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프로필
박철 : 서울, 단국대 국문과, 백석 문학상. 시집[영진설비 돈 갖다주기]외 다수
시 감상
해 좋은 날 해 바라기, 목련을 보며 휘파람 불기, 아! 문득 봄이다 하기, 오늘 뭐 해? 저녁에 소주 한 잔 어때? 애들 데리고 공원에 다녀올게, 그리고 박철의 시처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도...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한다. 일상이 아득한 어떤 날의 꿈이 되어버린 코로나 전성시대. 그냥 있기도 뭣하고, 저냥 있기도 뭣하고, 공연히 봄이나 들들 볶다가 그마저도 지쳐 하늘을 본다. 구름이 참 예쁘다. 어서,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으로 돌아가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절대자님들에게 간절하게 기도해본다. 요 몇 달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