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엄마였었지 / 조영안
이른 아침부터 까치가 그치지 않고 운다.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다. 기쁜 소식이 오려나 혼자 중얼거렸다. 어디서 날까 궁금해 마당으로 나갔더니 대추나무 위에서 짖고 있다. 하늘로 치솟아 찌를듯하더니 어느새 대추 무게에 못이겨 고개를 떨구고 있다.
처음 대추나무를 심는 남편한테 "왜 심어요? 집에다 심는 게 아니라던데."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데. 우리 이웃집마다 거의 심어져 있는데" 그러고 보니 곽샌댁, 배샌댁, 피아노 집 거의가 다 있다. 머쓱했던 내가 잔소리를 그만둔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다. 사과 대춘데 굵기가 기존 대추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크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지마다 많이 열려 그 무게에 못이긴다. 길 가다 담벼락 너머로 달려있던 이웃의 대추를 보고 은근히 부러워했었는데 나도 이제 대추 부자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 사이 대문 위 작은 옥상으로 옮긴 까치는 아직도 짖어댄다.
오늘은 까치를 만나서 인지 출근길이 가볍다. 막 대문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렸다. 진환이 엄마다. 반가운 마음에 받으니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광양에 '전통 숯불구이 축제'가 열린다든데 우리 가족이 놀러 가겠노라며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고 보니 24일부터 26일까지 축제 기간이다. "우리 가족'이란 말에 설마 하면서 진환이도 함께냐고 물었다. 그녀가 웃으며 당연하다고 한다. 의외였다. 어릴 적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홉 살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 벌써 22년 전이다. 아득했던 시간이다. 목소리는 들었지만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양 가슴이 두근두근 벌써부터 설렌다.
22년 전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 난다. 진환이 아빠 ㄱ은 당시 우리 가게 손님이었다. 학교 앞에서 작은 슈퍼를 했을 때다. 오전에는 어머님이, 오후는 내가 가게를 꾸려나갔다. 인사성 밝고 살가웠다. 고향이 인근 하동이라 더 가까워졌다. 남자아이를 혼자 키우며 열심히 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술에 의지하면서 힘들어 했다. 우리 아들이랑 나이가 같아 다섯 살부터 어린이집에 함께 다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다 보니 등 하원도 같이하며 친구가 되었다. 나는 작은 힘이나마 돕고 싶었다. 옷도 얻어서 아이 둘한테 입히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똑같이 나눠줬다. ㄱ은 일용직으로 일을 나갔다. 퇴근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놀다 늦을 때는 저녁까지 먹였다. 아이는 눈치가 빨라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아 눈살 한번 찌뿌린 적이 없었다. 결국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ㄱ은 읍사무소의 도움으로 삼천포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갔다. 오갈데 없는 아이는 고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어 임시로 우리가 맡게되었다.
진환이는 동글동글 야무지게 생겼다. 눈이 작았지만 항상 반짝이는 예쁜 얼굴이다. 나를 큰엄마에서 엄마로 눈치 빠르게 바꿔 부른다. 읍사무소에서 조회를 해 고모를 찾았다. 그런데 아이를 거둘 사정이 안 됐다. 위임장을 받아 순천 에스오에스 아동복지 센터의 보육원에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입소하는 날 두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어린이집으로 등원했다. 낮 11시경 보육원 관계자와 읍사무소 직원이 도착했다. 원장은 진환이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옷을 한벌 사 입혔다며 사용하던 물건들을 챙겨 왔다. 아이는 아무 사정을 모르는 듯 눈을 껌벅껌벅 거리며 내 옆으로 와 손을 잡는다. 내 눈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인다. 원장님도 뒤돌아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내가 쪼그리고 앉아 진환이 손을 잡고 "진환아, 좋은 곳에 가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 가면 친구들이랑 형아들도 많아"라며 꼭 껴안아 줬다. 나는 '미안해 미안해'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진환이는 떠났다.
그 후 주말이면 아들을 데리고 진환이를 만나러 갔다. 차츰 시간이 갈수록 거기에 적응이 되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그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남해로 휴가를 갔다. 돌아는 길에 ㄱ을 만나 진환이 이야기도 할 겸 삼천포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어컨 작동이 멈췄다. 차에 이상이 생겼나 하면서 달리는 데 에어컨 구멍사이로 연기가 나왔다. 모두 놀라 어머님과 두 아이는 언덕 위로 피신을 시켰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사천공항 소방서에서 신고와 동시 바로 도착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신고를 해줬다. 불길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소화기를 사용해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소방관들이 불을 껐다. 전소는 되지 않았지만 탈 수는 없어 정비공장으로 보냈다. 폐차를 시킨 후 연락을 받고 달려온 시동생 덕분에 집으로 왔다. ㄱ을 면회 못한 것이 내내 아쉽고 서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사건 이후 한 달쯤 ㄱ의 사망소식을 읍사무소 직원이 알려줬다. 천애의 고아가 된 진환이가 걱정되어 전화를 했더니 잘 적응하고 있다 한다.
그 후 나는 수시로 연락을 해 안부를 물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명절에는 집으로 데려와 지내다 보내곤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 겨울에 낯선 전화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으니 경상도 억양의 여자였다. "현이 어머니 되시죠. 저 진환이 엄마예요." 네?" 놀라서 묻는 내게 자초지종 이야기 하면서 지금 진환이랑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한다. 그새 훌쩍 자란 아이는 엄마손을 잡고 왔다. 반가워 꼭 안아줬다. 단아한 모습의 그녀는 진환이를 많이 닮았다. 내 두 손을 잡고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 아이 고모를 통해 읍사무소에서 연락을 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아직 혼자며 친정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단다. 보육원에서 절차를 밟고 마산으로 데리고 간다 했다. 아이 표정도 밝았다. 다시 한번 꼭 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 약속이 오늘 지켜진다. 18년이란 긴 시간이다.
그 후 연락이 끊겼다. 예전의 번호는 011로 시작된다. 없는 번호로 나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어 앞 011은 010 바꾸고, 가운데 숫자 한 자 한 자를 앞자리 수로 맞춰 나갔다. 세 번째 3을 넣었더니 반가운 경상도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혹시 진환이 엄마세요?"
"맞는데 누구세요? "
앗! 진환이 엄마였다. 나는 솔직히 기분이 나쁘고 서운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연락을 하는데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혼을 했으며 진환이는 창원 공단에서 근무한단다. 나한테 연락을 하고 싶어도 그녀 역시 010으로 바뀐 내 번호를 몰랐단다. 나는 슬며시 혹 아이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더냐고 물었다. 그런데 고개를 저으며 어렴풋이 생각난다며 회피를 하더란다. 아마도 영리한 아이니까 그때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 후론 가끔 연락하며 지내는데 갑자기 온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스물아홉의 진환이는 의젓한 청년이 되었다. 어릴 때는 왜소하고 연약했는데 키도 크고 덩치가 장난이 아니다. 올려다보며 나를 알아보겠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시죠'라며 웃는다. 그녀의 남편과도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진환이 엄마 역시 밝은 얼굴이다. 아들이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가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어릴 적 그토록 마음 아파하며 잘해 주셨는데 이제는 기억을 못 하신다. 이 자리에 우리 아들도 함께였으면 좋으련만 아쉬웠다.
주말이라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오늘 축제의 주인공 '쇠고기 숯불구이'를 먹었다. 무르익은 축제장 분위기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진환이가 아들 번호를 물어 가르쳐 줬더니 통화를 한다. 서로 어색한지 아님 지나간 기억을 더듬는지 통화가 길어 진다. 철이 들었을까 아니면 어릴 적 기억이 났을까 진환이가 꼭 한 번 오고 싶어 했단다. 정말 대견스럽고 오지다. 살아오면서 제일 잘한 일이라며 마음속에 간직했는데 오늘은 그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비록 미약하나마 진환이의 성장에 밑거름이 돼 준 나 자신한테 칭찬을 해주고 싶은 밤이다.
첫댓글 감동적인 사연이네요. 어려울때 손길을 주셨으니 평생 잊지 않겠어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제 진환이를 만나고 나니 아! 내가 잘 해냈구나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대단한 일 하셨어요. 아이가 세상을 따뜻하게 볼 수 있도록 손길을 내밀고 관심을 가져 주셨기에 진환이 바른 성장을 했으리라 여겨 집니다. 세상은 선생님처럼 좋은 분들이 계셔서 잘 돌아가는 듯합니다. 제가 다 고맙습니다.
그때는 못느꼈는데 지금은 뿌듯하네요. 이게 나이가 들어 그런가 봅니다. 그때는 그래도 젊었거든요.하하
고맙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맞벌이 부부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30분에서 한 시간 가량의 손 빠진 시간의 아이 돌봄이랍니다. 진환이에게 생긴 위기의 순간에 손 내민 선생님이 있어서 그 순간을 잘 이겨냈네요. 장성한 청년을 보면서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글로만 읽어도 그 감정이 전해옵니다.
처음엔 혼자가 된 아이를 보면서 막막했거든요. 어머님이 많이 보살펴 주셨답니다. 토요일 도착해서 할머니부터 찾았는데 못알아 보셔서 안타까웠네요. 그날 서천 불고기집에서 진환이가 한턱 내 맛있게 먹었어요. 아들처럼 든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잘했어요. 짝짝짝! 그 너른 마음을 배워야겠어요.
짝짝짝! 고밉습니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하겠어요.
아무나 못하는 일을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그 보살핍이 힘이 되어 진환이가 올바르게 성장했을 겁니다.
네. 천성이 타고난 아이예요. 떠날때 눈물을 글썽여도 흘리지는 않더군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언제쯤 선생님처럼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제나 마음뿐이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 저도 그래요. 그때는 젊음이 도전의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엄두도 못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뿌듯하셨겠어요.
의젓한 청년이 되어 만나니 제가 왜소한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멋진 아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