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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0 / 선택권이 없습니다. (창13:1-9)
옛말에 ‘밥을 술에 말아 떡과 함께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밥을 먹을래? 술을 마실래? 떡을 먹을래?’ 그랬더니 세 가지를 다 선택하겠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랍니다.
그러나 실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는 ‘통째로’가 통하지 않습니다. 입고 싶은 양복이 두 벌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두 벌을 다 입을 수는 없습니다. 구두와 운동화 두 개를 다 신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작은 일이든 큰 것에서든 선택은 언제나 하나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합니다.
선택이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언제나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누구에게나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질 못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성경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여러분은 부자와 나사로 중 누가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한 아이가 대답하기를 살아서는 부자로, 죽어서는 천국에 간 나사로로 살고 싶다고 했답니다.
되지도 않을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 편에 섰다가 저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설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를 선택했다면 저세상에서의 결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문에 어떤 광고에서 나온 말처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보게 됩니다. 함께 고향을 떠나왔던 아브라함과 롯은 소알 지경에 이르러 부득이 분가하여 각자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온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 외엔 따로 행선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기에 롯이 먼저 택할 곳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런데 본문 이전의 사건을 보면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마침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런데 그땐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본인의 의지로 선택을 결정했었고 그 결과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뻔한 큰 위기를 경험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을 놓고 볼 때 앞서 ‘내가 선택하겠다.’ 했던 아브라함과 지금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아브라함을 보며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선택의 중요성과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1.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황만으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 했다거나 그를 우상의 땅에서 나오게 하시려고 등등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이 복 주심에 있어 복을 주고 못 주실 장소가 따로 있었을까요? 우상의 땅이라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못 하셔서 그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실상 이 말은 “이제부터 너의 선택권을 나에게 맡기라.”는 하나님의 의도된 말씀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렇다면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최종 결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결과가 달려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선택권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리했습니다. 모든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결과까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도중에 무심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실패도 경험했었기에 이번 롯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하는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이 얼핏 보기에는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준 것 같지만, 두 사람만의 문제로 해석하려 하면 안 됩니다. 믿음 안에서는 하나님을 빼고는 아무것도 이야기 되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했던 말은 기실은 하나님의 결정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겠단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입니다.
“믿음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뜻으로 통한다!”
아브라함에게 있던 믿음이 이런 믿음이었기에 그는 좋은 땅을 뺏겼어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처한 자리가 힘들고, 고생해야 하는 자리였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루실 결과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이래야 합니다. 그러면….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은 결코 / 실망 주지 않으신다.”
2.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이웃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에서는 항상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기대하느냐? 무엇 때문이냐?’ 등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에게서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롯의 입장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롯이 본토에서 아브라함을 따라나섰을 때까지만도 해도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자는 곳으로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하자는 대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롯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 함께했던 롯도 그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호하실 때 함께 있던 롯도 그 덕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롯은 그런 아브라함과 헤어지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면 복도 떠나갑니다.
아브라함과 함께할 때는 항상 타의로라도 믿음의 선택에 동참했었는데 이제 본인 선택으로 소돔을 선택했고 소돔 사람들과 어울려 살므로 해서 끝내는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아닌 말로 이웃하나 바뀌었는데 인생이 바뀌어버렸습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도 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사람들이 내 이웃으로 많이 있게 해야 합니다. 믿음 좋은 사람이 내 이웃이어야, 기도하는 사람이 내 이웃이어야, 그래야 나도 복을 받습니다
근묵자흑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먹물 가까이 있다 보면 검게 된다. 즉 먹물이 튀게 됩니다. 이 말을 믿음에 적용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 곁에 있다 보면 사방으로 튀기는 복이나마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변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3. 믿음의 사람은 ‘손해 보는 쪽을 택해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에 세 가지 유산을 남겨 자식들이 선택하게 했습니다. 큰아들은 앞에 놓인 땅문서를 차지했습니다. 둘째는 앞에 놓인 돈주머니를 차지했습니다. 막내 차롄데 그의 앞에는 아버지가 평소 입으시던 헌 외투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입으시던 거라 입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날 것이라며 좋아했습니다.
부친 장례를 마치고 예의 그 외투를 입고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열쇠 하나가 잡혔습니다. 그 열쇠가 맞는 자물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가 막내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 안엔 집문서며, 각종 증권이며, 비밀번호가 적힌 통장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선택권이 없어 가장 나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막내가 아버지가 예비해 놓으셨던 가장 좋은 유산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택도 이러해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니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혹 지금 근심이나 염려가 있습니까? 불안이나 초조함이 있습니까? 두려움이나 슬픔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으신다면 그러면 안 됩니다.
때론 하나님만 믿는 것이 손해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그렇게 안하고도 잘들 사는데 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빈손에도 복 받을 열쇠 하나가 쥐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손해가 있었든 억울함이 있었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이상으로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선택한 이상 하나님은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 주십니다.
4. 마지막으로 선택과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앞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고, 믿음의 이웃을 선택해야 하고, 때론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믿음이 무엇이라고 했었는지를 잘 기억해 보세요.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 외에는 사실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헷갈리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문제도 아닙니다. 이 한 문장이면 해결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느 집에서 딸이 가출해서 온 가족이 찾다 찾다 할 수 없어 시내 곳곳에 딸을 찾는 전단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전단이 좀 이상했습니다. 당연히 찾을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어야 할 텐데 이 전단에는 딸 사진 대신 엄마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모든 게 엄마 탓이란다. 이 사진을 보는 대로 돌아오려무나.”
급한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딸의 사진을 붙여 딸아이가 소위 동네방네에 얼굴을 팔리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그런데 믿음의 사람에게는 부모님 외에 부모님의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1. 사랑의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롯을 떠나보낸 아브라함은 약속대로 롯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당연히 허허벌판이요 물도 없는 광야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되는 곳입니다. 오히려 지금 있는 곳만도 못한 더 나쁜 장소입니다.
믿음대로 살아 보려니까 이런 일도 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엔 항상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다음’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홀로 남아 더 악화된 상황 속에 주저앉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고개를 떨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눈을 들라 하십니다. 눈에 뵈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까지 하십니다.
홀로 남겨진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살길이 막막하고, 앞날이 깜깜했는데, 나만을 위한 하나님의 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혹 예전에 배운 내용이 기억나십니까? 힌트는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롯이 떠난 빈자리’를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믿음의 길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려고 비우라 하시는데, 우리는 비워지는 아쉬움에 세상 것의 미련을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려고 홀로 남게 하시는데, 우리 남겨진 뒤의 두려움과 허전함에 더욱 세상 깊이 빠져듭니다.
여러분만이라도 하나님이 내게서 하시는 일을 믿으세요. 여러분에게 있는 빈자리, 빈 주머니, 빈 구멍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음을 믿는 것과 믿기에 믿음으로 살아 보려는 노력만이 있을 뿐입니다.
살다 보면 인생이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이유 없이 주위에서 사람이 떠나갑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힘들고 실패하는 때도 있습니다. 피곤함에 지친 육신에 질병까지 짊어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런 때를 만나면 이제야말로 하나님 찾을 때가 되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음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선택을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으실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 다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 것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도 마세요. 아브라함은 롯이 좋다는 것은 다 내주었습니다. 가지겠다는 것은 다 주었습니다. 하겠다는 대로 다 하게 했습니다.
이제 진짜로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몸뚱이 하나와 하나님 외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할렐루야입니다. 그때부터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실망하기 직전에, 낙심하기 직전에, 포기하기 직전으로까지 내몰렸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때부터입니다.
선택하셨으니 결론도 하나님이 내리실 것이기에 믿는 우리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것만 남았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하납니다.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음을 믿는 그런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여객선이 항구에 닿았는데 여성 한 분이 배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습니다.
다들 놀라기는 했지만 바로 옆에 구조요원이 있어서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속에서 들락날락하며 다 죽어 가는 정작 구조요원은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승객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왜 빨리 안 구해요? 당신 구조대원 맞아?”….
잠시 후에 여자가 물에 잠겨 다신 안 나온다 싶을 때 구조대원이 뛰어들어 여자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기를 “잘 알아 두세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고 급하게 뛰어들면 같이 죽습니다. 빠진 사람이 발버둥을 멈추고 내가 구하는 대로 끌려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구조의 요령입니다.”라고.
믿음에서도 그렇습니다. 문제 앞에서 내가 뭔가를 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우선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끌려갈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선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고난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앞길 캄캄한 인생을 살며 허우적거리는 분이 계십니까? 그럴 때 “하나님 왜 빨리 안 구해주세요? 진짜 하나님 맞아요?”라고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 맞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실 것입니다. 단 구조요원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가 아니라 이미 약속하셨던 대로 지체하지 않고 정녕 응하셔서 구하고 살리실 것입니다. 요나를 보세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기다리셨던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신 물고기를 통해 즉시로 요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계시기에, 아니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우린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언제든 하나님은 인생에서 롯이 떠난 여러분과 이 교회의 빈자리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물질로 채우시고, 강건함으로 채우시고, 성공과 행복으로 채우시고, 기쁨으로 채우시고, 원하는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지금 이후의 그다음이 있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즉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린 또한 믿음 안에서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을 믿기로, 믿음의 이웃들 속에서 살기로, 그리고 손해가 있더라도 믿음만을 따르기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믿는 자를 위해 하신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날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이후로는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복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게 될 것을 믿으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