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2/4)
서반, 중반, 그리고 종반의 전법을 그는 공부했다. 교묘한 책략을 쓴 술책에서부터 일방적으로 가차없는 힘을 모아 다짜고짜 적을 쳐부수는 급전으로 돌진하는 국부 전투에 치우치기 쉬운 분별없는 침략을 삼가는 법도 배웠다.
그때까지 들어본 일도 없었던 이름이 그가 사는 먼 지평선 위에서 춤을 추었다.
앨레카인, 캐퍼블랑카, 라스카, 님조비치 …… 그는 발견의 기쁨에 취하여, 그들의 우주인 흑단과 상아의 미로를 더듬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아직 부족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적수 ― 자기와 부딪쳐 시험해 볼 수 있는 상대자였다.
가끔 그는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책을 가까이 놓고 마음 속으로 따지며 수를 놓아보는 것도 분명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똑같은 수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체스 판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판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전개하면 이쪽을 쳐부수려고 버티고 있는 상대방이 있다면 더욱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이쪽이 말을 하나 움직이면 거기에 대해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서 응수해 오는 장면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차츰 굶주림처럼 심해져갔다.
이윽고 그것은 일종의 기묘한 강박관념이 되어서, 그 때문에 벽이나 난로의 통나무에 비친 루이즈의 그림자가 갑자기 움직이거나 하면 조지는 아무도 없는 맞은쪽 의자에 누군가가 눈에 띄기를 기대하며 깜짝 놀라 눈을 드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그는 그 인물을 상당히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꽤 그를 많이 닮은 조용하고 명상적인 인물로,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며 체스 판을 향해 몸을 구부릴 때 자칫하다가는 흘러내릴 듯한 테 없는 안경이 정말 그와 똑같았다.
이 상대방의 체스 실력은 그보다 좀 나은 편으로, 그를 이길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지로서는 이따금 승리를 거두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그 인물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체스의 관례에 구애받는 자는 아마 이것을 어느 정도 이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즉 그 인물은 으례 백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백을 잡은 쪽은 언제나 선수를 달려 어쩌다가 전세가 달라지기 전에는 줄곧 공세를 편다.
조지는 언제나 흑을 쥐고 백의 돌격과 침공을 빗나가게 하는 한편, 서서히 그 총공격에 대비하는 견고한 벽을 구축하는 일을 좋아했다.
이 방법이야말로 체스 게임을 습득한 이상 무슨 공격인들 막지 못하였다. ― 방어를 철저히 하여 불패의 방법을 습득한 이상 무슨 공격인들 막지 못하겠느냐 라고.
그러나 방어를 하려면 역시 공격을 가하는 수법을 알아야 하므로 결국 조지는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한 가지 독창적인 해결에 이르렀다.
즉 체스 판에 말을 늘어놓고 흑의 진지 뒤쪽에 자리를 차지한 다음, 백을 대신해서 첫수를 둔다.
그런 다음 그것을 흑으로 맞겨누고, 또다시 백을 대신 움직인다.
이처럼 승부가 날 때까지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처롭게도 오래지 않아 그 방법의 결함이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물론 그는 흑의 편을 들었고, 처음부터 양쪽 전략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흑은 한 판 또 한 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미한 경험을 20번이나 거듭하고 난 뒤 조지는 절망에 빠져 의자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만일 한쪽을 대신해서 말을 움직이는 동안 또 한쪽의 일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언젠가 책에서 읽은 아득한 옛날 기억과 궤도를 같이한 기대라는 데 생각이 미치어 그는 안타까왔다.
그것은 만일 두 마리의 뱀에게 서로의 꼬리를 물게 한다면, 상대방을 완전히 삼켜버리기까지 무섭게 투쟁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울하게 그 일을 생각해 본 다음 그는 다시 말을 늘어놓고 테이블을 빙 돌아서 백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만일 자기가 백이라면 어떤 수를 쓸 것인가?
게임이란 한편의 실력만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적수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도 좌우된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였다.
또한 상대방의 게임을 이끌어가는 방법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격, 성격, 천성적인 자질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조지는 비어 있는 흑의 의자를 테이블 너머로 엄숙하게 바라보며 그 사실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신중하게 첫수를 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재빨리 테이블을 돌아서 흑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하는 편이 훨씬 쉽다고 그는 생각하며 거의 반사적으로 백에 대해 응수를 했다.
마음 속에 가슴설레는 스릴을 느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빨리 이번에는 흑의 일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애쓰면서 다시 체스 판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대체 당신을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조지는 깜짝 놀라 눈 앞이 캄캄해져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루이즈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뜨개질거리를 무릎 위에 놓고, 마치 방 전제가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듯 못마땅한 태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설명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허둥지둥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아무 일도 아니라고요!"
루이즈는 엄격하게 나무랐다.
"누가 이 근처를 돌아다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마 이 집에는 당신이 편히 앉을 만한 의자가 하나도 없나 보다고 오해하겠어요. 아시겠어요, 나는 ……"
거기서 그녀의 목소리는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눈이 유리알처럼 생기있게 빛났으며, 몸은 온 힘을 다해 주의를 집중하고 있어서,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라디오에 출연하고 있는 희극배우가 상대방의 모욕에 대해 스튜디오의 청중들이 분명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심한 다른 모욕적인 말로 응수한 것과 같았다.
루이즈는 다시 뜨개질거리로 손을 뻗쳤다.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약간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는 듯했다.
조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놓칠세라 흑 뒤쪽에 있는 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그는 지금 막 굉장한 발견을 하려는 찰나에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무슨 발견이었을까?
육체적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 그를 객관적인 두 사람의 실체로 분리하여 명백히 다른 두 사람의 기사를 가상하는 일을 가능케 했던 것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빠진 것이라고 그는 체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어나서 빙빙 돌며 왔다갔다하는 까닭을 루이즈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체스 판 그 자체가 한 수를 둘 때마다 빙그르르 회전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 하고 생각하면 조지는 차츰 더해가는 흥분을 느꼈다.
체스라는 것은 완전히 지능적인 게임이므로 만일 충분히 게임에 숙달한다면 판 따위는 전혀 필요없을 정도니까, 요컨대 중요한 것은 둘 차례가 되었을 때 자기를 완전히 상대방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아닐까?
자아, 이번에는 백이 둘 차례다, 하고 조지는 자기가 이행할 역할에다 관심을 쏟았다.
그는 백 쪽에서 두는 것이므로 틀림없이 백이 둘 것으로 보이는 수를 두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백의 기사가 느낄 것으로 보이는 감정을 전적으로 실감있게 느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그가 노리는 목표는 잡기 힘들어졌다.
몇 번이나 백의 말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틀림없이 흑이 둘 것으로 보이는 수에 대한 지식이 한 방울의 수은처럼 머릿속으로 대구루루 굴러들어와 미칠 것만 패배감을 느꼈다.
이처럼 밖으로 보이지 않는 괴로움이 그를 괴롭혔다.
바야흐로 이것은 그에게 달라붙어 밤마다 그는 연습에 열중했다.
몸무게가 줄고, 얼굴이 여위어 쪼글쪼글해졌다.
그래서 루이즈는 식사 때마다 그의 옆에 붙어앉아 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그녀의 고심거리인 메뉴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애썼다.
일에 대한 흥미도 없어져서, 당장 그 자리만 모면하는 식으로 일을 했으므로 처음에는 좀 놀랍게 생각하고 초조해 하던 상사도 마침내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의 승부가 있을 때마다, 한 수를 둘 때마다, 하나의 노력을 기울일 때마다 조지는 그만큼 목적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고 환희에 가슴을 설레었다.
틀림없이 그 순간이 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타일렀다.
체스 판 맞은쪽을 객관적으로, 전혀 무관심하게, 그 의도며 계획에 대해 정말 거기에 앉아 있는 산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나 다름없는 지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가.
그리고 그 날이 오면 그는 자기를 능가하는 어떤 명인 기사를 물리쳤다고 주장할 수 있는 승리를 얻은 셈이 된다.
그는 한 수를 둘 때마다 다음 수 뒤에는 틀림없이 그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데 너무도 굳은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 승리가 찾아왔을 때는 다만 기분좋은 만족과 온 신경이 해방되는 평온함을 느낄 뿐이었다.
마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뒤 잠자리에 들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그는 기쁘게 생각했다. 정말 그런 종류의 느낌이었다.
그는 사소한 실수로 흑 쪽을 위험한 국면으로 몰아넣게 되었으므로, 잘 생각한 뒤 승정의 말을 백 쪽에게 큰 타격을 주는 멋진 방어를 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대해 백이 어떻게 응수할 것인가를 연구하려고 얼굴을 들었을 때, 그는 <백>이 테이블 맞은쪽 자리에 두 손 끝을 가볍게 맞대고 입술에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하!"하고 백은 기분좋은 듯 말했다.
"당신으로선 아주 멋진 수인데, 조지."
그리하여 조지의 만족감은 경솔한 손가락에 닿아서 터져버린 비누방울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말은 그를 노하게 만든 동시에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쾌했던 것은, 백이 조지가 예상하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백이 쌍둥이처럼 조지와 닮았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실제 얼굴 모습을 어디를 보나 너무도 비슷하여 마치 그가 매일 아침 면도할 때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서 본 영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영상에는 조지의 진짜 영상과는 달리 아주 압도적인 힘과 거만함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있는 것은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재미없는 숫자의 나열을 계산하는 그런 사나이가 아니라 긴 회의 테이블 윗자리에 앉아 과단성과 생기있는 재치로 중대한 결재를 내리는 그런 인물이라는 걸 깨닫고 조지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의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그보다는 오늘의 일, 오늘이 제공해 주는 좋은 일만 생각하는 사나이 ― 거기에 대한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나이였다.
백이 입고 잇는 최고급 양복에서, 손톱을 잘 손질한 날씬한 손에서, 눈에 보이는 기품과 힘에서, 조지의 눈을 바라보는 엄격하면서도 명랑한 눈의 반짝임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