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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꾸는 세 가지 생명언어
골로새서 4:2~9
어떤 사람이 조기를 사려고 생선 가게를 들렀습니다. 이 사람은 싱싱한 조기를 고르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뒤적이다가 심지어 조기 한 마리씩을 들고 냄새까지 맡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생선가게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보쇼, 살려면 빨리 사고, 안 사려면 빨리 나가쇼! 그렇게 오래 머무르더니 이젠 냄새까지 맡는 게요?” 주인장의 면박에 손님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귓속말로 이 생선에게 뭘 좀 물어봤소.” 주인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생선에게 뭘 물어봤다 말이오?” “바다 소식을 물어봤소.” “그래요? 생선이 뭐라고 대답합디까?” “네, 생선이 하는 말, 자기가 바다를 떠난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최근 소식을 잘 모르겠다는데요?” 사실 이 가게의 생선들은 너무 오래되어서 상한 것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주인은 손님이 재치 있게 대답하자 그 조기뿐만 아니라 덤으로 조기 한 마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옛말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킨다(전 10:12).”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연말만 되면 느끼게 되는 것은 참 세월이 빨리 지나간다는 겁니다. 엊그제 2014년 1월 1일을 연 것 같은데, 벌써 12월 31일을 사흘 밖에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과 점심식사를 하는데, 제가 벌써 올 한해가 다 지나가버렸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교회는 교육기관 여름행사만 끝나면 1년 다 지나간 겁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께서 50대 후반이신지라 그렇게 느끼신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점에서는 저와 동일했습니다.
미국의 맹건(Mangan)이란 신경학자가 시간을 알아맞히는 실험을 했는데요. 그는 실험 대상자들을 젊은이 그룹과 노인 그룹으로 나누어 속으로 3분의 시간이 지났다고 느낄 때 각자의 손을 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실험결과가 재미있어요. 젊은이 그룹은 3분 중에서 평균 2분 57초, 그러니까 3초가 모자란 3분이 되자 손을 들었고, 노인 그룹은 똑같은 3분인데도 평균 40초가 지나니까 벌써부터 3분이 지났다고 손을 든 겁니다. 똑같은 3분인데도 젊은이들이 느끼는 3분과 노인들이 느끼는 3분 사이에는 꽤 많은 차이가 있는 셈이지요. 이 실험을 통해 젊은이들에 비해 어르신들이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이 증명된 것인데요. 오늘이 2014년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인데요, 여러분은 올 한해를 지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마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겠지요? 목사로서 교회적으로는 올 한 해가 무척 기쁘고 감사한 한 해였습니다. 목사로서 여러분을 목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또 올해 우리들이 그토록 기도하고 염원하던 교육관을 마련한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드린 작은 헌금이 마중물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큰 역사를 보았습니다. 교육관을 마련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목격한 것이지요.
저는 올 한해를 보내면서 내 인생을 바꾸는 세 가지 생명언어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최근에 저는 새벽마다 골로새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내 인생을 바꾸는 세 가지 생명언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 결산한 것들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 저는 우리들의 언어생활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생명언어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절 앞부분에서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에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비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불의한 재판장 앞에 자주 나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던 한 과부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기도를 들어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 과부가 권세가 있어서였습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가진 돈이 많아서였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과부는 내세울만한 돈도, 권력도,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힌트를 재판관은 혼자 속으로 이야기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누가복음 18장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도를 응답받기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기도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시간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헌신이 밑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기도는 시간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먼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이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실의 문제입니다. 기도처럼 시간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옳은 말 같지만, 그러나 바른 말은 아닙니다. 기도할 시간을 내어서라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기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기도만큼 확실한 성공의 전략이 없기 때문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그 유명한 책 제목처럼, 우리는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과부가 자신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자주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갖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찾아가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밤이건, 낮이건 우리의 기도생활은 24시간 가동되어야 합니다. 물론 24시간 동안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머무는 곳에서, 그곳이 학교이던, 직장이던, 아니면 가정이던, 장소와 상관없이 여러분은 얼마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없다면 침묵으로라도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오시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기도를 계속하고 깨어 있으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를 계속하라”는 구절을 영어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성경으로 보았더니 그곳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Devote yourselves to prayer” 이것을 직역하면, “여러분 자신들을 기도하는 일에 헌신시키십시오.” 이런 뜻이 됩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일을 ‘헌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헌신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가장 큰 헌신은 아마도 기도의 헌신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헌신’ 이 얼마나 거룩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한 과부처럼, 이 거룩한 헌신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권력이 없어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건강이 좋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헌신이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라면, 누구든지 시간만 내면 할 수 있는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 헌신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중요한 자리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중요한 시가에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을 보시고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내어 그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청년들과 함께 하는 2박 3일 간의 금식수련회가 분명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시험을 이기는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금식하는 일이 두렵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수 있기에 우리가 순간순간 성령님을 의지한다면 오히려 금식기간 내내 피곤하지 않고 강건함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어느 목사님과 대화하다가 제가 그 목사님께 40일 금식기도 기간에 힘들지 않았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의외로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이 40일 금시기도를 작정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대전에 어느 대형교회에서 목회자들 대상으로 열린 집회에 참석하셨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자신에게 40일 금식기도를 하라는 강한 감동을 주셔서 특별한 기도제목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그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 40일 간 금식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거나 하지 않고 그저 평상시에 지내시던 교회 목양실에 자리를 깔아놓고, 그것도 성도들과 함께 매일 새벽마다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성령께서 도우셔서 그 기간이 정말 힘들지 않게 지나갔노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일에 나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감사가 넘치고, 깨어 있는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어느 분이 우리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다며 제게 새해 기도제목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도제목을 정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제목을 읽어드릴 때 여러분들도 기억하시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2015년 하늘사랑교회의 표어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엡 2:22)"가 되게 하소서.
둘째, 교회를 섬기는 김규태 담임목사와 가정이 평안하고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셋째, 현재 청장년 25명, 어린이 10명이 출석 중인데, 새해에 전도의 문이 열려 예배출석 인원이 2배 이상 늘어나게 하소서(청장년 50명, 어린이 25명).
넷째, 새가족반, 일대일 제자 양육반, 목장모임 등을 통해 헌신된 평신도 리더 들이 세워지게 하소서.
다섯째, 2015년에는 교회 재정자립의 기초가 놓여져 2016년도에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완전히 자립하게 하소서.
저는 이러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내일부터 2박 3일간 진행되는 DFC금식수련회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각 가정에서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생명언어는 복음의 언어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지금 로마의 차디 찬 감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속히 감옥에서 풀려나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기도제목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은 과연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장 26~27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해야 할 비밀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그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밀을 맡은 자에게 있는 책임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어느 과학자가 지금 아프리카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약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유일한 치료약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치료약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과연 이 과학자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과학자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가지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책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가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4절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입술에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 즉 복음의 언어가 나와야 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비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은 몇 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셨습니까? 그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더라도, 여러분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신년에는 우리교회에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기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예비 된 영혼을 만나도록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이 좋은 일이던, 좋지 않은 일이던 예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찾아와 여러분을 칭찬하거든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계셔서 이런 좋은 결과가 난 것입니다. 당신도 저와 함께 예수님을 믿으시지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고했지만 결과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게 나왔을 때에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과정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했고, 주님은 이런 저를 반드시 축복하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 장만 거꾸로 넘겨보면, 골로새서 3장 17절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권면이 나와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말이 되었건, 일이 되었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주님의 일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하고 일한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입술로 하는 것이고,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하는 전도이건, 삶으로 하는 전도이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 즉 복음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생명언어는 위로의 언어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이겠어요? 만약 우리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데, 소금이 빠졌거나 아니면 반대로 음식에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도 적절한 양의 소금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상황에 맞는 말,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나 은혜롭지 못한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깨트리게 됩니다.
잦은 부부 싸움을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 아내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해 주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새해부터는 서로 좋은 말 하며 살아요.” 그랬더니 남편이 눈을 크게 뜨고는 이렇게 되받아쳤습니다.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어야 좋은 말이 나올 거 아냐?”
남편이 잘 모르는 게 있지요? 좋은 말 하게끔 만들어 주어야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꾸 부부끼리 좋은 말을 많이 해 주어야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특별히 바울은 우리의 입술에서 위로의 말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절부터 9절에서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목적은 감옥 안에 갇혀 있던 바울의 사정을 그들에게 알려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위해 염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두기고와 오네시모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서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지개 원리」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존스 홉킨스병원 소아신경외과 과장인 벤 카슨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에 성공한 의사다. 국내에도 소개된 "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그는 흑인 빈민가 출신의 열등생에서 세계 최고의 소아과 의사로 성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하루는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벤 카슨을 위로했던 어머니처럼, 골로새 교인들을 위로했던 바울과 그의 동역자 두기고와 오네시모처럼, 우리들은 모두 위로의 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송년주일을 보내는 우리들이 지난 한 해를 잘 반성하고 새로운 한 해를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언어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언어의 영성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도의 언어, 복음의 언어, 위로의 언어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이곳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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