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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굴러다니는 USB를 열어보니 오래전에 써둔 글 몇 편이 있길래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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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지는 언어 질서
요즈음 사람들이 우리의 고대소설이나 혹은 서양의 세익스피어 극을 대하면
그 현란하고도 적확한 언어의 사용법에 새삼 매료될 것이다.
장황하면서도 절제된 감정의 표현도 그렇거니와 인간관계를 규정해내는
어휘의 다양하면서도 간결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문학작품에서 언어의 사용법에 매료되거나
그로 인해 머리가 숙여지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과거에 비해 퇴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대가 흐를수록 언어의 사용이 더욱 세련되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표현이 미숙해지고 심지어는 법칙에서 벗어날 정도로 거칠어지고 있는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말로 전달해야하는 인간관계가
이제는 전화나 문자 메시지 따위들로 다양해진 까닭일까?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가 생활화되면서부터
소위 옛날 면서기들의 멋들어진 펜글씨가 실종된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이제는 인터넷상에서 통용되는 젊은 세대들의 채팅 용어가 안고 있는
언어의 무질서는 아예 언어 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파괴성과 맞닿아 있다.
이렇게 언어 질서가 헝클어져 가는 사회적 현상을 앞에 두고
언론과 각종 교육기관은 당연히 대대적인 국어 순화가 아니라
교정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법칙에서 벗어난 언어사용의 예를
대략 생각나는 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 <피로회복>에 대한 단상
피로회복하면 단번에 박카스와 같은 드링크류나 레모나 같은 상표가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이런 상품들을 선전하면서 피로회복이란 단어를
우리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으로 퍼뜨려놓은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驛前앞>, <草家집> 등을 예로 들면서 의미의 중복사용에 대한,
소위 언어의 질서 위반 사례를 지적해왔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워낙에 사용빈도가 높다보니
역전앞이나 초가집은 그대로 굳어지는 현상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실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전앞이나 초가집 정도는 그래도 의미의 중복이라는 단순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피로회복은 뭔가?
피로가 회복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 사회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피로는 소멸되어야지 회복이 되면 죽는다.
소멸이 안 된다면 최소한 추방이라도 시켜야지 피로를 회복해서 어쩌겠단 말인가?
피로가 누적되면 안 되는 줄은 알면서도 피로가 회복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따지지 않는
우리의 언어 습관, 이걸 어떻게 보아 넘겨야 할 것인가?
2.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마지막 서술은 <이다>, 혹은 <아니다>여야 한다.
<그렇습니다>,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다>로 마무리해야 한다.
하다못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따위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 >안에 표기된 판단은 당연히 생각의 결과이다.
그러하다라고 생각을 한 연후에 <그렇습니다>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위로
자신의 생각의 결과를 또 한 번 생각한다고 중언부언하는가?
요즈음 어떤 모임이나 토론회를 보더라도 연사들은 한결같이 한 문장을 끝낼 때마다
<....라는 생각이듭니다> 아니면 <......같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따위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공영방송의 뉴스 보도를 하는 중견 앵커조차 <....라는 생각이 들어갑니다>라고 하고 있으니
어안이 막힐 지경이다.
생각이 무슨 콧물쯤이나 되는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게?
3. 같아요........
<...인 것 같다>는 어떤 사안을 추정하거나 비교하는 형태의 서술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본질에 맞추어서 <같아요>를 사용하지 않는다.
영하 10도의 강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젊은이에게
오늘 날씨가 어떤가 라고 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이 <추운 것 같아요>이다.
비가 오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비가 오는 것 같아요>이다.
문제는 이 ‘같아요’ 용법을 전 국민이 거의 다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어째서 영하 10도의 날씨면 <불알이 오그라들 정도로 춥다>고 확신에 찬 표현을 못하는 것일까?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보며 <우리 집 얼룩이 오줌줄기보다 더 세다> 정도로
운치 있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따위의 표현은
거의 정신박약 수준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전 국민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다는 현실은 사실 끔찍한 것이다.
4. 너무 너무 감사드리고요, ......에게도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이 표현은 요즈음 텔리비젼에 출연하는 소위 MC들의 입을 통해서,
아니면 각종 시상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에 겨운 수상자들로부터
빠짐없이 들을 수 있는 흔해빠진 수사법이다.
도대체 감사하고 싶은 마음을 왜 <너무>라는 부정적 의미의 부사를 동원하여 강조하는가?
<너무하다>는 것은 <잘했다>가 아니고 <잘못했다>의 뜻이다.
너무 욕한다, 너무 때린다, 너무 못살게 군다, .......와 같이
행위의 정도가 심함을 강조하는 부사이지 그 행위의 올바름을 강조하는 부사가 아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넘치면 <매우 감사하다>라고 할 것이지
<너무 감사하다>는 제대로 된 용법이 아니다.
게다가 <너무 너무 감사하다>라니.....
그건 그렇고 어째서 감사드리고요, 식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대상을 주욱 나열하고 있는가?
그렇게 나열하는 심성이 정말로 감사드리고 싶은 심성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정 감사의 대상을 나열하고 싶으면
<아버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단락을 지어서 정중하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형님에게 너무너무 감사드리고요, 형수님에게도 너무너무 감사드리고요,
조카도 너무 감사드리고, 삼촌도 너무 감사드리고요,
저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도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한다면
여기에 언급이 된 감사의 대상들은 아무리 너무를 반복해서 감사한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매금으로 언급이 되는 바람에 불쾌할 지경이다.
5. 제 말씀은?
이미 높임말의 정확한 사용은 벌써부터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말의 자랑인 경어법은 얼마 안 가서 그 형태를 보존하기가 어려울 상황에 놓여있다.
요즈음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학자나 위정자들의 입을 통해서
거침없이 높임말이 잘못 쓰여지는 말 중의 하나가 <말씀>이다.
흔히 자신의 말을 가리켜 <제 말씀은.......>이라고 표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아찔하게 만든다.
말씀은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의 높임말인 명사인 동시에 말씀+드린다를 합쳐서
상대방에게 자신이 말하는 것을 낮추는 동사인 것이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을 상대방에게 말씀이라고 하면
자신의 말을 스스로 높이는 것으로 당연히 불손한 표현이 된다.
<제 말>은 <내가 하는 말은>으로 해야 옳으며
굳이 자기를 낮추어서 <제>로 해야 할 처지이면
<말>도 형용사를 붙여서 <드리는 말씀>으로 낮추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는 능란하게 사용하면서
어째서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 이 간단한 표현이 제대로 안되는지......
6. 의식화교육, 자율학습,
한때 의식화교육은 중대한 사회적 범죄로 여겨졌다.
실제로 의식화교육을 했다고 하여 교사들이 구속되는 일까지 있었다.
의식화교사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의식화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반대인 <무의식화 교육>이
올바른 교육으로 그 뜻이 역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무의식화 교육, 아이들을 아무생각이 없도록 가르치는 교육은
사실은 교육을 포기한 중대한 범죄가 아닌가?
의식화교육이 범죄행위라면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가르치면
가장 훌륭한 교육이라는 셈인데 이거야말로 언어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훼손한 경우인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본질이 바로 의식화인데 그 본질을 외면한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이다.
생각을 잘못하면 곧바로 언어사용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선생님, 오늘 자율학습 합니까? 안하면 안 됩니까?
이런 질문은 이미 전국 고등학생들의 입에 버릇처럼 달라붙은 대표적인 질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기관에서 전국적으로 자율의 뜻을 공개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스스로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자율학습의 실시여부를 타인에게 물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자율은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을 것인지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7. 스승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스승이 훌륭하다면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라고 캠페인을 벌이지 않더라도
저절로 존경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스승이 스승답지 못하면 아무리 존경하라고 강요한들
존경이 우러나오겠는가.
존경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은 결과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존경심은 인간의 정서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을 어찌 타율로 강제하겠다는 것인지......
존경실시! 네. 존경하겠습니다.
존경 중지! 네, 곧 멸시하겠습니다.
이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는가?
올바른 언어사용은 올바른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언어 질서가 헝클어진 현상은 논리적 사고방식의 결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언론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논리적 사고의 생활화를 위해
대대적인 교정 작업을 시급히 시작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