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일>
본능 욕구와 본성 욕구
사람에게는 본성 욕구(자아실현 욕구, 자기가 되고자 하는 욕구 등)와 본능 욕구(생존 욕구)가 있는 것 같다. 태어나서 5세 정도가 될 때까지는 본능 욕구가 충분히 채워져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5세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5세 이후 또래 관계로 나아가기 전까지의 양육에서는 본능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어린 유기체가 생존 욕구에 충분히 안정감을 획득하게 되면 대략 6세부터 또래 관계로 자아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본능 욕구에 결핍이 생기면 본성 욕구가 활발하게 추구되어야 할 시기에 본능 욕구라는 장애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아동은 새로운 지평의 또래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본능 욕구에 매달려 성장하지 못한다. 새로운 내면 아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충분하지 못한 양육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조건화’된 강한 본능 욕구(생존 욕구)로 인하여 ‘자기실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감’이라는 본성 욕구로 나아가지 못하고 질곡 같은 삶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사람은 어린 유기체일 때와 성장 과정의 단계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진다. 생후 초기 인간에게 일차적인 조건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지만 성장 과정에 따라 그 이후 필요한 조건은 달라진다. 사람은 빵(생존 본능)으로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자기-SELF’를 찾는 존재다. 그러기에 어른이 된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유아적 ‘본능 욕구’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자기를 찾는 길’을 끝까지 가기 힘들다.
사실 충족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은 드물다. 많은 경우 각자 자기만의 독특한 ‘본능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의식적 ‘본능 욕구’에 의해 외부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본능 욕구’를 성찰을 통해 파악하고 알아차려 그 욕구에 휘둘리지 않으려 ‘자기 이해’를 도모하는 사람도 있다. ‘너 자신을 알라!’ 프로이트는 ‘자기 이해’를 통해 자아를 강하게 하라고 하였지만,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릴켈은 ‘내가 만약 나를 만난다면 거기에서 도망치고 말거야!’라고 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유익하지만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무척 고통스럽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상담장면에서 도망친다.
오늘 복음(마태 21, 28-32)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비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이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일렀단다. 큰아들은 ‘싫습니다.’하고 대답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가겠습니다.’하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너희 생각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이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시고자 하신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중략)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어찌하여 믿지 않은 걸까? 세리와 창녀들은 어찌하여 믿게 되었을까?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석 사제와 원로는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잘 알려진 바대로 ‘율법’에서 구원을 얻고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의인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원과 의인으로 인정받는 길이 하느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적어 넣은 작은 상자를 옷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는가 하면 성전이건 장터건 어디서든지 그들의 행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보다도 자신의 의지가 더 훌륭해 보였다. 이들에 비해 세리와 창녀들은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성전에도 자신 있게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죄인 취급하기도 했지만, 자신들도 스스로 단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누가 봐도 종교 지도자로서 완벽해 보였고 그들 스스로 역시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기 존재의 완전함과 의인성을 율법에서 찾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 가슴을 치며 자기 존재의 불완전함을 고백했고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며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기실현’과 전혀 상관없는 율법에 집착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괜찮은,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기실현’에 관심이 없으니 ‘하느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지 않을까? 이에 반해 세리와 창녀들은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을 향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과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차이에 있지 않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 세리와 창녀들의 차이는 ‘추구하는 것’의 차이에 있다. 세리와 창녀들이 꼭 죄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죄인인가 아닌가는 부차적 문제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몸부림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죄’는 ‘온전함을 해치는 결핍’이며, ‘죄인’은 하느님을 찾는 ‘부족한 인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덕망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제1독서는 악인이라도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면, 자기 목숨을 살릴 거라고 말한다.(에제 18, 25-28) 인간에게서 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서 악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악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부족한 곳에서는 ‘본능 욕구’가 춤을 추고 사랑이 충만한 곳엔 은총이 넘쳐 ‘자아실현’이 춤을 출 것이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를 통해(필리 2, 1-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라고 전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자아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자유로운 본성 실현을 위해
오늘의 이 걸음도 은총의 길로 가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