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림(宋世琳)
[문과] 연산(燕山) 8년(1502) 임술(壬戌) 알성시(謁聖試) 1등(一等) 1[壯元]위(01/1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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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헌중(獻仲)
호(號) 취은(醉隱)
생년 기해(己亥)【補】(주1) 1479년 (성종 10)
합격연령 24세
본인본관 여산(礪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능성현령,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헌중(獻仲), 호는 취은(醉隱)·고은(孤隱)·고송(孤松)·눌암(訥庵).
송계성(宋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복리(宋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송연손(宋演孫)이며,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가 되고, 1502년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상을 당하여 초상 중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벼슬에 오르지 않아 갑자사화를 면하였다. 이 때문에 스스로 ‘취은’이라 호하였다.
이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16년(중종 11)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재직 중 방납(防納) 폐단의 제거, 책 인쇄로 인한 과중된 잡세(雜稅) 폐지, 군액(軍額) 충당을 위한 중[僧]의 추쇄(推刷:세금수취의 인정단위가 될 수 있도록 일반 백성으로 환속시킴)와 절[寺]의 소각, 우전입마(郵傳立馬:역참의 말을 길러 공용에 이용하던 제도)의 폐에 대한 개선 등을 내용으로 한 지방행정제도 개혁안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 상소로 중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벼슬도 가자(加資)되었다.
뒤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하였다.
당대 문명을 떨쳤고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에 제향되었으며,저서로는 『어면순(禦眠楯)』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세림(宋世琳))]
[이력사항]
선발인원 14명 [一等1‧二等4‧三等9]
전력 진사(進士)
관직 교리(校理)
문과시제 책문(策問)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송연손(宋演孫)
[조부(祖父)]
성명 : 송복리(宋復利)
[증조부(曾祖父)]
성명 : 송계성(宋繼性)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보첨(金甫添)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강삼(姜參)...염근리 우승지 참조...23.0725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2]
성명 : 조온(趙溫)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송세형(宋世珩)[文]
[주 1]생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460년(세조 6)∼1508년(중종 3) 4월 5일.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선원(善源),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옹동면 출신이다.
증조부는 송희(宋禧)이고, 조부는 송계성(宋繼性)이며, 부친은 송복리(宋復利)이다. 외조부는 정숙관(鄭淑琯)이고, 처부는 부령김씨(扶寧金氏) 김보칠(金甫漆)이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벼슬은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곡성현감(谷城縣監)을 거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시에는 중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부(師傅)였던 인연으로,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다.
1508년(중종 3)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아가 관아에서 별세하였다.
1545년(인종 1)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여원군(礪原君)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장(文章)‧시화(詩畵)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사(詩詞)에 뛰어나 「호남별곡(湖南別曲)」 10장(章)이 많이 불리워진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선전관(宣傳官) 송세구(宋世球)‧교리(校理) 송세림(宋世琳)‧이조판서(吏曹判書) 송세형(宋世珩)이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전라문화의 맥과 전라북도인물
정읍군지
沖齋先生文集
태인지
『企齋文集』 卷3, 碑銘○墓誌, [贈吏曹判書礪原君宋公神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