후 인간이 살아남아 가상세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몰입도가 굉장하더군요. 이 글의 주인공이 느끼는 정서가 제가 느끼는 정서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이 글에 칭찬을 드리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