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아 저승
변윤제
코코아 가루가 이마에 떨어져서
그만 살아나 버렸다
내 영혼에 어울리는 씨방을 나는 아직 모르는데
붓다나 예수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아침
그래도 나는 신보단 우리를 더욱 좋아하기로
다시 사라질 수 있다면
카카오 열매 하나에 어린 작고 조밀한 햇살이 되어야지
재차 태어나야 한다면
카카오 씨앗 하나에 맺힌 낮고 차가운 연갈색이 되어야지
어디에 가더라도 사람이 정말 많다
사람만 지나치게 많다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없지
그런데 동시에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나는 자꾸 코코아 가루 한 톨의 안부를 묻는 자
사람의 냄새 말고, 사람의 박동 말고, 사람의 동작과 리듬 말고
사람의 고요와 창백 다 말고
코코아, 카카오 씨앗을 빻아서 만든 가루
나는 자꾸 태어나고 만다
계속 사람으로, 계속 인간의 형상으로 매일 눈뜨고 만다
그늘의 빛과 초콜릿 빛이 닮은 건 우연이 아닐 거야
내가 매일 눈 뜨는 이곳은 코코아 저승
초콜릿케잌에 소금을 넣으면 더욱 달아지고
고통은 행복이란 낱말과 잘 어울려 주는데
확신의 유령
오늘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당신은 그렇게 말합디다.
확신이라니요. 당신은 안개잖아요. 실크 커튼이 아니라, 장대 나무가 아니라. 흩어지는 입김, 연기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만 머리를 부여잡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믿어줄 수가 없어요.
마치 믿음이 머나먼 촌락의 이름인 것처럼.
대답 대신 저는 질문을 드렸지요.
확신이 없다면 그 자리엔 무엇이 들어서 있나요.
당신은 답 대신에 다리를 흔듭디다. 무수히 많은 살비듬이 바닥에 떨어집디다.
없어질수록 풍성해지는 희미함이. 자욱해지는 여름 장막이. 칠월의 습기가. 물벼룩이. 번성하는 검은 불길이.
안개로 수놓는 불결한 머리카락이.
빗자루가 쓰레받기를 열망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타르트가 깍두기를 열망한다면.
커피콩이 완두콩을 부러워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니.
하지만 당신은 머리를 재차 휘젓습니다. 아니요. 아니라니까요. 아닙니다. 머리를 프로펠러로 만들면서.
흰 장막을 헬기의 공중으로 보내면서.
확신에 대한 질문이란 건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서. 재차. 다시 재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나는 그대에게 천천히 다가가려 했습니다. 찻물을 걸어가는 조그만 악어처럼. 물 주름을 펼치는 티스푼처럼.
방바닥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걸 보았습니다. 이파리의 다른 음계를 더듬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되어가는 일들이 있을 것이며.
믿음은 컴컴한 가시복어의 다른 이름. 우리들의 심해 어딘가에서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자꾸 아니라 합니다. 아니, 아니라고.
‘아니’로 구성된 나무를 기르는 사람처럼. 아니의 정글숲을 헤쳐가는 사람처럼.
당신이 자꾸 아니라고 해서.
내 가슴팍에 달린 명찰의 이름이 ‘아니다’로 천천히 바뀌는 중이었으며.
당신과 나의 이마에도 ‘아니’라는 그 두 글자가 초조히 수놓아지는데.
그래서 나는 그냥 맞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맞는지 모르면서.
무엇이 맞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니와 맞다의 끊임없는 앙상블 속에서.
우리 둘의 입술이 흩어졌습디다. 먼 곳에서 보면 누가 아니고, 누가 맞는지 모르겠는. 두 명의 동일한 모가지에서.
맞다고.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그것이 유일한 확신의 목울대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