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공포 아니면 축복?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나에게 공포일까요, 축복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선은 거짓말입니다.
자기 속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모조리 아는 분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후의 아담을 부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이 죄지은 사실을 알고 계심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솔직히 자신들의 잘못을 주님의 자비에 맡겨야만 했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는 줄거리는 몰라도 제목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공포영화입니다.
내용보다 그냥 제목 자체가 공포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야기는 4명의 고등학교 친구가 7월 4일과 다가오는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면서 시작됩니다.
축하 행사를 마치고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하던 중 우연히 보행자를 들이받았습니다.
당황하고 반향을 두려워한 그룹은 시체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는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쥴리는 1년 후 집으로 돌아와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라는 소름 끼치는 쪽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한 인물이 친구들을 표적으로 삼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헬렌과 배리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신비한 살인자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쥴리는 겁에 질려 자신들이 때린 남자가 물에 빠졌을 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미스터리를 더 깊이 파헤쳐가면서 쥴리는 그들이 때린 남자의 이름이 데이비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쥴리는 그날 밤까지 일어난 사건을 종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그 사고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절정은 살인자가 데이비드가 아니라 오히려 딸, 수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데이비드를 죽인 후
우연히 위 네 명에게 사고를 당하고 수장당할 뻔한 수지의 아버지 벤 월리스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차로 치고도 수장시키려 했던 이들에 대해 복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한 일을 알고 있다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끔찍한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 닥쳐올 징벌로부터 피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솔직히 의견을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이전보다 훨씬 솔직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놓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신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니
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다 아시고 계신다는 믿음은 나를 솔직하게 그분의 자비에 맡기게 만듭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 가서 헌금하라고 어머니께서 주신 50원으로 오락실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성당 안 가고 오락실 간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보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보를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주보를 가져다드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제일 싫다고 솔직하여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헌금은 안 하고 동전을 헌금함에 넣는 척만 하고 그것으로 오락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꼼짝없이 성당 주일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다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은 공포가 아니라 축복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 거짓이 없도록 합시다. 위선은 우리가 정말 그러한 존재로 알게 만들어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어떠한 존재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믿어봅시다.
그러면 두렵겠지만, 그냥 숨기고 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를 솔직함과 회개,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0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저희 피정 센터를 찾는 형제자매님들 중에, 가끔 레지오나 반모임, 꾸르실료 등 본당 활동 중에 만난 형제자매들이 열두 서너 명 소규모로 피정을 오십니다.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깨가 쏟아지고 이박삼일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앙 안에서 만나니 그렇게 우애가 깊은 듯합니다.
친형제 자매 ‘저리 가라.’ 입니다. 세월이 삼십 년 사십 년 흘러도 그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신앙이 좋은 것이로구나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나이 불문하고 시간이 ‘순삭’입니다.
그동안 겪었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간 갈고 닦은 아재 개그들을 나누다 보면 금방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깁니다.
나름 수도 생활 연식이 오래된 형제들끼리 만나면 더 재미있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꽃미남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영락없는 영감님들입니다.
아랫배도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 무엇보다도 제일 큰 관심사요 대화 주제는 현저하게 줄어든 머리카락입니다.
그나마 아슬아슬 남아 있는 서로의 머리숱을 바라보며, ‘관리 좀 하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 샴푸를 써보라.’ ‘저 피부과로 가보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현저하게 머리숱이 결핍된 형제 중에 한 분은 대뜸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깔깔 웃습니다.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자신은 머리숱이 적으니 그만큼 죄가 적다며, 위안을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머리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강론>
(2023. 10. 20. 금)(루카 12,1-7)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1ㄷ-7).”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또는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재물을 섬긴 사람들입니다(루카 16,14).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라는 말씀을 앞의 말씀에 붙여서 읽으면, “심판 날이 되면 위선자들의 위선은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고, 위선에 대해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말씀에 붙여서 읽으면, “신앙과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련이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알려질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과 복음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벗’은(친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또는 “박해자들의 힘에 굴복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 또는 “주 하느님만 섬겨라.” 라는 뜻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온 세상은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을 아주 세세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과 선행과 사랑 실천은,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간에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의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날까봐 두려워하지 마라.
충실한 신앙인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신앙인들의 고귀한 영혼을
하찮은 참새들과 비교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박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 권력’의 ‘하찮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은, 그리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의 영혼은, 세상의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더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여기서 ‘참새’를 ‘박해자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박해자들은 세속에서는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하찮은 참새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악행을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자들은 반드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의 영혼은 박해자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히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면서, 그분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요한 17,2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