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 같은 잠
박영선
자주 넘어졌다 넘어질 때마다 깔깔 울었다 의사는 하루 세 번 따뜻한 물 반 잔에 보드카를 한 스푼씩 타서 마시는 처방을 내렸다 하루에 세 번 삼십 분씩 걸으라고 했다 나는 술을 못 마시는데 꿀을 한 스푼 섞어도 될까요 꿀을 타면 술이 아니 물이 더 독해져서
꽃에도 미끄러질 수 있어요 넘어지는 원인은 여러 가지일텐데 처방은 한가지인 그를 사람들은 용하다고 했다 넘어져도 실망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자주 걸으세요 그래서,
걷는다 천천히 걸으면 18분 요리조리 24분 걸어서 잠으로 들어간다 달 뒷면에서 사뿐거리는 종아리를 따라 걷다 나뭇가지에 달린 발바닥을 보며 걷다 잠으로 들어간 꿈은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다 꿈은 누워서도 걸을 수 있는 인형이다 지팡이를 쥐고 걷는 인형이다 지팡이는 깃발이다
피켓이다 잠에는 중력이 없어서 울지 않는다
잠은 어느새 피켓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꿈을 더 꾸게 해 달라
나는
천천히 18분 24분, 잠으로 잠긴다
피켓 속에 다정히 들어앉아
꿈에서 꿈으로 옮겨가며
걷는다
두 번째 피켓에서 세 번째 피켓으로
3.14
소년이 흰 파이를 들고 간다
시계 위를 걸어서 간다
시계는 원주율 위를 돌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난 장화의 자국들
발자국마다 맑은 물이 시간으로 고여있다
청년이 푸른 파이프를 들고 간다
바퀴 위를 걸어서 간다
바퀴는 원주율을 벗어나 있다
바퀴 자리 난무한 길에
푸른 웅덩이가 시계로 고여있다
붉은 주름 사이로
노인이 간다 시간을 자르며
둥근 파이프처럼
이어 붙인 다리는 길이가 다르다
발맞추어 걸을 수 없게 된 걸음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발자국을
본다 걸어본 적 없는
기둥에 걸린 시간이
찌꺽찌꺽 매듭을 풀고
시계 위를 걸어온 장화가
12번째 현관에 들어와 눕는다
녹지 못한 늙은 눈덩이가
검은 기둥을 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