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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강화군 여행] 강화 나들길 3코스에 있는 희종의 묘! 고려편 碩陵[석릉].........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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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강화군 여행] 강화 나들길 3코스에 있는 수창궁 사건으로 폐위된 뒤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던 비운의 왕 희종,
고려편 碩陵[석릉]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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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랑자는 이제 고려 21대 비운의 왕이 묻혀있는 碩陵[석릉]으로 향한다. 석릉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산속
에 있는 데다. 들머리가 마을 안쪽에 있는 관계로 찾아가기가 어렵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따라가다 개울을 건너고
나면 입구에 강화 석릉이라고 쓰인 里程表[이정표]가 보인다. 이 이정표를 지나면 드디어 진강산[441.3m] 동쪽 7부 능선
쯤에 碩陵[석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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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아간 석릉. 800여 년의 장구한 시간 속에 온갖 풍상을 견디며 지켜온 무덤은 말없이 유랑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신 집권기 가장 암흑기에 왕위에 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비운의 군주 고려 21대 왕 熙宗[희종,(재위: 1204~1211)]!
서늘한 권력의 힘에 굴욕당한 왕영[희종]이 강화도에 묻히게 된 이유가 있다. 그는 24세 되던 해에 아버지 神宗[신종(고려
20대 왕)]의 선양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이미 무신정권 최충헌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무렵이었고 그가 왕으로
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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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 사변으로 폐위된 뒤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던 희종은 1237년(고종 24년) 8월 10일 근처의 절인 법천정사에서 승
하하였다. 이후 1237년(고종 24년) 10월 19일에 석릉(碩陵)에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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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신종 역시 최충헌으로부터 왕위에 올려졌고 아들[희종] 역시 최충헌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를테면 허수
아비 왕!. 본시 왕이라는 자리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이자 모든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절대적인 권위와 지위를 누리는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시대에는 왕좌에 앉아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던 왕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 바로 오늘 유랑자가 만나본 고려 제21대 왕 희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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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무신정권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허수아비 왕 노릇을 거부하고 왕권을 되찾으려 했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1211년 12월,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내시 왕준명과 승려 10여 명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최충헌을 숙
청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는데 그 결과는 실패하고 만다. 이름하여 수창궁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희종은 왕권
에서 폐위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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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陵[석릉]: 華南[화남] 高在亨[고재형, (1846~1916)]
碩陵知在鎭江巒(석릉지재진강만): 석릉이 진강산에 자리함을 아노니
獨閉空林月影寒(독폐공림월영한): 빈 숲에 홀로 문 닫고 있자니 달그림자 차갑구나.
猗我聖朝封築謹(의아성조봉축근): 아, 우리나라 조정에서 봉분을 수축하고
年年奉審地方官(년년봉심지방관): 해마다 지방 관리가 받들어 살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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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顯宗)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고쳐 지었고, 1867년(고종 4) 능 앞에 표석을 세우는 등 관리가 이루어
졌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1974년 봉분이 붕괴되고 능역이 파괴된 것을 보수,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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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紫鷰島[자연도: 현 영종도]로 옮겨졌고, 고종 2[1215년]에 다시 喬桐[교동]으로 옮겨졌다가 고종 6[1219년]에 개성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땐 딸 덕 창 궁주를 최충헌의 아들 최성과 혼인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 23대 왕인 고종
14[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崔怡[최이,(최우에서 개명)]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
져 고종 24[1237년] 8월 교동도 근처에 있는 사찰인 法天精舍[법천정사]에서 56세 나이로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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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개경 생활을 제외한 유배 생활만 18년을 한 셈이다. 이후 고종 24년[1237년] 북풍한설 몰아치던 10월 초겨울
의 날씨 속에 碩陵[석릉]이란 이름으로 장사 지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조선 왕조는 고려왕조를 뒤집어엎었다, 왕조가 바
뀐 후 조선 26대 왕 고종 4년[1867년] 고려 왕릉의 위치가 확인된 후 고려 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비로소 '高麗
熙宗 碩陵[고려 희종 석릉]'라 적힌 표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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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구조를 확인하였고, 그 결과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1992년 3
월 10일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석릉'에서 '강화 석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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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희종은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히는 박대를 받았으나 80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현
재는 남한 지역의 비교적 잘 보존된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 왕릉에 있으니 이 또한 塞翁之馬[새옹지마]라 할 수 있다.
碩陵[석릉]은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왕릉이 도굴당하고 봉분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었으나, 1974년 8월
광복절 기념식 때 문세광의 암살[육영수 사망] 시도 사건이 미수에 그친 후 살아남은 박정희가 이를 보수,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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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2000년과 2001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자세한 구조를 확인하였고, 그 결
과를 토대로 하여 명마 伐大驄[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진강산[441.3m] 동쪽 능선에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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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릉은 지하식 석실과 곡장(曲墻) 등 고려 시대 능제(陵制)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한편, 석실 상부의 8각
호석은 강화석릉과 강화 가릉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구조이다. 곡장과 석단 등은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변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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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결과론이긴 하지만 만약에 수창궁 사건 때 희종의 측근이 知奏事房[지주사방(도승지의 집무실)]에 숨어 있던 최충
헌을 찾아내 암살에 성공했다면 최 씨 무신정권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며 고려 역사는 그야말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럴까? 당시 희종은 여러모로 결정적이고 동시에 아쉬운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은 사실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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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형적인 무신정권이다. 보니 최충헌 하나가 죽는다 해도, 곧바로 그의 아들 최이[최우]나 다른 누군가가 최충헌의 자
리를 차지하여 역사의 큰 구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역사는 흘러가고 되풀이된다고는 하지만 그
러나 똑같은 모습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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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릉 부근의 고려 시대 무덤(40호 돌덧널무덤) 에서 나온 양 모양의 석상. ‘석양’이라고 하며 무덤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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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재미있는 것은 역사는 희종이 몇 번씩 유배되었던 교동도를 보면 희종 외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등 고려부터 조선까
지 주요 왕족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희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교동면 慶源殿[경원전]지는 교동도
북쪽 면 ‘고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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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동면 고구리 동남쪽 언덕의 옛 성터는 당시 고목 군현의 성터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리’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 '高
木根[고목근]' 또는 '高林[고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예로부터 이곳에 큰 나무들이 자생하여 '큰 오동나무 골'이라 불
린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喬桐[교동]’이라는 이름은 757년 통일신라 시대에 喬桐 縣[교동 현]으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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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청자 가운데 “청자양각국화당초문대접”은 강진 사당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며, 이로부터 강도(江都) 시기
자기의 생산과 수급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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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碩陵[석릉]의 능역을 살펴보면 남북 31m, 동서 20.5m의 규모였으며, 5단의 石築 壇[석축 단]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최상단에는 지름 약 4m의 봉분이 있었고 주위에 ‘∩’형태로 곡장이 둘리어 있었다. 곡장 서측 전면에는 石人像[석인상] 1
기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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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상은 복두와 관복을 착용하고 손에 笏[홀(왕실의 중요한 의례에서 신하들이 손에 들었던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든 좁고
긴 판)]을 쥔 전형적인 文官[문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당 석인상을 포함한 석릉의 모든 석인상은 문관이다.
2단에는 標識石[표지석]과 石人像[석인상] 1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3~5단에는 별다른 석물이 없다. 3단 능역에서는 다량
의 기와 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구역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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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내부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나 청자 접시, 대접, 잔, 잔탁, 항아리 등 자기 조각과 관정, 금동제 장식판, 금박 편,
구슬, 동전, 자물쇠 등 금속 유물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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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릉의 발굴 결과, 능역의 최상단에는 석실이 위치하고 3단에는 丁字閣[정자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계의 추론
이다. 석실은 지하식이며 그 규모는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에 달하였다. 동, 서, 북쪽의 벽은 깬돌을 허튼층쌓
기 방식으로 7단을 쌓아 올렸다. 동, 서쪽의 벽 입구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方形[방형]의 홈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인 남벽
에는 문지방돌과 문의 門柱石[기둥 돌] 을 설치하였고, 바깥에 대형 판석 1매를 세워 막았다. 천정은 3매의 판석을 덮어 편
평하게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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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석릉은 강화 천도기[1232~1270]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다. 고려 시대 전형적인 능제적 특징과 함께 8각 호석
과 같은 개별적인 요소를 함께 보여 준다. 이는 고려 왕실의 능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자, 몽골과의 전쟁 동안 공식
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로서의 위상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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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무덤에서 석양 상과 함께 나온 호랑이 모양의 돌상인 석 호상.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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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각종 외침과 내홍에 시달리면서도 500여 년을 존속했던 고려왕조의 왕들에게 무신정권 시절은 무엇보다 가장 큰
고난이었음을 초라한 무덤이 말해주는 듯하여 망한 왕조의 쓸쓸함을 엿볼 수 있었다.이를 입증하는 희종의 사망 사실과 장
례 이야기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간략하게 전해올 뿐이다. 지금의 墓域[묘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려 시대 유물은
능을 지키는 2기의 石人像[석인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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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文人石[문인석]으로 보이긴 하는데, 그나마 하나는 머리와 몸체가 훼손되어 두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어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석릉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유랑자의 발걸음이 못내 무거웠다. 난 잠깐 발걸음을 멈
추고서 뒤돌아서 다시 석릉을 바라본다. 망한 왕조의 묘가 끊임없는 도굴과 훼손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느낀 점은 고려의
왕들은 죽어서도 편할 수가 없음에 희종의 불행했던 삶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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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무덤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와 철제 향로 다리가 출토되는 모습. 땅을 다스리고 안전을 기원하는 진단구의 일종으
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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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리 구이: 양고기는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에서도 정력과 기운을 돋우고 비장과 위를 튼튼하게 해준다고 기록되
어 있으며. 고단백 저지방 보양식으로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지방 함량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근육 형성과 기력
회복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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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석릉(희종 묘) 찾아가기
*주 소: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
**홈: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tour/tourInfoDetail.do?tour_seq=60&pg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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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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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여행 가이드
*관광 안내소: 032-932-2302.
*강화군청 문화 관광과: 032-930-3568
*관광 통역안내: 1330(24시간 운영)
*한옥관광 안내소: 032)932-5464
*터미널 안내소: 032)93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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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 요.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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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8경
#제1경 전등사/. #제2경 보문사/. #제3경 연미정/. #제4경 갑곶돈대/.
#제5경 마니산/. #제6경 광성보/. #제7경 초지진/. #제8경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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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성곽길, 강화 나들길 도보 여행 시 유의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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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코스를 숙지 후, 시간과 거리를 감안한 자신의 체력에 맞는 여행을 하십시오.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위급 시 119나 소리를 내어 주변에 알리도록 합니다.
*해안제방 길에서 밀물과 썰물 및 군사 보호지역 통행시간을 고려하여 여행하십시오.
*해안가 근처에는 폭발물 등의 위험물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화 나들길 여행시간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입니다.
*코스 중에는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으니 훼손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중에 주민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할 수 있으니 조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시고, 쓰레기는 반드시 회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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