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을 걸으며(4-2, 우면산길)
(양재시민의숲∼낙성대, 2017년 5월 25일)
瓦也 정유순
2주 만에 찾은 양재시민의 숲 마로니에는 꽃이 다지고 잎은 더 무성하다. 청춘도 사랑도 세월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실로 더 영글어 가는 성숙의 계절로 성큼 다가섰다. 숲속에 마련된 화단에는 더덕 등 야생초들이 가득 메운다.

<양재시민의 숲>

<더덕>
양재시민의 숲을 빠져 나오면 바로 양재천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양재천(良才川)은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로질러 탄천으로 흐른다. 원래 한강으로 직접 흘렀으나 1970년대 초 수로변경공사에 의해 탄천(炭川)의 지류로 변경되었다. 옛날에는 학여울(鶴灘, 학탄)로도 불리었으며, 지하철 3호선의 학여울역은 이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서초구 양재동을 관통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양재천>
양재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하천부지에 우리 밀이 누렇게 익어간다. 옛날에는 쌀과 보리와 함께 밀농사를 많이 했으나 지금은 수입 밀에 거의 의존하기 때문에 오죽하면 1989년부터 ‘우리 밀 살리기기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2003년 5월에는 “추억의 밀 서리 축제”가 서울의 한강둔치 등 전국 6개 지역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밀밭>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모내기철이 되면 농촌 일손 돕기 대상이 되어 필자도 여러 번 모내기를 도우러 왔던 양재동을 옛날에는 말죽거리라고도 했다. 조선시대 양재역(良才驛)이 이곳에 위치하여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는데서 유래 되었으며, 한자로는 마죽거리(馬粥巨理)로 표시되고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이다.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된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많은 사람이 많이 산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서울 남부의 관문이 되었다.
KT연구개발센터 앞으로 하여 어린이놀이터가 있는 우면산자락으로 접어든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봄부터 화사하게 수(繡)놓던 꽃들은 애기열매를 맺어 결실을 기다리고, 무성한 잎들은 녹음(綠陰)이 짙어가며 하늘을 가린다. 뻐꾸기 울어대고 휘파람새 울음소리 처량한데 딱따구리는 따발총을 난사한다. 비둘기는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둥지를 잘못 찾았는지 풀 섶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우면산 숲길>

<우면산 비둘기>
몇 구비 오르고 내리면서 우면산(牛眠山, 293m) 자락으로 빠져 들어간다. 우면산은 소가 잠자는 모양의 산이라고 해서 우면산이라고 부르는데, 한편으로는 큰 바위가 관을 쓴 모양이라고 해서 관암산(冠巖山)이라고 불렀고, 활을 쏘는 궁터와 정자가 있어 사정산(射亭山)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산중에는 우면산약수터, 장수약수터, 우암약수터 등 약수터가 많고 골짜기마다 갓바위, 고래장바위, 범바위 등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바위들도 많다고 한다. 우면산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묘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우면산 사방용 수로>
우측의 철조망을 따라 들어가면 “시설물 보안 관리를 위하여 등산객의 출입을 제한하오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 푯말이 주의를 요한다.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은 서울특별시에서 시정(市政)을 이끌어나갈 공무원들을 경쟁력 있는 인재로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한 기관이다. 1962년 1월 1일 서울특별시공무원교육원으로 설립된 뒤 1974년 7월 27일 용산구 한남동을 거쳐 1979년 지금의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2008년 4월 5일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 후문>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네이버캡쳐>
우면산에는 예술의전당 뒤편으로 백제시대에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의 창건설화가 있는 대성사라는 사찰이 있다. 즉 마라난타가 중국을 거쳐 백제로 들어올 때 음식과 물이 안 맞아 풍토병에 걸렸는데, 우면산의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백제 침류왕은 우면산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짓고 머물게 한 것이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로 지금의 대성사라고 한다.

대성사 전경-네이버캡쳐>
대성사는 이러한 연유로 많은 고승들이 머무르며 수행을 한 도량이었으나, 1919년 3·1운동 때 불교계의 대표로 참가한 용성(龍城)스님이 민족의 독립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사찰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러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 되었다. 그 후 용성스님의 법손(法孫)들이 대성사를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로서 다시 중창하였다.

<대성사 외곽>
1993년 전체 개관한 예술의전당은 우면산 북쪽자락인 서초동에 있는 복합예술센터이다. 음악당·서예관·축제극장·미술관·자료관·교육관 등 예술 전반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공간뿐만 아니라, 원형광장·만남의 거리·전통한국정원·야외극장 및 장터 등 옥외공간까지 두루 갖춘 세계적인 수준의 시설이다. 중심이 되는 축제극장은 한국문화의 한 핵심을 이루는 선비정신을 본뜬 갓 모양의 원형건물이고, 음악당은 부채모양으로 설계되었다. 부지 23만1000㎡(7만 1026평), 건축연면적 12만353㎡(3만6407평)의 규모로 연간 2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연 1,700회 가량의 각종행사가 열리는 복합 문화예술 공간이다.

<예술의전당-네이버캡쳐>

<예술의전당-후면>
예술의전당 뒷길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면 2011년 7월에 우면산을 덮친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난 계곡을 지난다. 산사태는 이곳뿐만 아니라 우면산 주위 여러 곳에서 발생하여 우면동 형촌마을과 방배동 전원마을 등에서 18명 사망했다. 산사태로 인하여 남부순환대로 방배동구간이 이틀 이상 통제되기도 했다.

<2011년7월 수해를 입은 지역>
또한 산사태로 우면산 부근에 매설된 대인지뢰가 유실되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우면산에 배치된 지대공미사일 등 방공진지 보호를 위해 1960년대 중반부터 매설된 1천여발의 M14 지뢰가운데 10여발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한다. 2011년 당시 집중호우는 7월 25일부터 7월 28일까지 내린 집중호우로 거의 전국적으로 내렸지만, 서울의 우면산지역과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13명 사망)의 산사태가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경원선 소요산∼신탄리 구간의 열차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2011년7월 수해를 입은 우면산 계곡>
당시 토사가 덮쳐 피해를 보았던 방배동 쪽 아파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냥 그 자리에 서있고, 길가의 때죽나무, 산딸나무와 족제비싸리는 다른 꽃이 진 자리를 대신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듯 서있는 자웅탑(雌雄塔)을 지나면 우면산 성뒤마을로 가는 고개 표지석이 나온다. 성뒤골은 성(城)이 있던 마을로 부자가 많이 살았지만 도둑들이 활개를 쳐서 모두 떠나버려 일명 도둑골이 되었다고 한다.

<산딸나무>

<족제비싸리>

<자웅돌탑>
우면산 서쪽자락 끝에는 장군봉이라는 절벽을 이룬 작은 산이 있다. 이 장군봉 아래는 옛날 국내 굴지의 재벌을 이룬 모 건설회사의 골재채취장으로 골재를 채취하여 지형이 바뀐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경부고속도로 등 토목과 건축공사에 들어가는 골재를 대부분 이곳에서 공급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사당동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南泰嶺)의 초입으로 지세가 험한 곳이었다.

<붉은 병꽃>

<채석장이었던 방배2동지역>
그래서 “한양에 가려면 남태령부터 설설 기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과천을 갈 때에는 서울 용산의 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야 되었고, 길이 험한 남태령을 넘을 때에는 멀미가 날 정도였다. 남태령은 관악산과 우면산을 연결하는 고개로 처음에는 여우고개로 불리다가,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과천현의 이방(吏方)에게 고개이름을 물어보니,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첫 번째 큰 고개”라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여 남태령이 되었다고 한다.

<남태령 옛길-네이버캡쳐>
옛날의 골재채취장 자리에는 서초전자고등학교를 비롯해 모 쇼핑방송국 등이 들어 서있고, 2016년 7월에 개통된 강남순환로 사당IC가 들어섰다. 강남순환로는 관악산과 우면산을 터널로 관통하여 서울 금천구 시흥동∼서초구 선암 나들목을 연결하는 민간자본(民間資本)의 도시고속화 도로이다. 우면산에는 과천에서 서초동으로 연결되는 민간자본의 우면산터널이 또 있다.

<강남순환로 사당IC>
서울둘레길 4코스는 수서역에서 대모산과 구룡산과 우면산자락을 넘어 사당역까지이다. 두 번으로 나누어 종주하고 나니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5코스의 일부인 낙성대까지 욕심을 내어 관악구 남현동 고개로 들어선다. 남현동은 원래 사당1동지역이었으나 남태령이 있는 고개 또는 남쪽의 고개라는 뜻의 남현(南峴)이라는 이름을 얻어 남현동으로 분동이 되어 관악구로 편입된 지역이다. 그리고 1969년에 예술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최초의 ‘예술인마을’이라는 별칭도 있었으나 지금은 예술인이 별로 없다고 한다.

<사당동 쪽 과천대로>

<남현동 고갯길>
남현동 골목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관악산관음사(冠岳山觀音寺)가 나온다. 관음사는 895년(진성여왕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비보사찰로 창건되어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관음기도도장(觀音祈禱道場)이다. 비보사찰(裨補寺刹)은 명당에 절을 세우고 기도하면 나라가 융성하게 된다는 불교의 호국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관악산과음사 일주문>

<관음사 돌장승>

<관음사 대웅전>
관음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올라오면 돌장승이 길을 안내하고 사찰 담벼락 옆으로 서울둘레길을 따라간다. 우면산 길은 거의 흙길이었다면, 관악산 길은 비교적 돌이 많다. 요즈음 미세먼지가 극성이더니 오늘은 하늘이 맑아 상도동 쪽 아파트들이 아주 가깝게 보이고, 더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또렷하게 보인다. 오르고 내려가는 고갯길은 우면산 보다 더 가파르다.

<상도동 쪽>

<서울전경-뒤로 도봉산이 보임>
길목에는 무당골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은 우주의 만물과 그 운행에는 각각 존재와 질서에 상응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어 인간이 제 스스로를 낮추어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며, 위하고 섬기면 소원을 성취하고, 모든 일이 질서를 찾아 편안해진다는 확고하면서도 광범위한 범 우주적, 자연적 신관과 나름대로의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는 민간신앙이다. 즉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당골 바위굴에는 촛불을 킨 자국만 남아 있다.

<무당골>
서울대학교를 경계하는 철조망을 따라 우거진 숲길은 마지막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산새들은 반가움인지 놀라움인지 주변을 맴돌며 노래한다. 몇 구비의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은 낙성대이다.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탄생지이다. 강감찬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역사상 3대첩의 하나인 구주대첩의 영웅이다. 낙성대는 1973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성역화 사업으로 사당인 안국사(安國祠)가 들어서고 주위로 긴 담장을 두르는 등 공원으로 바뀌었다.

<안국사-네이버캡쳐>
첫댓글 와야님의 글은 어디나 똑같아 보이는 산길을 걷는다는 생각을 깨고 지역의유래속으로걸어들어가게 하십니다^^
걷는데 부족함이 많아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가끔은 뒤로 쳐지면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기도 했죠~~
서울 우리 땅은 지역마다
절절한 이야기들이 많이 숨어 있다고 해요.
오늘도 공부하며 읽고 볼수있는 후기 감사드립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뒤로 쳐진 저를 리딩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내려오는 길이 헷갈려
낙성대로 가지 못해 송구했습니다.
지역에 얽힌 일들이 와야님 후기에서 술술 읽히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산딸나무는 이번 도보에 확실히 공부가 되었습니다
재밌는 후기 감사합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풀과 나무들을
전체의 1%만 알아도 아주 많이 안다고 해요.
저희들에게 더 많은걸 알려주시기 위해
향상 뒷편에서 수고하시는 와야님~!!
그냥 편하게 앉아서 보기에는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읽어 주시기 때문에 큰 힘이 됩니다.
덕분에 제가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고요~~
그래서 모르던 것도 새삼스럽게 깨닫죠~~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네요
우리가 걸어온길을 공부하며 다시걸어봅니다
관음사길 오를때 거치렀던 숨소리가 지금도 들리는듯~
오름이 즐거웠던 그날들이 생각납니다
저는 걸으며 사진을 세컷 찍었네요
밀밭과 관음사~ 그리고 안국문~전경..
다른곳은 후기로 보고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늘색이 고운 안국문에서 한컷 투척하고갑니다~~*^•^*
제가 뒤쳐져서 후미 보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날 5시에 약속이 있어서 뒤풀이도 못했네요~~
다음에는 쳐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와야님
후기글을 읽고 있으면 다시 그속으로 들어가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자세한 설명으로 많이 배움을 하게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를 읽으시는 분들에게
지루함이 없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