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靑 인문학 아카데미 1 Tongchung Humanities Academy | 542회 | 주 제 | 강 사 |
톨스토이 - 비폭력아나키즘 | 최 금 희 (방송3사 출연 인문학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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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비폭력아나키즘
◎ 저자소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9.9. ~ 1910.11.7.)는 1828년 8월 야스나야 폴랴나라고 불리우는 러시아 남부 툴라 근교의 영지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9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16세 때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였지만 대학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자퇴하고 17세에 고향 야스나야 폴라나도 돌아가서 진보적인 지주로서 농장을 경영하였다. 평소 루소의 저술을 읽으면서 철학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고, 19세 되던 1847년부터 삶을 마감하는 82세까지 평생 일기를 남겼다.
대학을 자퇴하고 한때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1851년 카프카스전투와 1855년 크림전쟁에 참전하면서 24살에 매일 생과 죽음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방탕하게 살아온 귀족청년으로서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전쟁터에서 펴낸 첫 작품 《어린 시절》(1852)을 등단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처녀작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소년시대 》(1854) 《청년 시절》(1855)등 자전적 삼부작 등 군에 복무하면서 집필한 작품들이 당대에 큰 반응을 얻으면서 이미 청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농민들의 삶을 가까이 하면서 농장경영과 집필활동을 병행했고 아내 소피아의 도움으로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톨스토이는 당대 러시아민중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부와 방탕했던 과거에 대해 평생을 참회로 몸부림쳤으며 역설적으로 그러한 고뇌를 작품에 쏟아 부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사상가라는 평을 받았으며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로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과 러시아 사회를 그린 《전쟁과 평화》(1864∼1869), 당시의 사회조직이나 법률의 허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부활》(1898~1899), 사랑과 결혼 등의 문제를 다룬 《안나 카레니나》(1873∼1876), 러시아 민담을 개작한 <바보 이반>(1886), 죽음을 소재로 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소피아와 말년에 계속되는 싸움에 지친 톨스토이는 급기야 1910년 10월 방랑길에 오른 보름만인 10월 29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였으며, 죽이기 위해 결투를 신청하곤 했고, 카드 도박에 져서 돈을 잃기도 했다. 또한 나는 농부들의 노동의 열매를 먹어치우고, 그들을 괴롭히고, 음탕한 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속이곤 했다. 거짓, 도둑질, 온갖 종류의 간통, 폭음, 폭행, 살인...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는 없었다.”(톨스토이, 2012, p. 11)
◎ 톨스토이의 비폭력사상
톨스토이는 1904년에 발생한 러일 전쟁을 기독교 국가와 비기독교 국가의 충돌로 간주하고 러시아의 패배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톨스토이는 ‘종교적 혁명’을 내세운다.
‘종교적 혁명’이란 국가의 강압적인 폭력 대신에 형제애를 바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은 무익하고 비이성적이며 그 악을 확대할 뿐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각 개인의 도덕적 힘으로 폭력을 견뎌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평등, 자유, 형제애에 역행하고, 이 이상의 실현 가능성을 앗아가는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평등, 자유, 형제애를 실현코자 하는 이상한 모순이 있다.(톨스토이 「비폭력에 대하여」 p. 170)
어떤 형태이든 정부가 유지되기 위해 폭력을 필요로 하는 한, 모든 사람들이 말 그대로 이해하였고 이해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존재할 수도 없다.(톨스토이 「비폭력에 대하여」 p. 257)
이반, 표트르, 니콜라이와 같은 사람은 이웃들의 살인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요구하는 기독교의 율법을 의무로 인정하면서도, 왜 전쟁, 즉 폭력, 강도, 살인 행위에 참여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언제나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조국이나 신앙, 맹세, 명예, 문명화 혹은 보통 어떤 추상적이고 규정되지 않는 인류 전체의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대답한다.(톨스토이 「비폭력에 대하여」 p. 37)
◎ 조선시대 톨스토이 수용
동경유학파인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등에 의하여 1900년대 후반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톨스토이는 이미 세계가 공인하는 대작가였지만 톨스토이에 대한 조선 근대 초기의 관심은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중심으로 한 ‘선택적 수용’의 형태였다.
3.1 운동 후 1920년대 초반에 톨스토이주의 재등장 : 조선의 식민지적 상황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근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920~30년대: 톨스토이주의는 현실을 초월한 보편적 종교원리와 사회현실에 보다깊이 개입하는 사회비평이라는 시선에서 더 깊게 수용해감.
이광수: 종교적 실천가로서 톨스토이의 비폭력사상을 잘못(?) 받아들이고 친일작가로 전락했다. 톨스토이는 이 모든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직접 밝힌 바 있듯이,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Толстой, 1934, p. 259).
최남선: 잡지 「소년」(1908)을 발간, 일본어를 중역한 톨스토이 작품과 사상을 전파하여 조선 사람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시도
홍명희: 예술론의 비판적 수용에서 톨스토이를 종교사상가, 예술가로서 두 가지 차원에서 수용, 톨스토이 작품과 사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통하여 작가로서 사상가라는 견해로 발전
홍명희는 동경 유학 생활을 하던 중 톨스토이 작품을 접하였다. 당시 일본에 번역된 대부분의 톨스토이 작품(『코사크』 · 『세바스토폴리』 · 『바보 이반』 · 『납촉』 · 『사람은 얼마나 넓은 토지가 필요한가』등을 비롯해 『인도주의』 · 『나의 종교』 · 『나의 참회』 등)을 읽었다. 하지만 홍명희 자신이 예수를 공공연히 싫어하고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에서 처음 접한 톨스토이 작품에서는 문학적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그냥 “글 짓는 복음사” 정도로서의 톨스토이를 이해하였다.
그러던 홍명희는 『부활』(1905)을 읽은 후 톨스토이에 대한 생각이 차츰 달라지게 되면서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의 번역을 이중역이든 삼중역이든 읽었고, 이후로는 일본어로 번역된 톨스토이 작품은 가능한 모두 구해 읽었다.
그 과정에 그냥 복음사로만 여겼던 처음 생각과는 달라졌지만 예술가로 종교가 된 것을 무슨 변절이나 한 것처럼 생각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다. 문예를 좋아하는 청년으로 그의 『예술은 무엇이냐』를 내려 볼 때 그런 생각이 더욱 깊었다. 홍명희는 톨스토이를 이전에는 ‘종교가’로 판단하여 평가하지 않았던 것을 그의 후기 작품을 읽고 나서 비로소 ‘예술가’로서 톨스토이의 작품에 대해 평가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 홍명희는 톨스토이에 대한 로맹 롤랑의 이해 기준도 분석하면서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관조력’과 ‘명상력’이라는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톨스토이 한 개인에게 공존했다는 두 개의 인격이 어떤 양상으로 톨스토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갔는가 하는 면에서는 다른 입장이라는 논리를 내놓았다.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면에서 종교관이든, 예술관이든, 그 의미는 실제 생활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홍명희의 관점이다.
...한 가지 욕심으로 바라는 맘은 우리 조선에도 얼른 톨스토이 같은 인물이 나서 조선 사람의 생활과 이상을 작품으로 표현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홍명희
◎ 다문화 개념적으로 접근했을 때 톨스토이 비폭력사상
다문화교육 옹호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기반성적인 비판들이 비판주의 학자들에 의해 통렬한 비판으로 확산 : 자비심 많은 다문화주의자 –Barry Thoyna (1987,1993)가 사용한 표현
현주소: 반인종차별주의교육, 비판적 인종이론, 비판적 다문화주의의 다양한 목소리, 비판적 다문화주의에 대한 저항.
레비나스는 어려서부터 톨스토이와 프쉬킨,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자랐다. 레비나스는 「타자 윤리학」에서 ‘나’-주체의 고유한 것은 혼자일 때보다 ‘타자’와의 관계가 형성될 때 성립되고 더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2차 세계대전 프랑스군에 입대하였으며 톨스토이처럼 전쟁을 경험했다. 그의 가족은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톨스토이는 평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다녔다. 나(우리)는 절대 혼자로 이세상을 살 수 없다.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는 나(우리)와 다르다고 차별 혹은 배제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함께 하는 것에 있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농노들을 위해 자신이 태어났던 대저택을 팔고, 말년에는 저작권과 재산 소유권까지 사회에 환원하려 했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문학기이기 이전에 사상가이고, 자신의 사상을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만 탐구하고 실천한 실천가였다.
1910년 톨스토이가 서거할 무렴, 러시아의 한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러시아에는 두 황제가 있다. 한 황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황제이다. 다른 황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황제이다. 두 번째 황제는 바로 레프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어린시절 울고 있는 자신을 달래던 형 니콜라이가 들려준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푸른 지팡이의 비밀에 매료되었었다. 어쩌면 톨스토이는 평생 문학작품과 교육활동, 비폭력사상 등으로 푸른 지팡이가 묻혀있는 비밀의 숲을 찾아다녔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지팡이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까요?
〈이어지는 강의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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