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박태일
더디 넘는
봉산도 재넘이
오라버니 치상길
치마폭에 잠겨 젖는 소발굽 요령 소리며
사철쑥 덤불 아래
돌귀만 차도
산제비 날아가는 유월도 초사흘
(시집 : 『가을 악격산』, 1989)
[어휘풀이]
-치상 : 초상을 치룸. 치상(治喪)
-요령 : 솔발, 손에 쥐고 흔들어 소리 내는 방울 모양의 작은 종. 요령(鐃鈴/搖鈴)
[작품해설]
박태일의 시 세계는 정물(靜物)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삶의 양상으로, 그리고 훼손되고 더럽혀진 우리 생존의 토대로서 자연과 토속의 세계를 아프게 노래하는 가운데서도 순수하고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강렬한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도 그러한 경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즉물적(卽物的)인 형상화를 통해 단아하고 객관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여성으로, 봉산 재를 넘어 죽은 오빠를 묻으러 가는 중이다. 오라버니의 시신을 실은 달구지를 어께에 맨 황소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소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는 요령이 딸랑 딸랑, 아픈 소리를 낸다. 봉산 재를 넘어가는 고갯길은 온통 사철쑥이다. 향긋한 쑥 냄새가 우거진 고갯길은 또 얼마나 한적한지 자그만 돌멩이 하나만 발길에 채여도 산제비들이 놀라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른다. ‘유월 초사흘’과 ‘적막한 시골길’이라는 시적 배경이 오빠를 떠나보내는 화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이 시는 현대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적 율격인 4음보 율격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운율을 조성하고 있다. 시조에서처럼 4음보 율격을 그대러 지키는 것이 아니라, 4음보를 수용하되 적절하게 행 구분을 함으로써 시적 호흡을 조절하는 등의 변주를 하고 있다. 특히 첫 행의 경우 1음보밖에 되지 않는 ‘더디 넘는’을 한 행으로 처리하여 완만한 호흡을 느끼게 함으로써 죽은 오빠를 빨리 보내고 싶지 않은 누이동생의 아픈 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4행에서는 한 행을 네 마디로 처리하여 고조딘 감정을 빠른 호흡으로 드러내는 등의 시적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명사로써 문장을 끝맺는 시행 종결 방법은 이러한 4음보 율격 형성에 기여하는 한편,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기능도 지닌다. 명사로 문장을 종결시키면 그 시어에 시상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오라버니 치상길’이라는 시적 대상과 ‘유월도 초사흘’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환기하는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작가소개]
박태일(朴泰一)
1954년 경상남도 합천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미성년의 강」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경남대학교 교수
시집 : 『그리운 주막』(1984), 『가을 악견산』(1989), 『약쑥 개쑥』(1995), 『크리스마스 시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