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마태오 22,34-40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60ㄴ-69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성체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 ‘말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열두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고 실천하려는 이는 성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며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요? 그는 말씀을 생명으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해석’하려 듭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은 말씀을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입니다. 마치 의대생이 죽은 시신을 해부하듯이 말씀을 자신 뜻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실행하는 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 개의 성경의 다른 해석과 종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체의 역할이 사라집니다. 루터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 성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말씀을 통해 늦게나마 사제 성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힘차게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 주시는데 내가 뭘 드린다고 유세를 떨었던가?’라며 크게 회개하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하려고만 한다면 성체는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마치 거울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거울은 말씀이고 물은 성사입니다. 거울을 보면 물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굴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로 씻으면 다시 거울을 찾습니다. 잘 씻겼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체는 마치 자전거의 두 페달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라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떨까요? 순종하지 않고 해석합니다.
‘그건 그때 당시나 그런 것이고, 또 개신교나 하는 것이지 이젠 그런 율법은 없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을 주시는 성사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 주신 분을 성사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소득의 십분의 일 바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삼식이 삼촌’(2024)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사람은 세 끼니를 다 먹인다고 하여 별명이 삼식이라고 붙여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장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아들이 수장을 맡자 그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죽게 됩니다. 삼식이 삼촌은 말합니다.
“저는 평생 청우회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사냥이 끝났다고 사냥개를 잡아 먹습니까?” “사냥이 끝나서 잡아먹는 게 아니죠. 사냥개가 지가 사람인 줄 알더라고. 왜 자꾸 식탁 위에 올라와? 잡아먹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에 비해 가나안 여인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니까 성사, 곧 마귀 들린 딸이 낫습니다. 개에게 주인의 말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하.사.시.』를 읽고 매일 하루를 살 한 문장을 공유하며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결코 성체성사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