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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3.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롬6:1-7)
1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2 By no means! We are those who hav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3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4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5 For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a resurrection like his. 6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ruled by sin might be done away with,[a]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7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set free from sin.
*은혜
스데반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더니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살기 등등하게 다메섹을 오르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4,5)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지금 네가 나를 돌로 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이 무슨 벌이라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생각도 못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바울을 예수님의 특별한 그릇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1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행9:15)
그는 그 은혜를 받더니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을 내려올 때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바울은 목숨 걸고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반역자를 사도로 부르신 그 은혜의 사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한 바울이 율법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실천을 통해 선에 이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오히려 법 때문에 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20.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로 사람을 지배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롬5:20,21)
바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은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감히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의미를 완전히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혹은 왜곡한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그 은혜를 받아보자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대자를 불러 그의 그릇을 삼으셨습니다.
그들 역시 더 큰 범죄를 통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1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은혜 받은 이후
사람에게는 모든 길이 열려있습니다.
살기등등하게 다메섹을 오르다가 하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은 자신에게 핍박을 당하는 중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바울이 그 만남 후에 이전의 삶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은혜의 사건이 살아왔던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2 By no means! We are those who hav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No
우리는 수많은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수많은 예상 문제를 풀었습니다.
시험 준비란 시험 보기 전에 답을 미리 아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답을 아는지 확인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명료하게 답을 내립니다.
No!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답을 명확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은혜는 명확히 다른 삶을 요구합니다.
*죄에는 죽은 사람
죄의 삶이 그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헤리코 박터 균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정말 독한 약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을 장기간 복용했습니다.
그 약 덕에 내 안에 있던 모든 균이 박멸된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 균으로 인한 질병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균이 없는 다른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죄라는 균이 내 안에서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 다른 현실을 맞은 것입니다.
김익두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낙담했는데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가 결국 사업을 하다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줄줄이 일어난 일로 그는 난봉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안악골 호랑이로 불렸습니다.
그의 폭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가 소안련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벧전1:24,25)
삶에 허무함을 느끼던 그에게 이 말씀이 영원한 것에 대한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갈증으로 신약 성경을 100 독했습니다.
신학을 해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여름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산을 넘다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잠시 지친 몸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늘진 바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술 취한 친구가 목사님께 나타났습니다.
그는 대뜸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하며 목사님께 주먹질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뜬금없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 다음 목사님이 그의 손을 딱 잡으며 한 마디 했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 소리에 깡패가 제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입니다.
"당신 누구요?"
"안악골 호랑이라고 불렸던 김익두 몰라?."
“내가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당신은 오늘 장례치를 뻔했어, 알아?"
그는 벌벌 떨면서 "아이고, 목사님. 나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했습니다.
목사님은 "뭘 어떻게 해? 날 따라와야지!“
그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일주일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설픈 깡패가 나중에 장로님이 되었답니다.
은혜받은 목사님은 이미 안악골 호랑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안악골 호랑이는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3.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3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세례
배추 애벌레는 손가락 두께쯤 됩니다.
그것이 배춧잎 위를 꼼지락거리며 기어다닙니다.
배춧잎을 갉아 먹으면서 뒤로는 동그란 똥들을 수북이 싸놓고 갑니다.
아랫집 배추를 보니 숭숭 구멍 뚫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탈바꿈하면 나비가 됩니다.
그 나비는 더 이상 배춧잎을 갉아 먹지 않습니다.
꿀을 빨아 먹고 삽니다.
하늘 위를 날아다닙니다.
나비는 아마 똥도 안 쌀 것입니다.
세례란 바로 그 탈바꿈입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에게서 그 애벌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애벌레는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연합
그런데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 세례입니다.(we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시몬이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맞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잠시 발길을 멈추어 그 험한 광경을 구경하다가 그만 로마 군병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사건은 터지고 말았습니다.
야! 너!
그 로마 병정 놈이 시몬을 향해 십자가로 까딱까딱 손가락질했습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눅23:26)
그는 그렇게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등짝에 회초리질을 당하면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와 땀으로 미끈거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롬16:13)
그 때에는 회초리를 들고 등짝을 내리치는 로마 병정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의 가족까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했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
우리의 십자가는 재수 없어서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예수님과 연합해서 받은 것(we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일을 맞아서 예배당 장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회 맨 앞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주여 삼창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방언 예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처럼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받은 사람에게 이 일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일입니다.
(we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그러니까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성황리에 잘 인도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하지만 그 나무 밑 그늘에서 말입니다.
그 깡패놈을 실컷 두들겨 패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안악골의 호랑이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었다면 말입니다.
바로 이전 사람이 죽었느냐가 실은 세례의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옛사람도 살아 있으면서 앞뒤로 몸을 흔들어댄다고 하나님이 속으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했는가?
(we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4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묻혔습니다.
본래 세례 의식은 그릇에 물 떠다가 머리에 물을 바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머리까지 풍덩 물 속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익사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죽음의 문제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무엇인가?
이전 사람이 땅속에 묻혀버렸다는 것입니다.
흔들어대면서 3층천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서 이전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전 사람은 세례를 통해 익사하더니 이제는 땅에 매장되었다는 소리입니다.
과거가 죽지도 않고 살아서 기회주의적으로 제 정체를 드러내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덜된 신앙인입니다.
*새로운 생명
바울이 이런 침울한 죽음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in order that we too may live a new life.)
(in order that)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새로운 생명을 말하기 위해 그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에게서 징그러운 애벌레를 기억해 낼 수 없습니다.
안악골 호랑이는 그대로 죽고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새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일어날 일이 죽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산고
그런데 왜 꼭 그 죽음의 고난인가?
큰아들을 가지고서 산고가 무엇인지 구경을 했습니다.
십 계월을 고스란히 헛구역질을 하더니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병원 분만실에서 신음하다가 큰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병동으로 오더니 아내는 기절해 버렸습니다.
출산이란 목숨 걸고 한다는 것을 아내를 보고 알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넷이니 연이어서 세 번을 더 그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 마치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서, 고통 때문에 몸부림 치며 소리 지르듯이, 주님,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렇게 괴로워하였습니다.
18. 우리가 임신하여 산고를 치렀어도, 아무것도 낳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이 땅에서 살 주민을 낳지도 못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사26:17-19)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For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a resurrection like his.
*같은 죽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신앙 고백했을 때 이 땅의 우리 삶은 정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음의 방향을 향해서!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3:16)
하나님께서 죄인 세상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셔서
또 죄인을 사랑하시는 이타적인 동기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것은 살고 싶은 자신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도 나와 같은 죽음(a death like his)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너도 이타적 동기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죽음의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죽어야 하는 성도의 죽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똑같이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같은 부활
주님과 같은 죽음을 택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예수님과 같은 부활(a resurrection like his)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망치를 들고 못질하는 로마 군병이었습니다.
주님의 옷을 두고 희희닥 거리며 주사위를 던지는 병사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죽음의 건너편의 생명을 소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죽음(a death like his)을 택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같은 부활(a resurrection like his)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6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ruled by sin might be done away with,[a]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죄의 노예
하나님의 은혜가 크시니 우리가 이전처럼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처럼 죄지으면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더 큰 죄를 지으면서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백은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었다는 죄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버젓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과거가 죽지도 않은 주제에 주여 삼창을 하는 종교적 열심은 혼란만 줄 뿐입니다.
똥을 뒤로 싸가면서 배춧잎을 갉아먹는 나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애벌레의 욕구는 나비에게 없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의 사건이 거창의 우리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과거가 십자가에 못 박혀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7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set free from sin.
조선 말기, 강화도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자식 없이 홀로 사는 '김씨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녀는 '복섬'이라는 여종을 두고 있었습니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18:18)
그 말씀을 교회에서 처음 들은 것입니다.
그 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이 복섬이를 종으로 묶어 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녀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다음 "성경을 보니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자매입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겠습니까?
내가 복섬이를 종으로 매어 두면서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하더니 문갑에서 종 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놀란 복섬이가 울며 매달렸습니다.
"마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마시고 이 집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그 녀는 전도사님의 조언을 따라서 복섬이를 양녀로 삼았습니다.
복섬이는 정성을 다해 김씨 부인을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이 일은 실재로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전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니 이전 사람이 생각해 보지도 못한 생각을 했습니다.
또 실천할 수 없는 일을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내가 죽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그 부활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