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경의 비밀(이스라엘 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제3성전
|
‘주와 같이 걷는 사람’ 선교사 이용규의 가족이 있는 서재
가족, 그리고 주님이 계신 내 마음의 서재
저는 계속 이사를 다녀서 제대로 편안하게 서재를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환경도 전부 불편한 환경이었고요. 그렇지만 제게 서재는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선 늘 가족들이 가까이 있는 곳에 제 서재가 있기 때문이에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서재라면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아무리 책이 많아도 저에게는 의미가 없는 곳일 뿐이죠. 아내의 이야기가 들리고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저에게 가장 편안한 서재이자 가장 좋은 서재예요. 또 한 가지 의미의 서재는 저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는 골방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자극이 있고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공간은 저에게 최고의 서재지요. 서재라는 곳은 꼭 책이 많아야 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앞에 단 한 권의 책만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저에겐, 가족이 있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그곳이 가장 좋은 마음의 서재지요.
약간은 겉멋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책읽기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약간 겉멋이 들었던 거 같아요. 학교에서 독서하고 토론하는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사적인 책이나 이런저런 대학교 때 교양서적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미리 접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때로는 좀 혼란도 있었어요. 저 스스로가 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별히 신앙적으로 예리하게 건드리고 찌르는 책들을 접하게 돼서 제 마음을 정리하느라고 애썼던 기억이 나네요.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든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책도 그랬고요. 그 당시에 많이 보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책도 생각이 나요. 그런 책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공감도 되면서 마음이 불편한 시간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신앙 서적을 읽어야 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저는 그러고 보면 참 신앙 서적을 안 읽었어요. 좋은 신앙의 고전들이 있는데 왜 그런 책들을 미리 접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제 책을 쓰고 난 다음에서야 책에 대해서 많이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어요. 아마 이제는 읽어야만 한다는 어떤 책임감도 있는 거 같고요.(웃음)
기독교 작가로서의 거룩한 부담감
사실 책을 많이는 못 읽어요. 그냥 어떻게 제 손에 잡히는 책들을 중심으로 읽고 있는데 보름에 한 권 읽는 것도 버거운 거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저를 ‘기독교 작가’라고 불러주시잖아요.(웃음) 그런데 막상 저는 세 번째 책(같이 걷기)을 쓰면서부터 ‘아, 이제 진짜 작가로서의 책임감이라는 것을 좀 가져야겠구나. 다른 책도 좀 봐야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된 거 같아요. 당혹스러운 것은,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제 글을 보면서 기독교 작가 누가 생각난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럼 저는 그때야 ‘그런 사람이 있구나.’하고 찾아보는 거예요. 얼마 전엔 제 글이 헨리 나우웬의 글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이름은 알았지만 정작 책은 제대로 못 읽었는데... 이제야 ‘예, 그렇군요.’하고 찾아보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책을 틈틈이 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나를 즐겁게 하는 책
책이라는 게 저한테 좋다고 해서 다른 분들한테도 항상 좋은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추천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사람을 소개할 때도 그래요. 둘이 잘 맞을 거 같아서 연결해줬는데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웃음) 책도 그런 면이 좀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책은 추천하는 책이라기 보단 최근에 저한테 좋았던 책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겠지만, 저 또한 김하중 장로님의 ‘하나님의 대사’를 즐겁게 봤고요. 김길 목사님의 ‘증언’, ‘사명’도 재밌게 봤어요. 김길 목사님은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지만, 그분의 풀 스토리는 몰랐었는데 이번에 책을 보면서 알게 됐어요. 그리고 김용의 선교사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은 아직 보진 않았지만 읽고 싶은 책이에요. 저하고는 다른 삶을 사셨는데 동일한 십자가 은혜를 경험하시고 고백하시는 모습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삶의 스토리 가운데 임하시는 공통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저한테는 되게 재미있는 탐색이에요. 좋은 리서치자료라고 해야 될까요?
결국, 제일 파워풀한 글은 삶의 정황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것들을 나누는 스토리라는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일하시는 방식을 보며 ‘아, 하나님 재밌네요! 멋있네요!’ 하고 감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책들을 보면 즐거워요. 그리고 저는 저와 생각이 비슷한 분들의 글을 보면서도 많이 감동해요. 뉴욕에서 역동적인 교회를 하고 계신 티머시 켈러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이분 책이 참 좋아요. 그중에서도 The Reason for GOD(살아 있는 신. 베가북스 2010)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나와 있으니까 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특별히 이 책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추신 분들에게 굉장히 좋은 도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 가장 많이 추천한 책
제가 제 책을 읽은 분들에게 최근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교제하죠?’ 하는 거예요. 이 질문은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분부터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초신자까지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에요. 어떻게 보면 교회 내에서는 가르쳐지지 않은 영역이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영적으로 갈급한 가운데 돌파구를 찾는 분들로부터 그런 질문들이 많았던 거 같고요. 그것을 제가 답하는 것보다는 누군가 이미 그것에 관한 글들을 쓰셨기 때문에 그 글들을 참고하는 게 더 좋겠다 싶어서 추천한 책이 있어요.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헨리 블랙커비&리처드 블랙커비의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 같은 책들이에요. 저는 기도하면서 누군가에게 묻고 확인받는 것보다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저 책들을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책
저에게 제일 중요한 책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제 교과서세요. 교과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그 도움을 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성경을 포함해서 신앙 서적들이 그때그때 저한테 영감을 주고 통찰력을 열어주는 거 같아요.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돼요.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라고 느끼기도 하고요. 책은 하나님과 제가 가까워지도록 굉장히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내 첫 번째 책, ‘내려놓음’의 탄생 비밀
제 첫 번째 책인 ‘내려놓음’이 나오고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나니까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주저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왜냐면 이 책이 사실 서구 독자들의 정서하고는 조금 안 맞아요. 서구식 글쓰기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뭔가 정의 내려져야 하거든요. 내려놓음, 그러면 내려놓음이 뭔지 정의하고 앞으로 쓸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돼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기존에 있었던 글들을 보고 그것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하고요. ‘여기서 나는 뭔가 새로운 걸 쓴다, 그리고 그것은 이렇게 전개된다.’라고 서론에서 딱 셋업을 하고요. 그러고 나서 본론에서 분석을 해주고 결론으로 가서 끝내야 되잖아요. 그래서 서구식 글쓰기에서 서론은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써요. 정리가 된 상태에서 써야만 하죠. 저도 그게 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믹 라이팅이거든요. 저는 계속 학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책을 쓰면서 제가 갖고 있는 그런 글쓰기의 틀을 깨야 하니까 되게 불편했어요. 소위 말하는 동양식의 글쓰기는 ‘일필휘지’라고 해서 처음부터 써내려가는 거예요. 매듭짓지 않고요. 그래서 ‘내려놓음’은 서론부터 썼는데 특별히 본론에 대한 길잡이는 아닌 거죠. 책을 다 쓰고 나서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은 맨 마지막에 붙였고요. 그래서 실은 제가 ‘내려놓음’에 대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쓴 책이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내려놓음에 대한 이야긴데... 근데 내려놓음이 뭐지?’하고 궁금해지신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이런 이유가 있었죠. 읽고 난 다음에 ‘내려놓는다는 게 뭘까?’라는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더 내려놓음’과 ‘같이 걷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기도 한데요.(웃음) 아무튼 서양식으로 내려놓음에 대해 책을 내야 한다면 제목부터 바꿔야 하고 완전히 다시 써야 할 거 같아요.
내 인생의 가장 친밀한 동행, ‘같이 걷기’
1. 독자들과 ‘같이 걷다’
‘같이 걷기’는 제목부터 이전 책들보다 훨씬 친근감이 있어서 거기서부터 위로를 받으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혹시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 다음 책은 혹시 ‘더 더 내려놓음’ 이면 어떡하나 하는 부담감을 갖고 책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도 같아요.(웃음)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같이 걷기’가 되니까 뭔가 선회된 듯한 느낌 때문에 결국 같은 내용임에도 제목이 따뜻하다는 이유로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셨어요. 많은 분들이 채움과 찔림,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의 주님이 깊이 만지시는 은혜를 경험했다고 하셔서 그저 감사할 뿐이죠.
2. 작가로의 인도하심, 은사
제가 이번에 책을 또 쓰면서 ‘책을 쓰는 은사’에 대한 생각을 해봤어요. 저는 책을 써야 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던 사람이고 작가가 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고 글쓰기 연습이란 걸 해본 적도 없는, 게다가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 이렇게 책을 쓰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인생에 책은 한 권이면 족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떻게 계속 다음 책들이 나올까 싶었어요.
잠깐 제가 책을 쓰는 패턴을 소개하면, 하나님이 제게 어떤 감동을 주시고 나서 한동안 부담감을 주세요. 부담감 가운데 불편함을 가지고 지내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안 쓰고는 못 견디게 되는 순간이 와요. 그 가운데 하나님이 싸인을 몇 번 주시죠. 그럼 한 달 동안 학교일 하면서 집에 와서 틈틈이 글 쓰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하나님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그렇게 해서 보통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 작업을 하면 책이 나오게 돼요. 이런 과정을 제가 세 번을 거친 건데 전에는 책을 쓰는 것에 있어서 그 사람의 지식과 경험, 사상 그리고 글 쓰는 훈련과 개인적인 노력의 영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글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쓰는 것이 ‘은사의 영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 거죠. 책을 다 쓰고 원고를 교정하는 차원에서 쭉 검토하고 있었는데 문득 하나님의 은혜가 글과 글 사이에 묻어 있는 거예요. 글을 보면서 평안과 감동이 오더라고요. 참 재밌죠. 제가 제 책을 보면서...(웃음) 근데 그게 내용에서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내용 때문이라면 제가 교만한 거고요. 그냥 좀 추상적인 얘기지만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글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느껴졌어요.
전에는 ‘저는 계속 글을 쓰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작가도 아닙니다’했는데 이번엔 조금 자세를 바꾸게 되더라고요. ‘하나님이 나에게 그 은사를 주셨구나. 그걸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또 이 은사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 은사를 나눠줘야 하는 거구나’하고요. 이 책을 마무리하고 나서 든 생각은 이제 ‘내려놓음’에서 시작한 얘기가 일단락됐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또 글을 쓰게 된다면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조금 더 학문적인 글을 쓰거나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 조금 더 특수계층을 상대로 한 소수를 위한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
3. 하나님과 같이 걷는 비결 1, 기도
제가 생각하는 기도는 조금 더 포괄적인 거예요. 기도는 보통 골방에서 무릎 꿇고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는데요. 근데 ‘골방’이라는 개념의 폭은 좀 더 넓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지방 혹은 외국으로 전근을 보내셨다든지 사람들과의 교제를 다 끊어 놓으셨다든지, 아니면 스스로 괴로워서 어딘가에 들어가서 조용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을 때가 있잖아요. 그게 그 사람의 골방일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구별된 공간 속에 넣으시거든요. 그게 광야라고도 볼 수 있죠. 근데 그 ‘광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아요.
다시 말하면,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인 거죠. 저는 그곳을 골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하는 곳. 기도에는 우리의 탄식도 포함돼요. ‘하나님 나 어떡해요. 나 이제 어떡해요.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하는 탄식 같은 거요. 또, ‘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게 좋으세요?’하는 내 안에 하나님을 초청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기도예요.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하고 초청하는 그 모든 시간이 어떻게 보면 연장선에 있는 기도인 거죠. 실제적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물론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정하기보다는 삶의 많은 영역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을 초청하고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할 때에 골방에서의 기도 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린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겐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거든요. 물론 하루에 2시간씩 기도하면 정말 좋아요. 그렇지만 어떤 특정한 삶의 환경 속에서는 그 시간이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간혹 어떤 분들에겐 변명이기도 하지만요.(웃음)
그런 경우에 잠을 줄여서 기도해야 한 다기보단, 삶 전체를 기도 시간으로 만들어 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운전하는 시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동안에도 하나님을 초청할 수 있어요. 가요를 듣는 것도 좋지만 ‘이 시간 동안 제가 하나님을 특별히 누리길 원합니다.’하면서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하나님 참 멋있으세요. 하나님 오늘 저하고 데이트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초청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해서 사귀는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기도의 확산이죠. 그게 전 삶의 영역으로 확대돼야 해요. 그러다 보면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하면서 배우자한테 뭔가 말을 한마디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딱 브레이크 거시는 걸 느끼게 되는 거죠. ‘하나님, 뭐가 문제일까요? 하나님, 전 지금 확 쏟아 붇고 싶은데요.’하는데 뭔가 불편한 거예요. 하나님이 마음에 부담을 주시는 거죠. 그때 침잠하면 하나님이 말씀해주실 거예요. ‘너는 어떤데?’ 하나님이 한 말씀 하시면 정리가 돼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오히려 화를 돋우거든요.(웃음) 결국 ‘이게 우리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나님과의 문제였구나.’하고 느끼는 거죠.
이게 기도예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개입시켜 드리는 거죠.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에 많이 간섭해주시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친해지는 거고요. 결혼생활을 해도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남편을, 아내를 누리기가 쉽지 않아요. 그냥 같이 사는 거죠. 그건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같이 있는 거죠. 그건 누리는 시간이 아니거든요. 그건 의식적으로 자기가 그 속에 몰입하는 것이 필요해요.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 눈에 안 보이고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자칫하면 그냥 잊게 되기 십상이죠. 그래서 영적인 감각을 키우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고 그분을 초청하도록 집중하는 시간들을 계속 가져야 해요. 그럼 조금씩 조금씩 그 영역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 거 같아요.
4. 하나님과 같이 걷는 비결 2, 성경 말씀
제가 선교사니까 다른 분들보다 성경 읽는 것이 쉬울 것으로 생각하실지 몰라요. 그런데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요.(웃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한테 ‘너 이제 성경 좀 봐라’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너 선교사 아니니? 성경 좀 봐라. 말씀 전해야 되는데...’ 하시면 ‘이제 좀 볼게요.’하고 성경을 보죠. 보면서 ‘원래 이렇게 성경이 재미없었나요? 갑갑한데...’ 그러죠. 제가 문제예요. 그만큼 둔감해져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성경을 읽는 습관도 중요해요. 하나님은 건조한 책읽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일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성경을 읽는 것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 노력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하나의 종교행위나 습관이 돼서 ‘내가 오늘도 무지무지 노력해서 다섯 페이지를 읽어냈어.’하는 자기성취를 위한,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든지 ‘하나님 나도 최소한 할 건 했습니다. 이제 좀 내버려둬 주십시오.’하는 차원의 읽기라면 도움이 안 될 수 있어요. 그런 읽기는 읽은 시간에 비해서 유익한 시간이 안 되기가 쉽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무엇보다,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필요해요.
말씀 읽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함이 있어야 돼요.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영광과 마주할까?’하는 마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해요.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성품, 그리고 나를 향하신 뜻... 중요한 건 내 삶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은 늘 당신을 알리고 싶어 하세요.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닮아갈 테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읽어야 하죠. 성경은 그냥 글이 아니니까요. 연애편지 읽는 기분으로 읽어야죠. 연애편지 읽으면서 무미건조하게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설령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받은 것일지라도 ‘내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모습을 아름답게 느꼈습니다’하는데... 집중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죠. 성경을 이런 마음으로 읽는다면 일독표 같은 건 만들 필요가 없어질 거예요. 연애편지 읽는데 단숨에 읽어버리지... 오늘은 얼마만큼 읽었다고 체크하면서 읽으시는 분이 어딨겠어요.
불편한, 그러나 나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
저를 제일 설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절절한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시는 말씀이에요.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 남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런 말씀들이 우리를 회복시키죠. 그런 반면에 제가 읽기를 애쓰고 즐겨하는 것은 오히려 저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인데요. 신앙성장을 하려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즐길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성경 말씀을 보다 보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래도 그것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말씀이 풀려지고 결국엔 상쾌함이 오는 순간이 있어요. 그게 저를 기쁘게 해요. 그 불편한 부분들을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은 정말 꼭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시간은 자신 안에 있는 결박을 푸는 시간이에요. 각자 마음속에 그 무엇이 스스로를 유익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집착인지 모르고 붙들고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것이 말씀과 부딪히는 거고요. 근데 그것 때문에 결국 더 힘들어져요. 그게 말씀 안에서 풀려야만 진정한 자유로움이 생기게 되거든요.
기도의 동역자님께
사실 저는 제가 받은 사명이 뭔지 아직도 잘 몰라요. 하루하루 그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가는 거예요. 아직 하나님이 다 안 가르쳐주셨어요. 어느 정도 더 가다 보면 좀 더 분명해지겠지요. 다음 행보에 대해서 물어도 하나님이 안 가르쳐주실 때가 많아요. 막판까지 기다리게 하세요. 제가 아직 훈련이 덜 끝난 것이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늘 생각하는 두 가지 기도제목이 있는데요. 하나는 제가 좀 더 포근하고 편안하고 밝은 모습으로 나이 들었으면 하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도 아내와 늘 손잡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동행했으면 하고요. 늘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주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과 함께했던 삶의 온기를 들고, ‘주님, 당신이 나와 함께 이렇게 걸어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고 ‘저 자신은 부끄럽지만, 당신이 저에게 해주셨던 그 놀라운 일과 그 큰 사랑을 가지고 당신 앞에 이렇게 섭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주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출처:삶과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